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세계유산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사적 제 257호

이장춘 2013. 9. 30. 11:42

 

 

 

궁궐이 아니면서도 “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 운현궁! 궁이 아니면서도 궁과 같은

위엄과 화려함을 뽐내던 운현궁, 그 안에서 나라를 통치

하던 주인공 흥선대원군은 왕이 아니면서도 왕의 위엄과

권력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둘래가 수리(數理)나 된다고

했다. 1리면 400m를 말한다. 수리라면 4Km는 아니어도

넓은 터였음을 말해준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었던 또 하나의 궁이었다. 그 운현궁을

KBS 사우회 제10기 임원진과

 함께 찾았다.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사적 제 257호

 

 

지하철 안국역 4번 출구나 종로 3가역

 5번 출구에서 가까운 거리에 한때 조선왕조를

통치하던 궁궐 아닌 궁 운현궁이 있다. 원래는 조선조 말

이하응이 살던 작은 집이었다. 이하응은 왕족으로 벼슬을 하고

학문을 익히고 난(蘭)을 치며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지만 만약에 대비

해서 늘 자기를 낮추며 살면서도 왕실과 가까이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제25대 철종이 세상을 뜨고 후사가 없음에 제24대 헌종임금의

어머니로 대왕대비이자 당시 왕실 최고 어른 신정왕후(神貞王后)는

흥선대원군 둘째아들 12살의 어린 명복(命福)을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봉안하고 섭정을 했다.

 

 

 

 

고종 아버지 이하응(李昰應)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으로 어머니 민씨는

 부대부인으로 불리게 되고 흥선대원군의 사저는 운현궁으로

이름을 바뀌면서 궁궐과 같은 노락당과 노안당을 세우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섭정 조대비는 흥선 대원군에게 전권을 넘겼다.

그로부터 고종이 태어나 12살까지 살았던 집 운현궁은 조선말기의 정치

중심지로 바뀌고 또 고종과 민중전의 가례가 여기서 올려졌다. 서운관

(書雲觀)이 있던 운현(雲峴), 우리말로 구름고개라고 불리던

그 이름을 따 운현궁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이해를

돕기위해 1750년대에 그려진 지도를 올린다.

 

 

 

 

운현궁은 경복궁과 창덕궁의 사이에

있었다. 작은 고개들이 있었고 북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있었다. 시냇물이 복개되기 전

 옛날에는 아낙네들이 빨래도 하고 아이들이 미역을 감기도 하던 

곳이다. 대원군이 어린 왕을 대신해서 정치를 하게 되면서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경복궁을 다시 짓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라고 불리는 미국,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며 내정의 개혁을 단행했다. 왕을 전하라고

 부르던 때 흥선대원군은 그 다음의 호칭 합하(閤下)로 불렸다.  흥선대원군의  호가

 석파로 이것은 자하문 밖의 석파정에서 유래된 것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6호로 지정된 이 석파정은 조선시대 중신 김흥근의 집으로 흥선대원군이

그 집을 갖고자 했을 때 그에 응하지 않던 김홍근은 결국 그 집을 흥선

대원군에게 넘겨야 했고 흥선대원군의 아끼는 별장이 되었다.

 

그의 호는 그 별장 앞 언덕이 모두 돌로 된대서 유래된 것이었다. 

흥선대원군이 하려고 하는 일에 안 되는 일이 없었으니 이때 운현궁도

 크게 넓혀졌다. 노락당, 노안당은 초기에 조대비가 마련 해준 것이지만 이로당을

 확장하고 그 주변의 땅을 넓혔으며 창덕궁 경복궁과 통하는 대궐문처럼 웅장한

전용문을 만들었다. 경근문, 공근문, 정문, 후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은

후문만 남아있다. 지금 덕성여대의 일부와 1970년대 TBC동양방송의

운현궁 스튜디오 등도 그 시대에 운현궁 땅이었다.

 

흥선대원군으로 부터 시작된 운현궁은

일제강점기를 맞아 일본에 귀속되었다. 소유권은

일본으로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흥선대원군의 후손들이

살다가 해방되어 군정청에 의해서 다시 원래의 운현궁 주인에게

돌려 주었다. 흥선대원군의 아들 이재민, 손자 이준용, 이준용의

 양아들 이우,  이청으로 이어오다가 이청에 이르러 

1991년 서울시에서 매각 1993년부터 복원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지금의 운현궁은 노락당과 노안당,

이로당, 수직사가 남아있고 이곳에서 고종,

민중전의 가례가 재현되기도 하고 신청을 받아

 의미있는 전통혼례를 올리기도 한다. 지난 9월 21일

에도 가례가 재현되었고 여기서 치뤄지는 전통

혼례도 때를 맞추어 가면 관람 할 수가 

있다. 늘의 운현궁을 돌아본다.

 

 

 

 

안국역 4번출구에서 종로 3가를

향해 가다가 대로변 천도교 중앙교구 맞은편에

한옥으로 된집이 있다. 이곳이 밖에서 본 운현궁 수직사다. 

수직사에 있는 출입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이 있고 여기서

옛날에 있었던 가례가 재현된다. 수직사 건물 안에는 부억이며

호롱이며 그 시대에 했던 일들을 형상화하고,

또 그때 쓰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수직사에서 또 하나의 문을 지나면

운현궁의 중심 노락당이다. 관주 김광일님이

파노라마로 촬영해서 올린 머리 사진이 노락당의

 전경이다. 큰 행사가 이 노락당에서 치뤄졌다. 담넘어에

 지금은 덕성여자대학교가 된 양관이 보인다. 이 양관은 1912년

 일본이 흥선대원군의 아들 이재면에게 지어준 것을 1946년 덕성

여자대학교에 팔아 학교 일부가 되었다. 이 건물은 건축사적인

 의미가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행한  역사가 서려있다.

일제가 운현궁의 기를 꺾고 그 양관에서 "운현궁을 

감시하기 위해서 세웠다." 는  것 때문이다.

 

 

 

 

 

위 사진과 아래 사진은 내부

두 방이 연결되어 있다. 사진 촬영이 어려워

둘로 나누어 올렸다. 1864년 노락당 준공 축하 다례연을

올릴때 조대비, 철종비, 부대부인이 자리를 함께 한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위 사진에서 오른쪽이 조대비이고 왼쪽이 철종비다. 아래

사진은 깉이 연결된 옆방의 부대부인과 상궁의 모습이다.

 

 

 

 

 

 

 

 

 

 

노락당의 앞에 운현궁 사랑채 노안당이 있다.

대원군의 일상 거처임과 동시에 대원군이 정책을 논하고

실천했던 곳이다. 상황판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난을 치고있는 흥선대원군의 모습이 형상화 되어있다.

 

 

 

 

 

 

이로당은 운현궁의 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운현궁 사람들이 생활하던 곳이고  살림을

 맡아 하던 곳이다. 원래 대원군이 거처하던 작은 집을 

증축해서 오늘의 이로당이 되었다. 이 집에서 고종이

자랐고 이곳에서 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봉사식을 형상화 해 놓았다.

 

 

 

 

 

위 사진의 오른쪽이 고종이고

왼쪽이 흥선대원군이다. 아래사진

영의정 김좌근은  조복을  도승지

민치상은 청단령을 착용했다.

 

 

 

 

 

이로당 뒤로 돌아가면 그때

사용하던 우물이 있고 맞은편에 경백비

(경송비)가 있다. 가운데 자가, 잣 백자 같기도 하고

 소나무 송자 같기도 하다. 여기에 잣나무(소나무) 가

있어서 고종이 그 나무를 오르내리며 놀았다.

고종은 그 고마움을 못 잊어 그 나무에

정 2품의 벼슬을 내렸다.

 

 

 

 

수직사에 형상화 되어있는 부엌 일하는 모습이다

 

 

 

 

 2007년, 08년 KBS사우회 10기 임원들이 만났다.

그때는 사우회 사무실이 이곳 천도교 중앙교구 빌딩에

있어서 그런 인연으로 지금도 그 부근의  음식점에서 두달에

한번씩 만난다. 4년 반동안 만나 왔지만 사진 한번도 촬영치 

못한 터에 이날 현직 정근춘 회장님을 포함해서 13분이

만나 모처럼 촬영한 사진이다.

 

위 사진은 이날 운현궁을 돌아보고

촬영한 사진으로 왼쪽부터 이광수, 정도영,

정근춘, 김은구, 이장춘, 구본출, 이휘, 이상욱,

박용식, 훙금표, 정종판님이고  아래는 식사가 끝

나고 촬영한 사진으로 위 사진 촬영전 바쁜일로 먼저

 간 한중광님(오른편 두번째)과 사진 촬영으로빠진

김광일님(왼쪽 끝)이 함께 한  사진이다.

 

 

 

 

 

조선왕조 궁궐 5대궁

 

 

경복궁 역사 600년 수난사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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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화유산 창덕궁 사적 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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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경덕궁)과 조선왕조 5대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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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낙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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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글은 관주 김광일님의 사진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2011 국악대상 가창상 강권순-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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