방송인물

홍양보 아나운서의 명복을 빕니다.

이장춘 2015. 10. 22. 04:17

 

 

홍양보 아나운서의 명복을 빕니다.

 

 

1945년 평앙방송으로부터

1946년 KBS아나운서로 해방공간에서

또는 전쟁기간중 왕성한 퐐동을 하다가 유엔근

 총사령부방송 (VUNC)에 파견되어 빙송을 시작한  이래

그곳에서 20년 가까운 세월 방송을 했으며 VUNC가 해체될 무렵

1969년 VOA로 옮겨 1990년대 까지 미국의 소리에서  근무하는등

무려 반세기 50 여년간을  국내외헤서 아나운서로  활동하신  홍양보

아나운서가 향년 100세가 돤 2015년 9월 29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세상을 뜨셨습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오랜세월 방우회와

 함께 하셨던   전 방우회 회장 문시형 선생님께서  남기신

 1991년의 글 한편을 올렸습니다.   홍양보 선생님이 

세상을 뜨실 때까지 최고령의 방송인 이었

니다. (최선임은 호기수 아나운서) 

 

 

문시형 선샐님의 글은 선생님이

방우회장을 하던시절  방우회 사무총장을

지낸 정항구선생님이 보내 주셨고 홍양보선생님

영면소식은 홍양보 선생님 아들  친구분이자

오랜세월 KBS 방송기술인으로 활약하신

강태인 국장님이 전해 주셨습니다.

 

 

강태인님이 전해 오신 글

 

 

홍양보 (前 원로아나운서)님께서

 2015년 9월 29일(화) 오전 03시 20분

별세하셨음을 알려 드립니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 빈 소 : 11706 Berwick Road Silver Spring, MD 20904 (고인주소)
▣ 상 주 : 홍철 (☏ 202-320-6527)
                     상주주소: 12611 Eastbourne Drive Silver spring MD 20904 USA)
▣ 연락처 : 강태인 010-3898-4096 (국내연락처)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이 세상에 오셔서 방송인,

아나운서로서 평생 종사하시고
100수를 누리시고 누구나가는 길을

가셨으니편안히 영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박서림(원로방송작가) 선생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세수 백세,  부지런해야 오래 산다는

 교훈을 남기신 분이시군요. 그 화려하고

 정열적인 음성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VUNC

와는 군에 있을 때 그리고 심리전에 종사

할 때 긴밀한 협조를 받았었지요. 

 

 수고하셨습니다

 건강하세요.
 

 

답  

.

VUNC와 인연이 깊으셔서
홍양보 선샌님을 기억 하시는 군요.
벅선생님도 오래 오래 사셔서 길잡이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이경희(스무고개, 재치문답 박사) 선생님 

 

 

이장춘 선생님께!

 

늘 정성껏 써서 보내주시는 방송인의

 소식 잘 읽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홍양보아나운서의

서거소식과 더불어 문시형 선생님의 글까지 자상하게 챙겨서

보내주신 긴 글을 읽으면서 옛날 정동방송국과 남산방송국 때 생각이 

떠오르는군요. 많은 분들이 지금은 고인이 되신, 그리운 분들의 이름을 보면서

 옛 생각에 한참을 젖었습니다.  특히 문시형선생님 생각은 끝이 없이 떠오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것이, 방송에 전혀 경험이 없고, 사회의 이름이 있는 사람도 아닌,

더욱이 나이도 적은 대학교 2학년생이었던 저를 명사들로 이뤄진 수무고개

푸로의 정규 박사자리에 않힌 그분의 과감한 결정과 철저한 푸로듀서

 정신이 무척이나  저의 마음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말씀으로 방송사상 처음있는 결정을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문시형선생님은 방송을 위해 태어 난

사람처럼 방송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춘하추동방송을 이토록 성의와 애정을 가지고 방송인

들을 위해 하고계시는 이장춘선생님도 같은 분이십니다. VUNC

오끼나와 사진에 김유선아나운서 얼굴도 보여 반가웠습니다. 김유선님의

남편인 이중집, 강찬선, 노정팔, 문시형, 문제안, 조백봉, 김창구, 김성열,

그리고 또 많은 분들 생각이 납니다. 지난 번 방우회모임때 그나마

그리운 분들을 뵙게 된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홍양보아나운서님의 명복을 빌며-.

 

이경희드림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글

 

 

무려 반세기 동안 오직 방송 아나운서로써 외길을  

걸어오신 홍양보 아나운서님!의 공덕을 높이 찬양 합니다.

 때가 되면 사람은  언젠가 하늘 나라로  가지만  못다한  일과

 과제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을텐데....이제 다시 먼 하늘나라에서

못다한 일과 과제들을 차근 차근 완성 하시기를 바랍니다. 적당주의가

 판을치는 세상 인지라,일을 열심히 해도 칭찬 보다는 다른사람의

시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100수를 누리신 홍양보 선생님!의 영전에
흰 국화를 헌화 하면서 명복을 빕니다. 소식
감사

합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사장님!...

 

 

답  

 

 

홍양보 선생님은 문시형선생님이

아래 글을 쓰실 때까지 46년간 방송을 하셨고

그 뒤로도 방송을 하셨으므로 반세기 50년이

넘는세월 방송을 하신 분입니다.

 

 

김영우 (미국) 선생님 글

 

 

홍양보 대 선배 아나운서 별세 소식

잘받얐습니다.   홍 선배 과거의 활약상도

 새로운 것을 배웠고요....1세기를 방송 을 위해

공헌하신 홍선배의 명복을 빕니다. 저의 건강 상태가

 많이 호전되고 있습니다...이 국장님 수고 많이

하십시오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북가주 댄뷜에서  김영우 드림  

 

 

 

백선엽 육군 대장과 김정열 공군 소장이 VUNC 홍양보 아나운서와 대담하고 있는 모습.

 

 

 

전 방우회장 문시형 선생님 유고

 

 

 

46년간이나 마이크를 지켜온 불굴의 방송 인생 홍양보 아나운서

 

 

 

 

현역아나운서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이를

꼽으라면 홍양보 아나운서일 것이다. 4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오직 마이크 앞을 떠나지 않았다. 홍양보 아나운서 이상으로

예외적인 인물로는 금년 75세인 강찬선 아나운서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KBS의 사회교육방송에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역은 아니다.

정년이란 올가미를 씌우지 않는 능력본위의 미국사회가

부럽기는 하지만 어떻든 V0A(Voice of America)

현역 아나운서임에는 틀림이 없다.

 

 

1916년 5월 22일생인 그는 평양이 고향이다.

홍양보씨가 방송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평양방송 아나운서로 활동하면서부터였다. 그 이후 KBS에

발을 들인 것은 1946년. 공채 아닌 특채로 아나운서가 되었다.

아나운서는 공채가 아니면 될 수가 없는데 유독 그만이

특채되었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며,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홍양보 아나운서가 특채된 것은

평양방송국의 전력이 인정되었다기보다 엄격한

심사 결과에 의한 결정이었다. 중앙방송국장 이혜구박사와

이계원, 민제호 그리고 윤길구, 이덕근등 당시 기라성 같은

대 아나운서가 현역으로 뛰고 있었으니 이분들의 엄격한

 심사는 기본 절차였으며그런 다음 내려진 특채였다.

 

 

 

 

 

 

사실 아나운서가 세속적인 말로

배경 운운 또는 금력으로 될 수 있는 전문직이

아니기에 강조하는 것이다. 홍양보 아나운서는 공채 출신이

아니라는 점과 매사에 열심이고 부지런한 게 지나쳐 동료들의

미움까지도 산적이 있다는 험담 아닌 험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오로지 일을 대하는 정열이 남달리강해서였던 때문이고

그러기에 71세라는 고령에도불구하고 VOA현역 아나운서 자리를

지키게 한 바탕이라 하겠다. 1949년 가을의 일이었다.

 

 

서울 운동장에서 벌어진 축구 중계방송이

 있었다.   중계 팀은 담당PD와 엔지니어 그리고

아나운서로 구성되는데 아나운서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중계방송 시간은 다가오는데 담당 아나운서는 보이지 않고 그런데

마침 담당 아닌홍양보 아나운서가 중계석에 나타났다. 담당 PD였던

필자는 초조했다. 방송시간 1분전에 관중석 스탠드위에그 프로그램

담당이었던 서모 아나운서의 모습이 보였으나이미 시간은 늦었다.

온에어의 큐사인은 홍양보 아나운서에게갈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서모 아나운서는 시간도 시간이지만중계석에 앉아 방송태세를

 취하고 있는 홍양보 아나운서를봐서 되돌아갔다. 그날

멋들어진 축구 중계방송은홍양보 아나운서

 덕분에 무사히 끝났다.

 

 

담당 PD였던 필자의 그때 기분은 홀가분하였다.

그러나 인기관리를 스스로 해야 하는 아나운서 세계는

달랐다. 축구 중계방송을 하는 아나운서의 인기도를 생각할 때.

끝내 해프닝이 벌어졌다. 방송을 마친 우리 중계 팀은 중계방송용

기자재를 싣고 돌아오던 길에 급기야는 고성이 오가고 육탄전이

벌어질 정도로 매우 험악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부지런한 홍양보 아나운서 덕에 사고 없이

중계방송을 마쳤으니 담당 PD였던 필자는 감사해야

마땅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뒷맛은 좋지

않았다. '스무고개'도 같이 방송했던 20대,

원기 왕성했던 42년 전의 일이다.

 

 

미주 한국일보(1991년 4월 20일 발행) 5면에는

올드타이머로 홍양보 아나운서의 부지런함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새벽 6시에 나와 하오 2시까지

방송국에서 극동쪽을 향해 소식을 전한다. 지난 60년대에 워싱턴에

온 뒤 줄곧 계속하는그의 일과이다. 이래서 지금 워싱턴의 '올드타이머'들

 가운데는'아직도 새벽에 나가십니까?'하고 인사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하지만

새벽 출근을 위해 전날 밤 8시에 자고 새벽1시에 일어나 집에서 한국과 일본에서

보내오는 단파방송을 골고루 듣는게 아예 버릇이 되어 버렸고그는 '그게 없으면

생명이 끝나는 것 같다'고 실토할 정도이다." 참으로 부진런한 방송인

으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는그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열심이고 부지런한 또 하나의 실증은

KBS에 아나운서라는 직책을 갖고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사실이다. 남달리 학구적이었던

그는 1970년대 일시 귀국길에도 방송관계 세미나가

있으면 자청해서 참가하기도 했었다.

 

 

 

김구선생님 국민장 행열

 

 

 

그는 학구적이고 노력 형이나 반면에 정에는

지극히 약한 일면도 갖고 있다. 호곡방송- 아나운서 계에서

호곡 아나운서로 일컬어지는 화제의 인물이기도 하다. 1949년 6월

있었던 일이다. 고 김구선생의 국민장이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거행되던 날을

을 지로에 있는 경전 2층에 진을 치고 있는 즉 중계방송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어디를 가나 또는 이동하거나 말거나 중계방송이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어느 지점에, 고정된 곳에 자리 잡아야만 중계방송이 가능했다.

 

 

국민장에 의한 고 김구선생의 운구행렬실황

중계방송을 담당한 홍양보 아나운서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말하자면 호곡방송을 한 것이다.

냉정한 가운데 침착성을 잃지 말아야할 아나운서가 호곡을 한다?

아마 우리나라 방송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 호곡방송에 대한 논란이 가시지 않았다. 아나운서도 사람인데

비통함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그 방송을 두고 감정을

살린 중계방송이었다는 호평도 없지 않았다.

 

 

김구선생님 국민장을 중계방송 했던 아나운서들

 

 

 

6.25전까지 평양에 있었던 강찬선 아나운서는

그 중계방송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호곡방송에

 대한 시비가 있기는 하나 평양에 사는 우리 동포까지도 특히

 공산치하에 있는우리 동포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는 것은

 기록에 남는중계방송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1950년 6월 27일 낮 의정부를 국군이 탈환했다는,

전선으로부터 날아온 승전보를 받은 그는 이를 현지취재

방송하겠다며 이성수 아나운서와 함께 여의도 비행장으로

달려갔었다. 비행장에 도착해 보니 이륙할 수 있는 군용기는

한대도 없었다. 승전보에 용기 백배, 비행장까지 달려간

홍양보 아나운서와 이성수 아나운서는 맥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한강 인도교에 다다르니 헌병이 길을 막는다.

누구를 막론하고 서울 시내로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성수 아나운서는 헌병과 다투기까지 하면서 억지로 시내에

들어갔으나 마음이 여린 홍양보 아나운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퇴하는 장교의 권유에 따라 남하하였다.남하하는 길목 대전에

이르렀을 때정부도 대전으로 이동했고 500W에 지나지 않던

대전방송국에서 방송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유언비어에 속아 정부요인과 공무원 심지어 방송국

직원일부도 남쪽으로 도망친 일이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 대전방송국 옆에 있던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수천명이

형무소 벽을 깨고 나오려한다는 형무소 직원 식모의

제보를 받았다. 그는 참으로 암담했었다. 급보를 접하자

급히 헌병대에 연락해 헌병대가 출동하기에 이르러 그야말로

 위기일발 직전에 수습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방송국

간부들은 흩어지고 책임자라곤일개 평 아나운서인 홍양보 아나운서와

일부기술직 직원뿐이었다 한다.이 같은 실정을 알게 된 당시 국방부장관

(국무총리서리겸)은 메모용지에 홍양보 아나운서를중앙방송국장에

임명한다는 발령을 내렸었다. 전시이니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로 인해 유언비어에속아 달아났다가 돌아온 계엄

관(군인)과 방송국장등간부에 의해 오히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951년 1.4후퇴 당시 홍양보 아나운서는

부산으로 피난을 간 게 아니라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아나운서로, 말하자면 징발되어 동경으로 갔다.

이때부터 KBS와 인연을 끊고 동경에서 오키나와로

옮겨 장장 18년간을 심리전 방송에 전력했다.

 

 

1951년 가을 비좁은 동경 VUNC스튜디오에서

앞으로의 전세를 백선엽장군과 공군의 김정렬장군과의

대담방송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라고 40년 전을 회고하면서

사진자료를 보내왔다. 그는 사랑하는 처와 늙은 홀어머니를 두고

혈혈단신 동경안전지대에 가 있었으나 편안치는 않았을 것이다.

"도쿄NHK 제8스튜디오에서 저녁방송을 10시 반에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기 위해 신바시 지하철 정거장에 들어서면

일본어 방송이 끝나고 우리 애국가에 이어서 유엔군

총사령부방송(재방송)이 울려 퍼지는 것이다.

 

 

 

 

 

 

전황이 유리할 때, 역전 포장마차에서

내목소리로 녹음된 뉴스를 들으며 맥주 컵을 기울일 때,

그 기분은 나만이 누리는 호사였다." VUNC 동경시절을 회상하는

글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VUNC아나운서이지만 휴직상태에 있었던

홍양보 KBS아나운서는 일본 도쿄등지에서 개최한 한.일간의 스포츠

축구올림픽예선전, 한. 일 여자 농구전, 세계   탁구선수권대회, 특히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의 중계는 서울에서 파견된 중게반의 뒷바라지를

도맡다시피 했으며, 미군용 전화선을 통해 보도하도록 주선하고때에

 따라서는 직접 중계 방송까지 한 일은 부지런한 홍양보

아나운서만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68년 오키나와에서 VUNC가 해체됨에 따라

도미한 그는 1969년 VOA아나운서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VOA아나운서 생활만 22년을 해오고 있다. 비록 멀리 미국

땅에서 보내는 방송이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미국의 소리'전파를 타고

북한과 중국의 우리 교포들에게도 전해지는 것이 크나큰 보람이라고 하는

 홍양보 아나운서의 근황을   미주 한국일보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7년전에 VOA미국인 과장이 홍양보 아나운서의평가 기록에 '너무 뛰어 다녀

 남들이 불안해한다.'고 적은 일이 있었는데 70대가 된 지금도 스튜디오에

 갈때는 여전히발걸음이 빠르다. 일하는 동료 10명은 모두가 '기자'라고

 불리워도자기만은 '아나운서'라는 칭호가 여전히 따라 다니고

 지금도단파라디오를 가방 속에 넣고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정통파 아나운서 홍 씨다.

 

 

1951년부터 1991년 현재가지 해외에서

우리말 방송 아나운서로 일관해 왔다는 것은 그 누가

원한다고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오직 방송을 천직으로

정진해 온 아나운서이기에 성사된 일이기도 하다. 천직을 지켜 온

그이기에 남이 누릴 수 없는행운이 뒤따르기도 했다. 1987년 7월에

 민족의 영산인백두산 정상에 우뚝 섰으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중국

만리장성에 버티고 섰던 그는이런 편지를 한 적이 있다.

 

 

 

 

 

 

"40여 년간 아나운서라는 한가지일, 주로

 뉴스보도를 했습니다.    약 반세기에 걸친 뉴스를

전하면서 언제나 아쉽고 미흡한 것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처지여서 역사가 된 그 뉴스의 현장을 가보고 싶은 욕망이 쌓여서

1975년 4월엔 소련과 동부유럽 그밖에 여러 지역을 가보았습니다.

특히 유네스코가 전 세계에 각국 어린학생들의 성금으로 이집트

나일강변에 아부실벨 신전을 나일강땜 수중에 잠기지 않게

높은 언덕위에 이전시킨 뉴스에 감동해 찾아가본 일은

행운이었습니다. 1990년 7월 30일엔 무너져 내린

베를린장벽을 찾아가 정으로 콘크리트

장벽을 깨기도 했습니다."

 

 

기념사진 몇 장을 동봉해 홍양보 아나운서가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이다.

 

 

"지난 4월 일본 지바에서 남북한 단일선수단이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에 참가했을 때 VOA의 주간 스포츠뉴스에서

방송하기 위하여 남북의 감독진과 유명한 남북선수와의 인터뷰는 3.8선을

넘어온 피난민으로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한 달 반에 걸쳐 방송하는 중에

남북단일팀의 선수와 임원 그리고 재일교포들은 이미 마음의 3.8선이 무너져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형진 단장과는 두 차례에

걸쳐 약 15분간 방송했는데 대화가 끝난 직후에 있은 인터뷰에서는

남북선수 임원들 모두가 헤어지는데 대한 서운한 감정이 어조에

역력히 드러나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습니다."

 

 

비록 몸은 머나먼 미국 땅에 있지만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한결같은 소원이 담겨져 있다.

1951년부터 시작한 홍양보씨의 객지생활을 알고 있는

노 방송인 이인관씨는 항상 그의 인품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영원히 남을 아나운서인 그이의 만수무강과

행복이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문시형님

 

 

 

고 문시형 선생님이 방우회장 시절

1991년에 쓰신글을 당시의 방우회 사무총장

 

 

정항구님이 보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