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방송인협회

양방수님 파푸아 뉴기니 체험 기행문 (3) 1984년 한국외방선교회

이장춘 2015. 1. 26. 11:50

 

 

 

이 글은 미주방송인협회 양방수

총무국장님이 1984년 3월 천주교 韓國

外邦宣敎會(한국외방선교회) 홍보부장으로

파푸아 뉴기니 (papua new guinea) 오지를 가, 

선교활동을 하면서 체험한 현장 기록 세번째 글로

원래 10편의 글로 엮어 보내주셨는데 춘하추동방송

에서 네편으로 나누어 올릴 계획으로 오늘은

양방수 파푸아뉴기니기행문 4편, 5편.

6편, 7편을 모아 올립니다.

 

(1)편 (2)편 (4)편은 아래 연결했습니다.

  

(1)편 글보기 영문자 클릭

http://blog.daum.net/jc21th/17782045

 

(2)편 글보기 영문자 클릭

http://blog.daum.net/jc21th/17782373

 

(4)편 글보기 영문자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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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방수님 파푸아 뉴기니 체험 기행문 (3) 1984년 한국외방선교회

 

 

양방수 파푸아뉴기니기행문 4편

 

1984년 3월 22일-4월 17일

 

 

문명의 異邦地帶(이방지대) 赤道(적도)파푸아뉴기니를 가다.

 

韓國聖人(한국성인) 이름으로 領洗(영세) 줘 !

文字(문자) 없어 姓氏(성씨)도 몰라 !

                      下衣(하의)만 입고 목에는 묵주를 걸고 다니고 !

                       돈 생기면 神父(신부)님에게 맡겨 !

 

 

 

 

신부님은 악어가 우글거리는 흙탕물속을

 위험을 무릅쓰고, [카누:CANOE)]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서 전교길에 나서기도 하고, 등산차림에 정글화를

신고, 원주민을 대동하고, 전교길에 나서기도 했다. 신부님들의

생활은 항상 규칙적이고, 시간표에 잘 맞추어 있어 원주민들은

신부님의 공소 방문날에는 나름대로 최대의 아름다운

옷차림으로 반겨 주었는데, 그 옷 차림은 겨우

 천으로 아랫도리를 가리운것에 불과 했다.

 

 

 

 

비록 피부 색깔이 다르고 언어와

풍습이 달라도 성모님께 드리는 묵주 기도를

 바칠때는 하느님을 믿는 자녀임이 드러나게 보였다.

또 자기 부족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을때는 언제나 신부님

에게 상의 했고, 얼마의 돈이 생기면 저축할수있는 은행이 없기

 때문에 신부님에게 맡껴 두었다가 필요한 때에 타다 쓰는것이 관례로

돼 있는데 그것은 자기네 보다 신부님이 우월하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집안을 둘러 보았으나 나무위에 얹어 놓은 몇 개의 그릇이 부엌 살림의

 전부였고, 옷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않는 날씨에 바나나가 주렁 주렁

익어가는 모습은 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가 살았다는 [

에덴] 동산에 온것 같은 기분이였다.

 

 

 

한국성인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김 진형 신부님

 

 

 

 타우야 추장에게 금일봉을 전달하는 필자.

 

 

묵주는 목에 걸고 다니는 주민들

 

 

오늘(1984년 4월1일,일요일.)은 우리나라

 103위 성인들 중에 金大建(김대건), 丁夏祥(정하상),

金孝任(김효임), 金孝珠(김효주), 네 聖人(성인)의 이름으로

 성세를 주는 날이라서 그런지?! 그칠줄 모르게 밤새도록 퍼붓던

 소낙비가 아침 7시반에야 겨우 그쳐주어 타우야[Tauya] 마을에

들어서니 자연으로 만든 현수막으로 마을 입구에 만들어 놓고,

男女老少(남녀노소) 제각기 활과 창과 나무가지를 들고

온몸을 흔들며, 주민 모두가 북소리에 맞추어 환호

하며, 김 진형 신부님과 저를 환영해 주었다.

 

그들도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받고,

 깨끗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 하여 하느님을

모실려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이날

幼兒(유아) 洗禮(세례)를 베풀고 미사를 마치고, 筆者(필자)는

타우야 마을 주민들이 모두 지켜 보는 자리에서 타우야 마을 추장에게

 금 일봉(그나라 시세로 황소 한 마리 가격)을 전달을 했는데 그들은 매우

감사 하다고 했다. 대개 사람들은 옷을 입지 않아 묵주(로사리오)만을

 목에 걸고, 있을뿐 그들도 매우 진지한 모습이였다. 한편 온통

흰색으로 몸을 칠한 戰士(전사)들은 얼마전 까지도만

 해도 사람(人(인) 고기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

 

 

 

전사자들의 모습

 

 

 

브라만 성당의 공소 타우야 마을 학생들과 필자.

 

 

 

타우야 마을 주민들과 필자

 

 

 

타우야 마을의 가족 사진(양 방수 촬영)

 

 

 

 필자가 만들어 간 한국외방선교회

旗(기)를 목에 걸고 환영해 주었다.

 

 

아직까지 마찰을 이용해 불을 일으켰고,

담배를 즐겨 피우는 모습은 石器時代(석기시대)

그대로 였다. 그들은 먼 여행을 갈때는 대나무 통속에 

음식을 넣어서 길게 메고 다니다가 끄집어 내어 먹곤 하였다.

문자가 없는 정글의 나라 ! 姓氏(성씨)나 나이의 槪念(개념)도

 없는 나라 ! 정글속의 삶은 변화없는 일기였고, 세월의

 흐름을 알려 주는 달력도 없었다.

 

지난 1984년 2월 22일부로 김진형 신부님이

발령 받은 [왈리움] 뉴 타운은 한국 성인 103위 성인중을

주보로(나중에 김 대건 성인으로 바꾸었다고함) 성당을 건립하려고

이미 성당터를 확보하여 두고 있는 傳敎地(전교지)를 김 진형 신부님과

나는 단엽기를 타고 上空(상공)에서 둘러 보고 사진 촬영과 기록 영화를

촬영하였고, 김진형 신부님이 한국에 와서 모금 운동을 했다.

 

 

성당을 건립하려고 이미 성당터를 확보한 [왈리움] 뉴 타운의 전경,

 

 

이 나라 어디를 가든지 그 특징은 종족의

 상징인 [목각신상]을 곳곳에 세워둔 것이였다.

목각 신상은 천주교가 이곳에 들어 오기전 부족 마다

제 각기 다른 토속 신앙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고, 그 토속적인 장신구도 부족마다 다른 것을

볼 때 신앙도 부족마다 다름을 알수 있었다. 

 

공룡의 형상을 닮은 뉴기니섬 !

공룡의 등을 西北(서북)쪽으로 달려

연제식 신부님이 전교하는 [기리] 성당을 향해

고속도로를 따라 신부님이 직접 운전하며 8시간을 달렸다.

이곳 고속 도로는 아스팔트가 아니고, 흙으로 된 고속 도로로

 잘 다듬어 놓았으나 80Km 속도로 달리기엔 너무나 험한 길이였다.

 한차례의 폭우를 맞으면서 험한 길을 따라 [기리] 본당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또한 밥 까지 손수 해먹어야 되는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구와 본당, 본당과 본당 사이에는 전화 시설이

 없어 무전 라듸오 을 통해서 하루 한차례 서로 교신 하였다.

 

4월 4일 [기리]국민학교 교실에서 학생들과

 미사를 드렸다. 이곳 [기리] 성당은 외방선교회 창설자

이신 최재선 주교님의 후원으로 원주민들과 혼연 일체가 되어

성당을 건립 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으나 못을 하나 박아도

신부님의 손길이 없으면 그들 스스로 건립할 수가 없었으니

 참으로 어려웠다. 그들은 건축법을 알지도 못했고, 어디서

배울 기회도 이유도 없었다. 방상복 신부님이 전교하는

 [이곰]은 험한 정글과 폭우로 갈수 없어 아쉬웠다.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救靈(구령)하기

 위하여 인간적인 고뇌와 싸우면서 한 평생을

 바치고 있는 선교 신부님들의 피나는 삶을 어찌! 우리가

 하느님 백성으로써 가만히 보고만 있을수 있겠는가? 선교사

해외 파견에 즈음하여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이제 우리도

 미약하지만 받은 것을 보답하고,    세계속의 교회로써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 성숙한 교회가 되는 것이고,

선교사의 소명을 기쁘게 받아들일 젊은이가  있고, 그를 뒷

 바침할 가정과 본당, 교구가 있을 때 성숙한 교회가

 되는것]이라고 강조 하신바 있다.

 

 예수님의 지상 대리자이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개방성 없이

 폐쇄된 교회는 불완전 하고 병든 교회]라고 강조

 하셨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여 世界(세계) 福音化(복음화)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기수를든 한국 외방 성교회 선교신부님

들의 뜻에 동참하려는 모든분들의 권고와

의견을 손꼽아 기다린다.

 

 

 

 <양방수 파푸아뉴기니 기행문 5편>

 

 1984년 3월22일-4월17일

 

文明(문명)의 異邦地帶(이방지대) 赤道(적도) 파푸아누기니를 가다.

 

靑銅器(청동기) 鐵器時代(철기시대) 없어,

                原住民(원주민) 총독을 不信任(불신임)한 예도.

                  石器(석기)시대와 現代(현대) 共存(공존)

 

 

 

 

殉敎精神(순교정신)으로 熱望(열망)

하며 스스로 교회를 창립하였던 先祖(선조)들의

뜨겁던 신앙은 마침내 이 땅에 교황님이 오시어 1백 3위

 성인을 탄생 시키는 創立(창립) 200주년을 맞아 한국 천주교희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죽어야만 했던 외국 선교사들의 희생을 우리는 잊을수 없다, 이 땅에

구원의 黎明(여명)은 1779년 기해년에 유명한 학자 權哲身(권철신)과

丁若銓(정약전)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한 講學會(강학회)를 開催(개최)

한다는 所聞(소문)을 듣고, 天眞菴(천진암) 走魚寺(주어사)에서

李檗(이벽) 聖祖(성조)의 天學(천학) 論證(논증)이 始發点

(시발점)이되어 1783년 3월에 李承薰(이승훈)선생이

北京(북경)으로 派遣(파견)되어 領洗

(영세)를 받아왔다.

 

宗敎的(종교적)인 거룩한 信仰

(신앙)의 차원으로 발전하는 찰나 1785년

 을사박해로 金範禹(김범우)선생이 慶南(경남) 密陽

(밀양) 丹場(단장)으로 귀양가는 박해속에서도 1794년 12월

에는 淸(청)나라 주문모 신부가 이 땅에 선교사로 파견 되였다.

1801년 4월에 순교를 당하는 수난속에서도 죽음을 초월한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의 선교사 들이 이 땅에 복음을 전파 하다가 앵베르라

우렌시오(범)주교와 모방(나)신부, �X스당(정)신부, 등은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 하였고, 1866년 3월 7일에는 베르뇌 시메온 張(장)주교와

 브레트니 메르유스또마리아(Breteniere) 白(백) 신부,   도리 헨리꼬(Dorie)

金(김)신부, 볼레루이(Beaulieu) 徐(서)신부 등이 순교 하였고, 3월 11일에는

푸르티에(Pourthie) 申(신) 신부와 프티니콜라(Petinicolas) 朴(박)신부가,

 또 3월 30일 에는 다블뤼 안또니오 안주교와 위앵마르띠노 閔(민)

신부와 오매트르베드로(Aumaitre) 吳(오)신부 가 충청도

 보령 갈메못에서 각각 순교 하였다.

 

 

 

 

이 승훈(베드로:1756년생-1801년 참수)

북경에서 영세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방문하고 격려하며, 이 나라 의

복음을 전파에 힘쓰다가 피를 흘리며, 사라져간 후에도 외국의 많은

 선교 사제들이 계속해서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령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하지 않을수 없다. 그들은 일제

 치하에서도 6,25사변의 공산치하에서도 무수한 수난을 겪으면서

 순교의 정신으로 끊임없이 전교활동을 했다.

 

현재도 우리나라에는 메리놀 외방전교회와

성 골롬바노회 등등.. 250여명의 선교사제들이 국경을

 초월하여 강원도,     산골에서 혹은 각 교구의 시골 벽촌에서

선교사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 실례로 성 골롬바노회에서는

100여명의 선교사제와 연간 30만불의 전교비로 지원 하고 있다. 筆者

(필자)가 호주 시드니 골롬바노 대학에서 만나본 만겐 케빈(Kevin,

Mangan) 신부는 1943년 11월에  한국에 와서 지금의  수원교구

 송정리 성당의   초대 신부로  활동하다가 6,25를 당하여 부산

으로 피난까지 하며, 40년간이나 이 땅에서 전교 하시다가

 지난 1982년에 은퇴하여 성골롬바노 대학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그 동안의 한국 사정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주문모(야고보:

1751년 생-1801년 참수)신부의 전교활동 또한 시드니

한인 천주교회를 사목하는 골롬바노 대학 총무신부님이신

황(Francis Ferrie)신부는 우리나라 춘천교구에서 24년간이나

전교 하시다가 가신분인데 시드니 한인교회 한국 僑胞(교포) 신자들의

 조그마한 어려움도 너무나 헌신적으로 도와주셔서 올해 한국에 파견하실

黃(황)신부와의 이별을 벌써부터 아쉬워 했다. 地上(지상)의 天國

(천국)이라고 불리우는 나라 호주의 [시드니]의 젊은 청년이

 무엇이 아쉬어 선교사로 투신하여 한국의 시골 산골에서

 일생을 바쳐야만 하는가? 그것은 하느님

만이 아실 일이다.

 

 

 

 

교사는 자기 생명을 그 나라

 사람들과 나누는데 있다고 흔히 말하는 것을

실감나게 한다.   그러나 파푸아뉴기니는 우리나라

초기 교회사 처럼 迫害(박해)라던가 순교같은 위험은 없다.  

원주민들의 모습 다만 인류학자들의 관심지역이듯이 청동기,

鐵器時代(철기시대)가 없이 石器(석기)와 現代(현대)가

共存(공존)하고 있어 풍습 사상등의 갈등

 때문에 애를 먹는다

 

 

 

 

 

어떻게 깨우치고 融和(융화)시켜

 주느냐가 문제다. 마을과 마을을 찾아 밀림속을

 헤매는 일쯤이야 고생이라고 할수 없다고, 신부들은

 말한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自生(자생)하고, 우리 스스로

모셔왔던 주문모 신부(청나라)와 프랑스 신부들이 致命(치명)까지

하며, 전교했던 것을 거울 삼아 예수님의 말씀데로 [섬기러 왔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선교에 임하고 있다. 1975년 호주에서

독립하여 영연방국의 나라가 된 이 나라 원주민 총독을

불신임(80년)하기도 했던 민주적인 현상은

그들의 생활속에서 나타난다.

 

總督(총독)이 정글 마을을 찾아가서

우리는 獨立(독립)했다고 신나게 演說(연설)

끝내고, 자리에 앉으려니까 이미 마을 사람들이

 자리를 다 차지해 神父(신부)님이 자리를 양보해준

예가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것이 民主的

(민주적)이라고는 할수 없지만......

 

 

 

 

 <파푸아뉴기니 기행문 6편>

 

1984년 3월 22일-4월17일

 

文明(문명)의 異邦地帶(이방지대)

 赤道(적도) 파푸아 뉴기니를 가다.

 

아직도 成人式(성인식)때 코 뚫어,

 敎友(교우)들에게 팬티 보급.

        마른산에 불놓아 멧돼지 사냥.

             감옥 수리하려 休暇(휴가)도.

 

 

 농사를 짓지않고, 자연에서 얻는

[암] [따루] [바나나] [망고] [야자수] [

고구마] [토란] 같은 구근채류나 열매로써 식생활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생활한다. 그러나 이곳에도 감옥이

있다. 감옥을 위생 점검한 서구 교육을 받은 관리가 위생 시설이

 미비 하다고 호령하니까 ! 교도소장이 죄수 모두를 휴가를 보냈단다.

감옥을 수리 하려면 3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휴가 나온 젊은

 죄수가 고향으로 돌아와 불평이 대단했다. 감옥에 있을때는 영화도

 보고 축구도 배웠는데 정글에 있으니까 지루하기 짝이 없다

면서 휴가가 끝나기를 바라던 이야기는 文明人

(문명인)들이 상상 하지 못할 일이다.

 

 

 

 

 

1년중에 6개월은 비가 쏟아지고,

6개월은 구름마저 보기 어려운 [우기]와

[건기]로 나눈다. 비가 안 올때면 풀이 마른 산에

불를 질러 놓고, 뛰쳐나오는 멧돼지를 활과 창으로 잡아

 먹는다. 불똥이 남아 있는 땅 바닥을 맨발로 뛰어 다니는 

용감한 사람들이다. 이제 도회지의 文明(문명)을 받은 사람들은

 여름용 스리퍼를 신고 다니고, 옷은 입는다기 보다 걸치고

다니고, 여자들은 브레지어만 걸친 진기한

 모습을 흔히 볼수 있다.

 

 

 

 

시계를 차고 다니는 도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조금만 정글로 들어가면 문명의

혜택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아직도 성인식으로

코뚜레를 하여 돼지뿔이나 나무가지를 코에 매달고 다니는

 사람은 흔히 볼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매우 아끼는 장신구중의 하나다.

 어느 선교사가 정글 공소에 미사를 드리러 갔는데, 제대 아래의 어른 교우

들은 거의 알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풀잎으로 아랫도리를 가렸는데, 미사를

 도와 주는 복사 아이들은 고추를 내 놓고, 털래털래 제대옆을 왔다갔다 하여

 고추만은 가리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부님이 [가서 뭣을 걸치고

오너라!]고 점잖게 타일렀더니, 우르르밖으로 나가 풀잎으로

 아랫도리를 가리고 달려 왔다는 이야기는

있었던 사실 이야기다.

 

 

 

 

어떤 주교님께서는 정글공소 성당을

 사목 방문할 때 발가벗은 원주민교우들에게 옷을

입히려고 궁리를 하다가 선물로 팬티를 사가지고, 한사람,

 한사람 교우들을 불러서 나누어주고, 미사를 드린후 강론을 마치고,

 이제 이들도 문명인으로 만들었다는 기분으로 교구청으로 돌아갈 비행기에

 올라 비행기가 [붕!]하고 하늘로 솟아오르자 원주민 교우들은 입었던 [팬티]를

모두 벗어들고, [주교님 안녕!]하고 이별의 하얀 손수건 처럼 흔들어 대더라는

 웃지못할 이야기도 있다. 옷을 입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들이 본 문명인들에게도

 웃음꺼리가 많을 것이다.

 

 

 

 

 문명인이 세수하는 모습도, 그들에겐

이야기 꺼리가 된다. 서로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던 사람들이 만났으니 서로 흉볼만한 것들이 많다. 그들이

문명인을 어떻게 흉보는지 알수 없다. 그들의 말을 다 알아 들을수가

없고, 또 알려 주지도 않는다. 宗敎(종교)는 國境(국경)이 없어도 사람은

 國境(국경)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김진형 신부님이 전교하는 [브라만]지역은

[분디]부족과 [타우야]부족이 이웃을 형성하고 있는데 [타우야]부족에서는

 종교의식이랄까 전통풍속에 따라 父母(부모)나 兄弟(형제)가 죽으면

 나름데로 의식을 가진후, 시체의 머리 부분이나 골을 먹음으로

 해서 그분들의 삶과 精神(정신:얼)을 이어 받는다는

풍속이 아직까지 행하여지고 있다.

 

 

 

 

특히 [분디]부족에서는 아직 까지도

 새끼 돼지에 젖을 먹이는 여인들의 모습을 볼수

있다. 그들은 돼지를 강아지 키우듯이 놓아 키운다.

원두막 같은 숙소에 좀 쉬고 싶어 올라 갔더니, 닭도 개도

돼지도 사람 옆에 뒤섞여 낮잠을 잔다. 이곳 사람들은 男女老少(

남녀노소) 모두가 항상 긴칼을 어깨에 메고 다니며, 활과 창

은 언제나 휴대하고 있어 무서울 지경이다.

 

 정글속엔 수풀이 우거져 있기 때문에

 칼을 갖고 앞을 가리는 무성한 풀숲을 혜쳐가면서

 사냥이나 열매를 따기위한 작업을 한다. 날씨가 더워서 오래

저장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루하루 나름데로 부지런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수 밖에 없다. 배가 고파 하는 원주민들이 더러 보였다. 그

들도 밥만은 참으로 좋아했고, 잘 먹었다. 정글속엔 변화가 없다.

먹고 자는 것은 물론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정글속의 삶이

 문명인들이 볼 때 奧地(오지:hinterland)이기도 하고,

樂園(낙원: a paradise) 같기도 하다.

 

 

 

 

 

 이곳 선교사들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장사를 하라 !]는 이야기는 통용되고, 있는 사실

이라 참으로 어떤 모습의 가계를 갖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마침 [기리]본당에서 볼수 있었다. 성당옆에 2평정도의 오두막

 같은 양철 지붕에 구멍가계 상점에는 원주민이 관리를 하고, 지원은

 신부님이 하며,   이곳에서 나오는 이익금으로 사목에 보태 쓰지만 

큰돈은 상상하기 힘든다고 한다.  곳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신부님이 갖고 있는 자동차로 교구청에 나가 비스켓이나

잡화를 사다가 지원해 주지 못하는 졍제적인

도움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파푸아뉴기 기행문 7편

 

1984년 3월 22일-4월17일

 

文明(문명)의 異邦地帶(이방지대) 赤道(적도) 파푸아뉴기니를 가다.

 

 

지금도 戰爭殘骸(전쟁잔해)남아

                    징挺身隊(정신대) 끌려간 격전지.

                            初期(초기) 宣敎師(선교사) 처참상도

 

 

 

 

 

신부님들은 때로는 그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하는 商人(상인)으로, 우편배달부로, 때로는

교통수단이 없는 그들에게 자동차로 실어다 주는 역할도

한다. 때로는 국민학교의 교리지도를 하면서 그들의 꿈과 이상을

심어주고 미래 의 파푸아뉴기니의 주인공들에게 더할 수 없는 밑거름이

 된다. 어느 부족이 상을 당해도, 병자가 발생해도, 신부님에게 지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부님의 숙소 앞엔 구원과 자문을 요청하러 온다.

어린이가 아파도, 어른이 정글속에서 사냥하다가 다쳐도, 모기나

독충에 물려서 피부병이 생겼을때는 신부님께 의례히

 몸을 맡기고, 돌보아 주기를 바란다.

 

 

 

 

그들에겐 아무런 문화적 경제적,

능력이 없다. 밤이면 어둠을 밝혀줄 석유까지도,

사냥용 총알도 부탁한다. 파푸아뉴기니는 19개의 道

(도:Province)로 나누어져 있는데, 한국의 선교사들이 전교하는

곳은 赤道(적도)에 가까운 마당교구(Madang province)에서 활동한다.

파푸아뉴기니의 전체 교구 수는 15개이며, 그 나라 주교가 4분이고, 나머지

11개 교구장은 他國(타국)의 주교들이 전교한다. 대체적으로 전체 인구의 90%가

기독교 신자라 하고, 그 중에 50%가 천주교 신자라고 한다. 그러나 정글속의

원주민들은 대부분 선교사에 따라서 信仰(신앙)의 차이점도 있었다.

자기들이 존경할수 없는 선교사들에게는 미사참예를 거부 하는

모습도 볼수 있었다. 마당 교구에는 37명의 선교 신부중에

파푸아뉴기니의 신부는 세사람 뿐이다.

 

 

 필자가 타우야 마을에 들어가자 ~ 환영 나온 원주민들의 모습

 

 

세신부 중에 “카스팰 디돌” 신부와

 “토비야스 마란젠” 신부는 본회의 총재 김남수

 주교님의 초청으로 한국 천주교 2백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었다. [토비야스 마란젠]신부는 이 나라 유일의 軍宗

(군종)신부로써 계급은 대위인데, 어찌나 겸손한지 陸軍(육군)대위

라는 것이 부끄럽다고 한국외방 선교 후원회 회원들에게 軍人

(군인) 大尉(대위)라는 이야기는 빼 달라고 부탁 했다.

 

 

남산에서 필자와 두 신부님 좌측이 “카스팰 디돌” 신부,

우측이 [토비야스 마란젠]신부

 

 

후원회 회장 최마리 여사가 호주 [시드니] 대주님과 [시드니]

황 페리 신부님과 파푸아 뉴기니 [토비야스]신부님과 카스팰]신부님 에게

천진암 성지에서 한국 고유 민속품을 전달 하시는 장면

 

 

그곳 [브라만] 본당 [카스팰 디돌] 神父

(신부)는 韓國(한국)의 平信徒(평신도)들의 뜨거운

信仰心(신앙심)과 열심에 크게 감동하였다고 후원회 회원들

과의 만남의 장소에서 말해 주었다. 이때 호주[시드니] 대주교님

께서도 200주년 記念(기념) 행사에 참석하셨는데, 筆者(필자)가

 [시드니] 대주교님과 호주 교포사목 담당 신부님이신

 황페리 신부님을 모시고, 성지 순례를 하였다.

 

이날 파푸아뉴기니 두 신부님과

후원회 회장님이신 최마리(마리아: 기미년

33인 독립운동가 이갑성옹의 부인)女史(여사)도 같이

 모시고, 호주 [시드니] 교포신자 50여명과 함께 南漢山城

(남한산성) 聖地(성지)와 天眞菴(천진암)

聖地(성지)등을 안내 하였다.

 

 

 

 

 

 이때 [브라만] 본당 [카스팰 디돌] 신부님은

聖地(성지)를 巡禮(순례)하면서, 그중에서도 韓國天主敎

(한국천주교) 發祥地(발상지) 天眞菴(천진암)을 돌아보고 한국의

 平信徒(평신도)들은 스스로 신앙을 갖고 왔기 때문에 歷史(역사)가

 깊지 않는 파푸아뉴기니에 4분의 司祭(사제)를 보내줄수 있었

다고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면서 한국의 宣敎師(선교사)

들과 기쁨 마음으로 같이 일하겠다고 했다.

 

 

 

 

 

특히 明洞(명동) 聖堂(성당)과 북악

스카이웨이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아름다운 밤

경치와 곳곳에 敎會(교회)의 빨간 十字架(십자가)가

밤 하늘 市街地(시가지)를 찬란하게 비추고 있는 많은 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저 모두가 "천주교회"냐고 묻기도 했다.

후원회 회장 최마리 여사가 호주 [시드니] 대주님과 [시드니] 황 페리

 신부님과 파푸아 뉴기니 [토비야스]신부님과 카스팰]신부님 에게

천진암 성지에서 한국 고유 민속품을 전달 하시는 장면 이러한

 한국의 아름다운 경치와 절두산 성지를 보고 느낀 것을

모두 故國(고국)에 가서 자랑 하겠다고 했다.

 

거진 密林(밀림)만이 있는 자연속에서

 생활하셨던 신부님의 입에서는 탄성이 계속 쏟아졌다.

모두가 신기 했으니.. 이때 聖地(성지) 순례의 차량 문제는 평소에

친분이 두텁던 한남동 이웃에 사시면서 같은 敎友(교우)이시던 前(전) 憲兵監

(헌병감)으로 전역하시고 청와대 民政(민정) 首席秘書官(수석비서관)을 지내신

김시진 將軍(장군)과 열심한 그 夫人(부인)이신 천 발바라 女史(여사)께서

전용 자가용으로 후원해 주셨다. 또 두 신부님을 民泊(민박)으로

 漢南洞(한남동) 김시진 將軍(장군)의 宿所(숙소)로 초대까지

하여 성심껏 대접해 주었으며, 그 다음날 신라

호텔에 유숙시켜 드릴수 있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오시던 날은

 두 신부님을 영접하러 空港(공항)에 나가서,

미리 준비한 새 양복을 갈아 입혀서 外邦宣敎(외방선교)

後援會(후원회) 會員(회원)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파푸아 뉴기니

에서 활동하는 외국 선교사들과 원주민들은 한국에서 파견된 네신부님들을

 [꼬레아 퍼스트미숀나리:첫선교사]라고 부른다. 筆者(필자)는 많은 사람들의 그곳

 원주민과의 만남에서 모두에게 손을 잡고 악수해 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해주므로해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야금 연주로 열창한 김 시진 장군의 따님과

 황 요안나, 필자, 엄 익채 박사와 김 시진 장군과 부인 천 발바라 여사

그중에 어떤 원주민은 노우스꼬에아(North Korea)p서

 왔느냐?고 묻기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가야금 연주로 열창한 김 시진 장군의 따님과 황 요안나, 필자

 

 

지식층에 있는 원주민들은 韓國(한국)의

 南(남)과 北(북)의 대치속의 현실을 아는 것 같기도

 했다. 마당 교구청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교구청의 벽에 걸려있는 초기 선교사들의 처참한 모습이였다.

원주민들의 창, 칼아래에 죽어가는 선교사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을

위해 祈禱(기도)하지 않을수 없었다. 특히 이곳 [마당]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라바울]섬은 2차 世界(세계) 대전때 일본군의 최대전방기지로

陸軍(육군)과 海軍(해군)의 將兵(장병)이 17만명이나 주둔해 있었고,

네 개의 비행장과 약 300대의 비행기가 있었으며 1942년 1월 22일,

그 날은 우리나라에서 징용에 끌려간 수많은 동포와 꽃다운

나이에 挺身隊(정신대)에 끌려가 죽어간 수많은 同胞

(동포)들의 恨(한)이 서려 있는곳 이기도 하다.

 

 

 푸아 뉴기니의 위치와 라바울섬의 위치

 

 

그래서 꼭 방문하여 한많은 同胞(동포)들이 戰爭

(전쟁)의 제물로 사라져간 억울한 靈魂(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한 鎭魂祭(진혼제: repose of souls)로 신부님을 모시고가

 연미사라도 드리고 싶었던 심정이였으나 시간상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지금도 후회 스럽다. 파푸아뉴기니의 首都(수도) [포오트모레스비]

에서 [마당]까지의 거리는 494Km 이고, [포오트모레스비] 首都(수도)에서

[라바울] 까지는 798Km이며 [마당]에서 [라바울]까지의 비행기 삯은

왕복 300달러이다. 아직까지 [파푸아뉴기니] 곳곳에서는 2차 大戰

(대전)때의 戰爭(전쟁)의 殘骸(잔해)가 남아 있어 그때에

 억울하게 죽어간 同胞(동포)들의 한많은

넋을 기리지 않을수 없었다.

 

 

정예(요안나). 필자(양 방수). 엄 익채 박사와 김 시진 장군과 부인 천 발바라 여사

 

 

가톨릭 韓國外邦宣敎後援會

(한국외방선교후원회) 顧問團(고문단)

 總務部長(총무부장) 兼(겸)弘報部長

(홍보부장) 梁芳秀(양방수)

 바오로(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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