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방송인협회

양방수님 파푸아 뉴기니 체험 기행문 (1984년) 한국외방선교회

이장춘 2015. 1. 25. 06:10

 

 

이 글은 미주방송인협회  양방수 총무국장님이

1984년 3월 천주교 韓國外邦宣敎會(한국외방선교회)

홍보부장으로 파푸아 뉴기니 (papua new guinea) 오지를 가, 

선교활동을 하면서 체험한 현장 기록 두번째 글입니다. 양방수님은

 파푸아 뉴기니아 여행기 10편을 2014년 2월에 보내주셨는데  그 중

(1)편은 그때 올렸고 (2), (3)편을 여기에 함께 올립니다.  음향은

70분 중에서 1편에 앞부분 10분을 올렸고 그 뒤를 이어 오늘

 15분을 올립니다. 양방수님이 뉴기니아에 가 이 글을

쓰게 된 배경등은 (1)편에 있어서 생략합니다.  

 

 

(1)편 글보기 영문자 클릭

http://blog.daum.net/jc21th/17782045

 

 

양방수님 파푸아 뉴기니 체험 기행문 (1984년) 한국외방선교회

 

 

양방수 파푸아뉴기니 기행문 2편

 

1984년 3월 22일-4월 17일

 

 文明(문명)의 異邦地帶(이방지대)

赤道(적도) 파푸아뉴기니를 가다.

 

文化施設(문화시설)없고 原始(원시)와 共存(공존)

 7백가지 土俗語(토속어) 혼용

 

마을 酋長(추장)의 승낙얻어 敎理指導(교리지도)

 50여 公所(공소)돌면서 미사

 

공룡의 허리가 잘리어 東西(동서)로

 나뉜 것 같은 西部(서부)는 인도네시아 領(영)

이고, 東部(동부)는 1975년에 호주로부터 독립한

新生國家(신생국가)다. 종족은 포루투갈의 전성기인 1492년

유럽과 아프리카가 점령되던 15-16세기경에 포루투갈의 航海士

(항해사)가 발견, 포루투갈 사람들에 의해 아프리카 인디아 사람

들이 동인도네시아를 거쳐 데리고 간 멜라네시아 종족으로,

남쪽 파푸아 사람은 검은 꼽슬머리 인데, 북쪽 뉴기니

 사람들은 노란꼽슬 머리로 한눈에 알수 있다.

 

  

 

 

 서부땅은 1848년부터 인도네시아

 領(영)인데, 東部(동부)는 南(남)과 北(북)으

로 나뉘어 남쪽 파푸아는 1883년부터 1906년까지

 英國(영국) 통치하에서 호주로 넘겨졌다. 북 뉴기니는

1883년부터 1914년까지 獨逸(독일) 통치하에서 호주로

 통치권을 넘긴 역사와 소용돌이를 겪었다. 선교사들의 진출이

빨라 1983년에는 천주교 100주년의 영광을 맞게된 나라이다.

 면적은 우리나라 약 2,5배 정도인데, 인구는 약 300만에

불과하며, 700개의 土俗語(토속어)가 있고, 부족마다

언어가 제각기 달라 선교사들의 전교는

정말 힘든 現實(현실)이다.

 

 

 

  

言語(언어)는 영어에서 파생된

[피진어: pidgin]로 共用(공용)되며 도시의

 學生(학생)들에게는 英語(영어)를 가르치고 있어 英語

(영어) 實力(실력)은 놀라울 정도 였다. [싸이돌]의 草原(초원)

으로 된 활주로를 따라 착륙(1984년 3월 26일, 월요일)한 비행장엔

관제탑도 없었고, 몇몇 원주민들이 비행기의 모습과 피부가 다른

異國(이국) 사람의 만남이 신기한 듯 男女老少(남녀노소)

모두가 몰려와 일일이 악수를 해주고, 반가히

대해 주었더니 참으로 기뻐했다.

 

 

  

 

 이곳 郡(군) 소재지 [싸이돌] 주민들은

 선교사들에 의해 대부분 옷을 걸치는 정도로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초라한 발전소와 원주민을

위한 여관도 있었다. 여관이라야 시멘트 바닥, 시설이라곤 없고,

소낙비를 피해 몰려온 원주민들은 방 바닥 같이 사용했다. 수은주는

섭씨 40도를 웃돌아, 소낙비가 쏟아지면 짙은 안개 모양의 수증기가

더운 공기로 변하여 김이 무럭 무럭 솟아 올라 한증막 같은

 더위로 원주민들의 살갗을 검게 태워

타 버린 것 같았다.

 

 

 

  

신부님이 거처 하시는 숙소도 비를

 피할수 있는 함석 지붕에 침대 하나, 모기장 외엔

별 다른게 없는 초라한 창고 같은 곳이였다. 신부님은

[싸이돌]의 팡팡 국민학교에서 교리공부를 담당하고 있다하여

가보았더니 교리 시간에도 묵주와 상본을 주어 가며 교리를 가르쳤다.

1950년경에 우리나라 6,25 직후 시골 公所(공소)에서 밀가루 배급을 주며

 전교하던 백인 선교사 들을 연상케 했다. 국립병원이 있다고 해서

보았더니, 병원 입구에는 간판조차 없고, 환자를 치료하는 公醫

(공의)도 없었다. 시설이라고는 함석 지붕과 시멘트 바닥에

원시적인 딱딱한 나무침대 하나뿐이였다.

 

 

 

 

 신부님은 교우 환자들에게 聖事(성사)를

준다든가 안수기도를 해 준다든가 敎理(교리)를

 말해 주는 것 외 아무것도 도울수가 없었다. ~ 시사겔 공소

성당 내부 ~ 성체를 모시는 원주민과 김 동기 신부님 ~ 싸이돌성당

 공소 시사겔 성당의 모습 [싸이돌]의 공소는 700여곳이나 되지만

 신부님이 직접 미사를 드리고 다니는 곳은 현재 50여개 마을에

불과하다며 원주민들의 靈魂救靈(영혼구령)을 위해서

 신부님은 한숨 지우며 안타까워 하셨다.

 

마을 추장의 승낙을 겨우 얻게 되면

 교리지도와 매일 아침저녁 祈禱文(기도문)을

암기 시키고, 영세를 줄때는 일주일 동안 같이 宿食

(숙식) 하면서 [촬고:문답]를 거쳐 2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야 영세를 주었다. 신부님은 獨逸(독일) 신부님에게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수은주가 40도를 오르내리는

 더운 날씨에도 헬멧을 꼭 써야만 했다.

 

 

 

 

교구청에서 한달에 6만원 정도의

 전교비를 받아 공소 방문시엔 차량 기름값과

먹고 사는데도 돈이 필요했다. 원주민 전교 회장들

마저도 3만원 정도의 월급을 주어야만 신부님을 도와

전교 하였고, 50여곳의 공소를 유지 하는데는 최소한 원주민

 전교 회장들을 교육 시켜 60만원의 유지비가 든다고 했다. 고구마를

굽는 모습 현재 外邦(외방) 전교회에서 지원 하지 못하는 실정이라

신부님이 정글을 누비며 원주민들에게 얻어 먹어야 했고, 빠나나

하나를 얻어 먹어도 무엇인가 대신 주어야 하기 때문에 난처한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나 신부님이 가는곳 마다

 男女老少(남녀노소) 모두가 반가움으로 맞아주어

 정글속은 정겨움이 가득했다.

 

 

 

 

 대낮인데도 정글속은 어둡고, 컴컴하며,

 알 수 없는 짐승의 발자국이 간혹 보일뿐. 숲이

우거져 한 발자국도 들어 갈수가 없었다. 아름드리 나무가

길목에 쓰려져 있을때는 자동차도 산속에 두고 목적지 까지

 걸어가야만  했을때는 원주민들의   습격이라도  받을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에 이름 모를 새 소리와 풀 벌레 소리가 적막을

 깨고 풀내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가도가도 끝없는 정글을

누비며 저녁 무렵에야 50여명을 영세 시켰다는 [갈라렌]

 마을에 도착하여 집도 없는 정글속에서 2차대전때

일본군이 버린 고철로 담을친 움막속....

 

生(생)과 死(사)의 岐路(기로)에서

신음하는 환자에게 종부성사를 주고, 다음

傳敎地(전교지)로 길을 제촉하였다.   

 


<양방수> 파푸아뉴기니 기행문 (3편)

 

 1984년 3월 22일-4월17일

 

 

文明(문명)의 異邦地帶(이방지대)

赤道(적도) 파푸아뉴기니를 가다

 

 북소리에 맞추어 聖歌(성가) 불러,

풀벌레 소리에 寂寞感(적막감) 아이들

그물망태에 담아 잠재워.

카누 타고 傳敎(전교)길 떠나

 

 

 

 

김 동기 신부님의 전교 생활은

다름 아닌 그들을 내 兄弟(형제) 父母(부모)

같이 따뜻하게 사랑해 주는 인간적인 연민의 情(정)

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어쩌면 아주 뉴기니 사람이

되었구나 할 정도로 변하고 있었다. 특히 [갈라덴]이란 마을이 불타

 버려 외방 선교회 최재선 주교님과 회원들이 보내준 구호품인 (담요등)을

 눈으로 확인 했을때는 주는 교회의 기쁨을 맛 볼수 있었다. [반겔:Banger]이란

 마을을 수차 전교 방문했으나 추장에게 일곱차례 거절 당했다. 그러나 신부님도

이에 굴하지 않고, 설득에 나섰고, 드디어 추장은 주위 부족 마을 사람들에게

김 신부님의 人品(인품)을 수소문하여 본후에 傳敎(전교) 방문을 허락하여,

 이제는 70여명의 모든 住民(주민)들이 교리를 배워 영세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방문한(1984년 3월27일,화요일)

그날은 그 보답으로 산속의 야생 닭을 사냥하여

신부님께 선물을 주는 人情(인정)도 있어 무척 감회가

깊었다. 원두막 같은 집안을 둘러 보았으나 옷장이나 살림

도구가 별다른게 없었고, 구부러진 냄비조각과 주전자등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가재 도구가 전 재산

이었다.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원주민들의

가벼운 상처는 신부님이 약을 구하여 손수 치료해

주지 으면 안될 딱한 실정이었다.

 

한부족의 인원수는 대개 30명에서

70명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마을 공소마다 돌아

 다니면서 전교 하는데는 가장 필요한 것이 물과 양식이며

식수가 없는 이곳은 빗물을 받아 저장해 두었다가 마셔야만 했다.

해발 2,000미터의 고산지대 [텝텝]공소를 방문하는데는 석달이

 걸린다고 한다.   날씨가 더워 먹을 양식을 짊어지고 다닐수도

없었거니와 설사 있더라도 원주민들과의 거리감을 없애기 

위해서는 同苦同樂(동고동락)하여야만 했다.

 

바나나를 하나 얻어 먹어도 대신 무엇인가

주어야 하기 때문에 난처한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계속되는 더위와 우거진 밀림속을 다녀야 하는 고충도 있지만

그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손수 미사 도구를 꾸리고 성구를 준비

하여 몇날 며칠을 다녀야 하는 인간적인 외로움은 더욱 견디기 힘든 

고통이였다. 곳곳에 야자수나 바나나가 열려있지만, 너무나 높으게

달려 있어 원주민들의 도움 없이는 따 먹을수도 없었고,

그나마 숲속에는 한 발자욱도 들어 갈수가 없었다.

  

 

 

찌는듯한 더위를 피해 필자

 

 

 

공소 마을을 들어가는 김 동기 신부님 

 

 

 

환영 나온 "타우야" 원주민들 

 

미사를 마치고 신자들과 필자

 

 

 우기철인데도, 찌는듯한 더위와

 하루 한차례씩 소낙비가 폭우를 쏟고,

지나갔고. 풀내음이 진동하는 정글을 지나

고산지대로 올라 가면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하여 밤에는 털옷을 입어야만 했다.

  

또 이름 모를 풀 벌레와 새 소리가

정글의 적막을 깨뜨릴뿐 말벗이 있을수 없었다.

인간적인 향수와 고독이 밀려 올때마다 신부님은 오직

성모님께 전구하며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영혼을 구령하기 위해

주님이 가신길을 따를뿐이라며, 마음의 성전을 이룰수 있도록 하느님께

 전적으로 맡끼고, 자기일에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끊임없이 기도 하였다.

 아울러 자기의 부족한 점을 기도로써 극복할수 있도록 노력하며 아직까지

자족하지 못한 외방선교회의 성장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랬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金(김) 신부님에게 누가 명령한것도 아니요,

오직 스스로 선교사로 투신한 거룩하고 갸륵한 생활 그것은

바로 殉敎精神(순교정신)이라고 생각 되었다.

 

 

 

 

[시사겔 Sisagel 1984년 3월28일 수요일]

이라는 마을에 도착하자 종소리가 정글을 울리더니

한 사람 두 사람 산속에서 모여왔다. 갓난아이를 그물망에

넣어 머리에 걸치고 다니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했다. 그들은

 신부님이 갖다준 옷을 빨래 한번 한하고 떨어져도 기워서 입지

 않아 땀냄새가 지독했지만 신부님은 그 땀냄새 마저도 초월하고

정글속에서 同居同樂(동거동락)했다. 그들도 신부님께 무슨죄를

고백하는지 말없는 질서속에서 聖事(성사)를 보았는데

모습은 매우 숙연했다. 초막같은 공소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북소리에 맞추어 성가를 불렀다.

 

 

 

타우야 원주민과 필자

 

 

 그물망태에 매달아 아기를 잠 재우는 신기한 모습

 

 

파리와 모기떼는 대낮에도 극성이었지만

 아이들은 그물망에 넣어 나무나 추녀에 매달아

잠 재우는 지혜도 있었다. [야이마스 Yaimas 1984년

3월29일 수요일 방문]과 [굼비Gumbi 1984년 3월 29일 방문]

 공소 방문은 지면상 소개를 할 수가 없다. 筆者(필자)가 어떤 정글

공소를 방문했을때인데 원두막 같은 집안에 두 젊은 청년이 키타(guitar)를

 가지고 있어 키타로 노래 한곡조를 들려 줄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식사도

 식사 시간에 하듯이, 노래도 아무때나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사실

筆者(필자)는 記錄映畵(기록영화)를 촬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에

 담을 배경 음악(back music)이 필요 해서 부탁 했는데 거절했다.

 

그래서 筆者(필자)는 내가 우리나라 노래를 한곡조 

불러 줄수 있으니 대신 해 줄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러자고

해서 나는 평소에 갈고 ?은 키타 솜씨로 <울며혜진 부산항>의 전주곡등

<가거라 삼팔선>을 실제로 노래를 불렀더니, 그 보답으로 키타(guitar)반주에

두 청년이 신나게 노래를 불러 주어 映畵(영화)의 배경음악(back music)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날(1984년 3월 29일 목요일) 김동기 신부님이 마라리아 病(병)

 걸려 死境(사경: gates of death)에 처했을 때 도와 주신 루터교 신자(원주민)

공의 간호원을 찾아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사이돌]을 떠났다. 김진형 신부님이

 전교하는 [브라만]은 인구 천명에 신자 600여명으로 특히 이 나라 유일의 

신부인 [카스팔디돌] 이곳 본당 신부님은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행사에 김남수 총재 주교님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신바 있다.

 

 

 

타우야 마을 원주민들과 필자

 

 

시사겔 공소<원주민들의 집>들

  

 

 이날(1984년 3월 29일 목요일)

김동기 신부님이 마라리아 病(병)에 걸려

 死境(사경: gates of death)에 처했을 때 도와 주신

 루터교 신자(원주민) 공의 간호원을 ?아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사이돌]을 떠났다. 김진형 신부님이 전교하는 [브라만]은 인구 천명에

 신자 600 여명으로  특히 이 나라 유일의 신부인 [카스팔디돌]  이곳 본당

신부님은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행사에 김남수 총재 주교님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신바 있다. 이날(1984년 3월 30일 금요일)은 이곳 브라만 국민학교에서

 전교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歡迎式(환영식)을 해 주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유인즉 校服(교복)은 學校(학교)

에서만 입고 공부하며, 집으로 갈때는 교복을 벗어

학교에 두고 간다고 했다.

 

이날 오후 이곳 헤드수도원(Hearts Brother)을

 방문하였고, 이튿날 (3월 31일 토요일)은 이곳 브라만

 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같이 미사를 드리고, 학교 도서실과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곳 [라무강] 주변은 길도

없고, 자동차도 갈 수 없는 정글이라  [카누]를 젖는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전교길에 나서기도 했다.

 

 

가톨릭 韓國外邦宣敎後援會

(한국외방선교후원회) 顧問團(고문단)

總務部長(총무부장) 兼(겸) 弘報部長(홍보부장)

 梁芳秀(양방수) 바오로(Paul)

 

단기4342년 서기2009년 대한민국 건국 62주년

 己丑年(기축년) 8월 10일Mon, 미국 South Baylo University에서

 병부공(兵部公) 30세손(世孫) 양방수(梁芳秀).

 

 

 

윤후현(팔방미남)선생님 글

 

 

파푸아 뉴기니, 기행문을 쓰신 양방수님!

대단 하십니다. 이 글을 보니 아프리카 케냐,에서

선교 활동을 하시다가, 운명을 달리하신 "울지마 톤스!'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님!이 생각 납니다. 인류의 공존과 기독교

 정신의 합체를 위하여 애쓰신 선인들의 노고에 새삼 고개가

 숙여집니다. 미주 방송인 협회 양방수 총무국장님! 수고가

너무 많으셨습니다. 미래의 체험 앞에 한발 더 다가가신,
용기와 신념앞에 고개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소식 감사합니다.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사장님!...

 

 

양방수(미주방송인협회 총무국장) 선생님 글

 

 

절박했던 우리시대의 삶이 소리없이 

잊혀지고 사라지는 가운데 춘하추동방송의 열정

으로 흘러간 추억을 더듬고 되새기는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어 주시는 그 열정에 찬사를 올립니다. 아무나 할수없는

큰꿈을 남기시는 그 열정에 기도 합니다. 하느님 ! 건강 지켜 주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길 기도 합니다. 억조창생 후손들에게 길이길이

밝혀줄 역사의 산 증인이 되어 거룩하고 아름답게 남아 천년 세월이 흘러

가더래도 모진 풍상이 휘몰아 치더라도 춘하추동방송의 방송이 메아리

치며 우리들의 역사를 증언하며 변함없이 지키며 소리없이
말하여라 ! 해와 달과 목숨을 같이하며 변함없이
역사를 전하면서 역사를 지키어라 !        

 

미주 방송인협회 총무국장        
양 방수(Paul Bang Soo Yang)근찬

 

 

 

 

파푸아 뉴기니아 편 2(1).wma

 

파푸아 뉴기니아 편 2(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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