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단상

제 7회 항일 여성동지선열 추모식, 삼일(3.1) 여성동지회 창립 46주년

이장춘 2013. 11. 12. 22:11

 

 

 

삼일 여성동지회(회장 이화옥)가

주최하고 여성가족부와 국가보훈처, 광복회,

류관순열사기념 사업회가 후원한 3.1운동 94주년과

 삼일동지회 창립 제 46주년을 겸한 일곱번째로 맞는 항일여성

3.1여성 동지 선열 추모식이 11월 11일 11시부터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기념관에서 광복회, 백범 김구선생님 기념사업회 김신 이사장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단체와 박승춘 보훈처장을 대리한

서울 지방 보훈청장등 각계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제 7회 항일 여성동지 선열 추모식, 삼일(3.1) 여성동지회 창립 46주년

 

 

일제강점기 사회적 참여가 어려웠던

여성들이었지만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인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그련 분야를 알고도 싶었고 알리고도

싶어 그런 행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다른 일들을 뒤로하고 장을 잦아

취재하고 그 실황의 대강을 동영상으로 담아 10분으로 편집했습니다.  

기회되는데로 여성들의 독립운동에 관해서도 글을 써 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밑에 있는 동영상

 까지도 보아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선열 추념가

 

 

만주독립군 진영에서 1920년대 부터

 불러온 노래로 듣고 계시는 곡은 2013년 11월

10일 백범 기념관에서 열린 제7회 항일 여성 3.1여성

동지회 선열 추모식에서 김윤태님이 지휘하는

 삼일 여성동지회 합창단의 노래다.  

 

 

1절

 

 

아침해 고은 빛비쳐 이 강산 밝아도

국권잃고 울부짖던 선열누으셨네

빼앗긴 나라 찾고저 그 몸제물 되니

제단위에 황촉불꽃 정기떠오르네

 

 

2절

 

도처 청산 집을 살고 가진 고생하며

검산도수 돌진하던 선열누으셨네

겨레를 살리려고 그 생명 바쳤네

향노 안에 피는 향기 영기 솟으려네

 

 

3절

 

광복대업 이루려고 일생을 다하신

조국의 수호신 되어 선열 누으셨네

그힘으로 우리살고 그덕에 자손사네

청사에 빛난이름 천추에 정기되네

 

 

4절

 

나라위해 목숨 바친님이 그립고나

다시만나 볼 수없는 선열 누으셨네

우리 강토 자유얻고 겨레 살으리니

안심하사 천국에서 길이 쉬옵소서

 

 

 

위는 삼일 여성동지회 합창단 (지휘 김윤태)이고

아래는 참여자들이 삼일여성 동지회 노래를 함게 부르는 모습이다.

 

 

 

3. 1 여성 동지회가

 

 작사  황애덕

작곡  남원옥

노래 삼일여성 동지회

함창단괴 회원들

  

일편단심 조국위해 몸 바쳤던 우리동지

오늘 다시 모였구나 세월은 흘렀지만

삼일정신 변할소냐 애국일념- 변함없다.

이 마음과 마음바쳐 조국위해 살리로다'

 

기려하다 우리강산 세계만방 자랑한다.

천제기수 한민족은 세계발전 앞장선다.

삼일정신 변할소냐 애국일념- 변함없다.

이 마음과 마음바쳐 조국위해  살리로다'

 

 

 

 

 

시 낭송

 

 

여성의 힘이 나라를 세웠다

 

 

시인이자 삼일 여성 동지회

고문이기도 한, 류정숙님의 시를 

이지은님이 낭송함

 

나라가 힘을 잃어

일본의 야욕에 걸려 취청 할 때

우리의 여성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휘청거리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민족의 심장에 불을 지펴

대한의 얼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버려

독립만세를 부르고

계몽운동을 했다.

학교를 세우고

모두 일어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힘을 쏟았다.

유관순 같은 열사

남자현 같은 의사들의 나라사랑 정신은 온 국민에 퍼져

대한독랩을 외쳤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태어났고

6.25를 거치면서 잘사는 나라로

발전한 것은 우리 모두

여성의 힘에 의해서였다.

오-대한의 여성이여

힘을 모아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마음합쳐 통일을 이룩하자

 

 

애국 선열들의 영령 앞에서 시낭송하는 이지은님

 

 

 

대한민국 건국훈장, 포장, 대통령표창 여성선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몸 바치신

항일여성 선열과 대한민국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신 3․1여성동지 선열께 감사와

추모의 마음을 바칩니다.

 

 

 

대한민국장 송미령

 

대통령장    남자현

 

 

독    립   장  (10명)

 

권기옥 김마리아 김순애 박차정 방순희

안경신   오광심 유관순 이신애 이애라

 

 

애  국  장   (33명)

 

강혜원    곽낙원  권애라  김경희  김마리아

김알렉산드리아 김정숙 김효숙 노영재 동풍신

민영숙 박현숙 송영집 신순호 신정숙  신정완

 심영신 안영희 연미당 오항선 이선경   이소제

이의순 이혜수 조순옥 조신성 지복영   차경신

 최금봉 최선화 최정철 홍씨   황애시덕(애덕)

 

 

애  족  장  (104명)

 

강원신  강주룡   고수복  고수선  구순화   김두석

김락 김봉식  김숙경 김숙영   김성심  김순도 김씨

김씨  김영순 김옥선 김온순  김용복 김윤경 김정옥

 김종진 김치현 김필수 나은주 문재민 민옥금 박금녀

박신애 박승일 박애순 박옥련 박원경 박원희 박자선

박자혜 박재복 박치은 박현숙 백신영 백옥순 송정헌

신관빈 신의경 심계월 심영식 안애자 안정석 양진실

어윤희 오신도 오희영 유예도 유인경 윤선녀 윤천녀

 윤희순 이겸양 이국영 이병희 이석담 이성완 이순승

이인순 이정숙 이혜경 이혜련 이화숙 임봉선 임소녀

장경례 장경숙 장매성 장선희 장태화 전월순 정   영

정영순  정정화  정찬성  정현숙  조계림   조마리아

조애실 조용제 조화벽 주세죽 진신애       차미리사

 최갑순 최봉선 최서경 최수향 최순덕 최예근 최용신

 최은희 최이옥 최형록 최혜순 하란사 한영신 한영애

한이순 홍애시덕

 

 

건국포장 (26명)

 

고순례 공백순 김귀선 김금연 김옥련 김조이 김태복

김현경 남협협 문복금 문응순 박계남 박신원 박채희

부덕량 부춘화 신경애 신정균 양방매 엄기선 윤형숙

이광춘 이효정 이희경 전수산 탁명숙

 

 

대통령표창 (54명) 

 

곽희주 김공순 김귀남 김나열 김나현 김덕순  김독실

김반수 김성일 김신희 김안순 김애련 김옥실  김원경

김응수 김인애 김점순 김죽산 김향화 노순경  박복술

 박우말례 박음전 송수은 신분금 심순의 오정화 옥운경

왕경애 윤경열 윤악이 이금복 이남순 이명시  이벽도

이살눔 이소선 이아수 이옥진 이효덕 전창신  전흥순

 정막래 조옥희 조인애 조충성 주순이 주유금 채애요라

 최요한나 최정숙 하영자 함연춘 황보옥

 

 

3․ 1 여성동지 (102명)

 

곽선부    곽성실 김(한)명옥 김도훈 김복선 김복원

김복희    김성모(무) 김숙자 김승남 김신삼 김신의

김신채 김앨라 김영희 김옥한 김은덕 김임덕 김정진

김지춘 김철자 김해문 김현숙 김혜림 김훈도 남동순

 노숙경 노영자 문경옥 문선호 민경란 민영복 박경신

박도현 박순덕 박순천 박애순 박자회 석유순 석창교

석희옥 성혜자 신애라 신영초 안맥결 안성결 안임순

안혜순 양원숙 양태원 양한나 오수덕 오순옥 오인자

왕종순 유순덕 윤기숙 윤병숙 이경화 이계남 이광협

이귀령 이나열 이소애 이순희 이승애 이신덕 이용자

이정순 이정열 이창숙 이춘자 임경애 장현숙 장흥선

전순화 정재영 조규은 조나열 조선부 조숙경 조온자

 조자호 주의경 지복남 차확실 최경애 최경희 최마리

최용숙 최흥남 하진해 한수자 한신광 한희자 함덕훈

허경신 홍의선 황명숙 황봉순 황신덕 황온순

 

 

 

 

   

일제 강점기 조국광복을 위해 몸바친 선열들로

건국훈장과 건국포장 대통령 표창을 받은 분들이다.

유관순 처럼 널리 알려진 분도 계시지만 대부분의 분들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또 비록 표창명단에는 안 올라 있다

할지라도 독립을 위해 알게 모르게 힘을 기울였던 분들도 많다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주인공들이다. 그 분들 그 성함 한분

이라도 더 알았으면 해서 모두 올렸다.  장개석 총통의 부인이기도

 한 중국의 송미령 여사가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것은 비록

외국인일지라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서 그만큼 큰 힝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장개석총통에게도 대한민국의

 최고훈장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 되었다.

 

 

 

 

충청남도 목천 독립기년관

뒷뜰에 대통령장을 받은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과 독립장을 받은 김마리아

 지사의 석비가 있다. 위는 남자현지사 주요

약력이고 아래는 김마리아 선생의 어록과 약전

이다. 사진은  2008년에 촬영한 것이다.

 

 

 

 

 

동영상 보기

 

 

동영상을 보시기전에 음악을 끄셔요.

 

 

 

 

 

 

 

 

 

 

이화옥 삼일동지회 회장 개식사 전문

 

 

3․1운동 제94주년과 우리3․1여성동지회 

창립 제46주년을 맞은 오늘, 조국을 찾겠노라

전통시대의 남녀 차별화를 무릅쓰고 일선에서 남자들과

 겨루며 일본 침략자의 총칼 앞에서 젊음을 바쳐 싸우신 항일여성

 선열님 그리고 3․1여성동지선열님을 기리는 제7회 추모 식을

갖습니다. 참석하신 내외 손님 여러분, 이 자리를

 빛내주신 데에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머리 숙여 인사 드립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된

우리나라는 1948년 유엔의 후원 하에 민주주의

 독립국가인 대한민국으로 탄생하였으나 북한이 일으킨

6.25전쟁으로 금수강산은 초토화되어 국제적 원조를 받는 빈민국

으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됐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세계 10대 무역국가로 

성장하여 열강들과 어깨를 겨루는 강대국으로 발전하여 개발도상국을 돕고 있습

니다. 과거 약소 민족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대영 제국에는 해가 지는 날이 없다”고

세계 방방곡곡에 둔 식민지를 과시했던 영국을 국빈의 자격으로 다녀오셨습니다. 

 세계에서 미모와 위엄의 상징으로 알려진 Elizabeth 여왕과 나란히 우리 대통령이

 한치의 손색이 없이 차분한 웃음을 머금고 황금마차를 타고 Buckingham

궁전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우리 대한민국 여성의 자랑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여왕께서 왕자들이 탄생한 침실을 우리 여자 대통령

에게 내어 주시는 친근감을 보이신 것은 대한민국의

 국력의 과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조수미 소프라노는 아직도 추종자가 없는

프리마돈나로 세계무대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대한의

낭자들은 세계여자골프대회에 대거 참가하여 골프채로 상금을

긁어 모으고 있으며, 세계 올림픽대회에서 우리 여자 선수들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애국가를 울리는 것을 국민들은 당연한 일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이 공로는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건국의 거름이 되신 순국 선열님

들의 몫입니다. 3․1여성동지회는 2006년 11월에야 비로소 항일여성선열들은 물론

3․1여성동지회에서 혼신 하셨던 이사 이상의 동지들의 영령을 기리고자 “항일여성 및

3․1여성동지 선열추모 식”을 마련하게 되었고 2012년부터는 국가보훈처의 후원으로

 큰 규모의 추모 식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번2013년도 제7회 항일여성 • 3․1여성동지

 선열추모식에는 의병, 광복군, 애국부인회 활동 등으로 항일독립유공자로 포훈

되신 233명의 영령을 모시게 되었고 이중에는 3․1여성동지회를 창립하고

활동하신 분들이 다수 포함되셨습니다. 이 추모 식에 오신 귀하신

손님들을 정성껏 모시고저 물심양면으로 혼신을 다하여

뛰어 다니신 준비위원님, 이사님들,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년 11월 11일
사단법인 3․1여성동지회 회장 이 화 옥

 

 

 

 

 


일제 강점기에 조국광복을 위해 몸바친

항일 투쟁 여성들의 예를 들어 본다.

 

 

3.1운동은 봉건사회에서 핍박을 받던

 조선여자들로 하여금 나라를 위하여 활동할 기회를

 부여한 첫 기회였고 3ㆍ1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여성들은 어느 정도 사회활동이 가능했던 일본 유학생, 학교 여선생,

 여학생, 기생, 여성 기독교인들이었다. 1918년 11월 5일, 제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망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파리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동경에 있던 한국 유학생들은 한국의 실정을 세계

만방에 호소하려고 움직이기 시작 하였다.

 

그 동안 배일운동을 하면서 국내와 해외에

연락망을 찾고 있던 조선여자 유학생회의 총무 황애덕

(황에스터)는  2월 6일에 있은 일본 유학생 회에서 분연히 일어나

“여러분, 국가의 대사를 남자들만이 하겠다는 겁니까? 수레바퀴는 하나로는

달리지 못합니다” 라고 남학생 설득에 나섰고 1919년 2월 8일에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낭독된 이광수의 독립선언문에 선서한 11명이 모두 남자 유학생인 사실에 충격을 받은

회장 김 마리아는 독립선언문을 몸에 숨기고 귀국하여, 기독교와 불교 지도자 들과

연합하여 독립을 호소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천도교 본부를 방문하여

지지를 얻고는 고향인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한편으로 황에스터은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여성대표를 파견할 임무를 띠고 몰래 입국했고

 박희도, 송진우, 김성수등과 연락한 후 빠리 강화회의에

여성 대표로 뽑힌 신마실라의 여비 마련으로 평양에 도착하여

안정석과 함께 가정 방문을 하고 “좀 주셔야겠습니다”하고 입만

 벌리면 부녀자들은 주머니의 현금을 다 꺼내주든지 몸에 지닌 반지나

 비녀 등을 아낌없이 뽑아 주었다. 그 만큼 학력을 막론하고 당시

여성들의 독립에 대한 갈망과 협력은 위대했던 것이다.

 

황애스터는 3월19일, 3.1운동에 연루되어

종로서로 연행되었는데 감옥안에는 김마리아도 모진

고문으로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독방에 있었고 두 분은 8월에

증거 불충분으로 가석방되었다. 그들은 곧 삼일운동 전부터 있었던

애국부인회의 간부들과 연락하여 1919년 10월19일에 16명이 모여 거국적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동지의 배신으로 1919년 11월 28일에

 벌어진 검거선풍에 전국을 통하여 회원1000여명이 체포되었고 10여명의 간부는 그날

밤으로 대구경찰서로 압송이 되었다. 회장인 김마리아는 연루자를 색출하려는 악독한

 경찰이 옷을 벗기고 억센 바 줄로 묶어서 달아매고 코에는 고춧가루와 물을 들어붓는 등의

 고문으로 6개월 동안 형무소 속에서 가사 상태로 계셨으며 물고문의 여파로 귀의

뒤 뼛속에 고름이 끼는 불치병으로 50평생을 고통 속에서 보내셨다.

 

총부부장 황애덕은 5년 언도를 받고 불복 공소하여

 3년으로 감형되고 부회장 이혜경2년, 재무부장 장선희2년,

적십자부장 이정숙은 2년, 결사대장 백신영은 1년, 서기 김영순 2년,

신의경과 대구지부장과 유인경은 각 1년을 언도 받았다. 이 중에서 김마리아

(보석)와 백신영(1년-서대문 형무소)를 제외한 7명은 모두 대구감옥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징역 5년의 판결을 받은 김마리아 열사는 8개월 만에 병 보석으로 1921년

7월1일 출옥한 후 병약한 몸을 무릅쓰고 상해로 탈출하여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표로

지내다가 1923년 상해 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고 6월에 미국으로 가서

1924년부터 1932년까지 파크대학 졸업 (학사), 시카고 대학, 콜럼비아대학 

(석사), 뉴욕신학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재미 애국부인회를 결성, 항일

운동가 김경천 장군의 일기에서 보듯이 “ 식료, 의복비용은

전적으로 부족하여 군대 전부가 실로 걸인 같다”는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만들어 보내므로

 서 상해 임시정부를 도왔다.

 

김 열사는 형기 만료에

즈음하여 탈출한지12년 만인 1932년에

 귀국하여 애국활동을 계속 하였으나 광복을

 못 보고 1941년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해방을

 1년 앞둔1944년 3월 13일, 53세를

일기로 눈을 감으셨다.

 

19세로 함흥 영생여학교의 최초 한국

여선생이던 전창신은 함흥 3.3거사 주모자

42인의 하나로 여자동원, 태극기 준비, 연락, 간호,

거사 후 수감자 가족들의 뒷바라지 책임을 맡고 기숙사생들과

몰래 이틀 밤을 세우며 거사에 나누어 줄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만들고 3월3일 새벽 학생들을 동원하여 함흥장터로 나가려다가 맥애련

교장선생에게 잡혔다. “창신이 애국하는 길은 캐나다 선교부의 계획대로 곧

일본에 유학하여 교사자격증을 받고 와서 내 후임으로 영생학교 교장이 되어

여학생을 교육하는 길이요. 위험한 일은 남자들에게 맡기시오” 하고  읍소하시는

교장선생님을 뒤로 한 창신은 제자들과 기마 헌병과 무장 경찰관, 소방서원 들로

 가득 찬 함흥거리를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렸고 놀란 당국에서는 3월 10일에

 각 중등과정 이상의 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귀향하는 학생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누어 주며 고향에 내려가서 시위할 것을

 다짐받고 서울로 피신하던 창신은 3월 19일에

원산 역에서 체포되었다.

 

함흥경찰서로 끌려와서 취조를 받던 창신은

 마주 앉은 젊은 한국인 고등계 형사에게 “일제의

개 노릇을 멈추고 국혼을 찾아 독립운동을 하라”고 호령하고

 구치소로 끌려갔는데 그 형사가 만든 조서는 일제하에서의 창신의

인생을 좌우하였다. 미성년자이기는 하나 국사범인 창신은 8개월 형을 푸른

죄수 복 대신 붉은 수의를 입고 가슴에는 44호 번호를 달고 함흥여자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깡통 속에 나열된 정어리처럼 죄수끼리 머리와 발을 번 갈라 맞추고

살을 데고 자다가 새벽에 신참 책임인 똥 통을 비우러 나가려면 밤 새

빈대에 물리며 서로 긁느라 고름과 진물로 죄수끼리 엉겨 붙은

 살이 옆 사람과 떨어질 때면 상처가 피범벅이 되어

몰골이 영락없는 옴쟁이 같았다.

 

창신을 골탕먹이기로 결심한 일본 여 간수들은

 창신에게 한 여름에는 몇 백 필이나 되는 붉은 광목을 가위로

 잘라 죄수 복 마름질을 시키고, 손이 붓고 어깨가 결려서 쩔쩔매면

기다렸다는 듯이 곧 바로 취사장으로 보내어 뜨거운 밥을 푸게 하였고

 추운 겨울에는 맨발의 창신을 우물가에 내 보내어 키가 큰 남자와 물통을

지라고 우겨서 얕은 쪽으로 기울어 미끄러지는 무거운 물통에 덮쳐서 개울가에

 나둥그러져서 실신하게 하였다. 수감 중인 6월 어느 날, 간수가 와서 창신에게

수갑을 채우고 몸을 오라 줄로 묶길래 귀향한 학생들이 일으킨 만세운동의

 연루로 끌려가는 줄로 알았는데 뜻밖에 금 테두리 모자를 쓴 정복

경찰관 300여명으로 가득 찬 방으로 들어 갔고 상좌에

앉은 일본인이 “왜 만세를 불렀느냐”고 물었다.

 

그 간 법정투쟁 기회를 얻지 못하여

억울했던 창신은 “만세를 왜 불렀느냐는 것은

 당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당신들은 우리의 국토,

국권, 국민의 생존권마저 빼앗는데 성공 한 줄 알겠지만 우리의

민족혼은 건드리지 못하였소. 우국 혼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독립 할 때까지 싸울 것이오. 당신들은 일방적으로 합병을

 강행하고 외교권부터 박탈하고 군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을 쓰고 있소.

 

첫째, 교육을 한다고 보통학교

훈도에게까지 긴 칼을 채워 공포 분위기 속에서

황국신민을 만들려고 했소.

 

 둘째, 동양척식회사를 만들어

농민에게 비싼 이자로 돈을 주고 만기

되기만 기다렸다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농토를

 빼앗자 이들은 남부여대 하여 남북 만주로

 살길을 찾아 떠났소.

 

셋째, 애국동포는 감옥에 가두고

언론 기관을 철폐시키고 집회는 불허했소.

 

넷째, 직장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있소. 이번 의거는 나라를 빼앗긴

사람의 필연적 행동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주먹의 군중을

 총칼로 살생하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소. 그것이 언필칭 대 일본제국의

행동이오? 이번 의거는 우리의 독립운동이오. 좋은 증거를 보여드리리다” 하고

말한 뒤 창신은 피고름과 진물로 문둥이를 닮은 두 팔을 걷어 붙이며, “내 얼굴과

팔을 보시오. 나는 분명 당신네들과 똑같은 인간임에는 틀림없소. 내가

이렇게 인간 이하의 비참한 꼴로 나타났겠소? 나라를 빼앗긴 탓이오.

축생 이하의 대우를 받아 죽어도 나를 보호할 나라가 없단 말이오.

그런고로 오늘 우리들의 거사는 독립이냐

 죽음이냐에 있는 것이오.

 

우리는 반드시 독립하고야 말 것이오.

우리에게는 4천여 년 역사가 있고 굳게 뭉친

2천만 민족의 우국 혼이 있소. 그러니 당신도 더 이상

 수고하지 말고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우리는 군국주의 식민정책에

 신물이 나오”하며 신이 나서 언성을 높이자 일본신사는 “너의 말 잘 알아듣겠으나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니 이런 일에 참여하지 말고 나가거든 공부나 열심히 하여라.

 앞으로는 잘 살게 될 것이다”라고 되받기에 창신은 “당신들과 합병하여 편하게 살기를

원치 않소. 못 살아도 좋으니 내 나라를 찾아 내 동포와 더불어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소.” 하고 말을 끝냈다. 다음 날 함흥에서는 ‘어린 처녀 여선생이

민정시찰 차 함흥에 온 동경 고등법원장을 훈령’했다고 온 장안이

 끓었다고 한다. 경찰 금테두리 300중에도 투쟁장면을

발설한 한국인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겹던 여름이 지날 무렵인 9월 1일 새벽 3시에

 4개의 구 감방 문이 활짝 열렸다. 마침 당번이던 유일의

한국인 간수이며 창신과 영생동창인 경혜가 재빨리 창신과 성률

(창신의 제자로 같이 수감됐던)에게 짚이 거의 다 떨어져 얼굴이 환히 보이는

 용수로 바꿔 씌우고는 행렬이 대문을 나서는 순간 둘을 앞줄에 끌어 세웠다.

구 감옥에서 1 km떨어진 동흥리 동쪽 시외 근방에 세워진 신 감옥으로

 옮기는 행군이 시작되었다. 어둠을 더듬고 시가에 들어서는 데

헌 옷에 물동이를 인 여자 아이가 바짝 창신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이상하여 얼굴을 보니

석박순(石朴順)이라는 제자였다.

 

그러더니 여기저기에서 빠르게 군중이

 행렬에 끼어 들기 시작하였고 날이 밝아 오자

 학교선생, 학생, 교회사람, 아이, 어른들이 “창신, 성률”하며

소리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소리에 창신도 처지를 완전히

 망각한 채, 손을 높이 들어 흔들며 열심히 응답하자 인솔하던 남녀 간수들은

 총까지 휘두르며 군중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그때 창신에게는 신 감옥 가까운

어느 초가집에 한복으로 촌부인 차림을 하신 맥애련 교장이 발광에 가까운

몸짓으로 “창신아! 성률아!”하시며 소리를 지르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창신은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 하고 소리소리 질렀고 군중의

소리는 신 감옥의 큰 대문이 닫길 때까지 뒤를 이었다.

 

 마침 그날 밤 당직이던 경혜가 극비밀인

 여감 이전 사실을 쪽지에 써서 저녁 도시락 밑에

깔아놓은 것을 도시락을 챙기러 온 동생이 들고 나가서

소문을 퍼트려서 일어난 일이다. 경혜는 곧 비밀 폭로 책임으로

 엄중한 조사를 받았으나 완벽한 알리바이 제시로 곤경을

면한  하나의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함북 명천에 3․1 운동 사건으로

명천 주재소 습격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외딸인 동풍신은 총살당한 아버지 시체를 업고 시장

 주위를 돌면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거기에 충격을 받은

군중이 모여 薰 씨 가문이 선두에서 주재소에 방화를 하게 되었고

그 소동에 동풍신 어머니를 비롯하여 총에 맞아 죽은 사람도 생겼다.

함경남북도를 통하여 유기형을 받은 중죄인은 함흥 감옥으로 오게 되어

있었다. 그 때 창신이 있는 함흥감옥으로 20세 전후 처녀로 몸에 탄알이 박힌

동풍신, 불을 지른 방화범인 70이 넘으신 할머니, 또 30세 미만의 젊은 며느리가

 들어 왔는데 며느리는 심한 고문을 받아 정신 이상으로 늘 울다가 일본 여 간수에게

 자 막대기로 머리부터 사정없이 얻어 맞기가 일수였다. 동풍신은 창신과 성률의

판결이 나기 이전에 상고하여 경성으로 갔는데 해방 후 만난 애국 부인회

백신영씨에 의하면 동풍신은 끝까지 상고하여 감형으로 5년 형을

받은 후 단식투쟁으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함흥 형무소 시절 창신과 엇갈리면서 그가 한 말은

 “나라 없고 부모 없이 어이 살란 말인가? 나도 따라 가련다”였다.

출옥 다음 해에 일본에 유학하여 정교사 자격증을 획득하고 돌아 온

창신에게 함흥 교육청에서는 “불령선인으로 천황폐하의 자녀 교육에 부적합

하다”고 교사자격을 박탈하여 맥애련 교장 후임의 꿈은 사라지고 그 후 결혼하여

“신사참배” 거부로 광주형무소에 계신 남편 김주 목사의 옥 바라지를 하며 부모가

모두 불령선인이 되어 공립학교에도 입학을 못하는 3남 1녀를 키우며 애국부인회

 일을 보는 형설의 길을 걷다가 해방을 맞게 되었으나 공산당의 끈질긴

협조 요청을 피하여 온 식구가 뿔뿔이 흩어져서 남하하였다.

 

 서울에 와서 애국부인회 간사 직을 맡은

창신은 대한민국에 최초로 창설된 여자경찰학교

훈련을 받고 경감으로 임명 되자 원래의 군정청의 의도인

 매춘부 단속, 고아 관리 업무 수행 이외에 매일 국회를 드나들며

거의 100% 축첩자인 당시의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쌍벌죄”를 통과시키어

 첩 때문에 고통 받던 본 부인들의 권력을 향상하였고 6.25 전쟁 중에는

인천 여자경찰서장으로 밀려드는 피난민과 전쟁고아들의

인파를 선두 지휘하여 보호를 하였다.

 

이화학당 학생으로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가담한 유관순 열사는 휴교령으로 귀향하여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 모인 대중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며

 다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모진

고문도 무릅쓰고 끝까지 옥중 투쟁을 하시다가

 병으로 1920년 순국하셨다.


 

 

관련글 더 보기

 

 

전창신, 김영순 독립운동가, 동영상 3.1(삼일)여성동지회 이화옥

http://blog.daum.net/jc21th/17781687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성과

남성이 다를 수는 없지요. 그 시절에 국방을

책임지는 일은 언뜻 보기에 남자들의 몫이였던 것 같아도,
서로의 역할 분담이 달랐을 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목숨을 바쳤는지, 이제까지 알고 있던 이름은 오직 유관순열사

뿐이였습니다. 역사는 많이 흘러갔지만 이제 제 7회에 불과하다해도, 이렇게

목숨을 바쳐 애국하신 많은 분들의 조국애와 그분들의 영령을 기리는 행사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관계자분들과 그 후손들이 앞장서고  

주축이 되어 이렇게 그분들의 애국정신을 밝히고 이어질 수 있도록 힘쓰는 일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소리없이 묻혀버릴 이런 뜻있는 행사를 상세히 취재하여,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시는   춘하추동방송의

이장춘 국장님같은 분이 많이 필요한 현실입니다. 국장님의

 애국심과 열의에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답   글

 

 

고맙습니다. 이 글을 유여사님

 쓰셨으면 더 생생하게 쓰셨겠군요. 23대

3.1여성동지회장 이화옥씨는 음악가 안기영님의

조카로 김영미 소프라노의 어머님과는 외사촌이 됩니다.

 최초의 정식 국제 관리로 임명되어 28년간 국제개발기구(UNDP)의

대표로 여러 개발도상국의 경제원조사업을 주동한 부군 김윤열씨는

김주 목사님(애족장)과 제 8대 3.1여성동지회 회장이셨던

 전창신(대통령표창)선열의 장남이 됩니다.

 

 

정창원(두암산) 선생님 글

 

대한민국이 오늘날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선열님 들의   한 몸 안위에 앞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바쳤기에 오늘이 있었을 것입니다.
잠시나마 나라를 위해 몸과 목숨을 바치신 선열님 앞에

고개 숙입니다. 아울러 잠시나마 생각에 마음 머물게

하여 주신 춘하추동방송에 감사드립니다

 

 

우제탁(벽산)선생님 글

 

미쳐 생각 못했 던 그때 그 이야기,,,

오늘 민주주의 인권? 이란 이름으로 온갖

대립 분열 시위,,,나라가 시끄렇운데 이러한

 행사 이야기 좀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싶습니다 그리고 화합 단합 조국

 국가를 생각 하는 자세가 있어야,,,,    

 

 

답  글

 

우선생님께서 잘 아시는 위 명단의

최선화여사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분으로

중국 임시정부 김규식 박사 부인 김순애(독립장 수훈)님이 

이끌었던  애국부인회 총무부장을 지내면서 최소정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애국지사로 임시정부, 단파방송을 통해서 방송을 하는 등 독립운동을

벌렸습니다. 남편 양우조님은 임시정부 중책을 맡은 핵심적인 독립운동가로

한국과  중국, 미국을  드나들며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인 알아주는 독립

 애국 지사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99년 9월 이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단파방송 독립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양제현의 삼촌이기도 합니다.  

 

 

박서림선생님 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이렇게 많은줄

몰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분들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시겠다니 기대가 갑 니다. 그 어른들

 후손들에 관한 일화도 관심거리구요.

 건필을 빕니다. 

 

 박서림  

 

 

 

  

 

 

 

 

  사회 이정자부회장님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선열추념가, 3.1여성 동지회가.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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