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대적인 통신제도는 1884년부터 시작되었다. 개화문병을 받아드리던 병조참판 홍영식의 건의로 우정총국을 두고 홍영식은 그 총판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시대 궁중에 쓰이던 의약을 제조학고 약초를 재배하던 전의감을 우정총국 건물로 바꾸어 우정총국 건물로 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 건물이 문을 열고 축하행사를 하던날 그 행사를 계기로 개혁을 부르짖던 젊은 관료들이 이곳에서 그 유명한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청나라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나고 근대적인 우편제도도 이로부터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 우정총국을 찾았다.
우정총국과 민영환 동상이 있는 곳, 근대 우편제도의 시발
안국전철역 6번 출구에서 광화문 쪽으로 가다가 보면 왼쪽으로 옛 화신으로 가는 큰 길이 있고. 이 길 입구에 제법 큰 한옥이 있다. 이곳이 바로 우리나라 근대 통신제도의 시발처, 우정총국이다. 조계사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어떤 분은 “조계사의 경내에 있다“. 라고 표현을 하는 분도 있지만 그 표현은 옳지 않고 사실은 우정총국이 이곳의 주인이었다. 옛날에는 전의감 터로 쓰였던 곳이라 꽤 넓은 터였지만 민가가 지어지고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서 조계사를 제외하고는 주변의 집들을 사서 시민광장으로 조성했다.
이곳에 을사늑약이 채결되던때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기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정공 민영환의 동상이 있고 큰 길가에는 그의 집터임을 알리는 작은 표지석이 서 있다. 큰길가에는 “전의감 터”와 “도화서 터” 라는 작은 표지석도 있다. 3년전 만 해도 모범 집배원의 상징 전주집배원 “이시중”의 순직비가 서 있었지만 지금은 천안에 있는 “미래창조부” 교육원으로 옮겨졌다. 우정총국 내부는 작음기념관이 마련 되어 통신제도가 생기던 그때를 상기 해 준다. 이 기념관이 문을 연 것은 1년쯤 된다.
민영환 동상에는 충정공이 남긴 다음 글이 한자와 한글로 새겨져 있다.
우정총국 내부의 기념관
시민광장
집배원 이시중 순직비
전주 우편국 집배인 고 ●이시중 순직비●는 필자가 2008년 필자가 이곳을 지나다가 촬영한 사진이다. 이번에 돌렸을때 이 순직비를 찾을 수 없어 물어 보았더니 전국에 이런 순직비가 세개가 세워져 있어서 천안에 있는 미래창조부 교육원으로 모두 모었다고 한다. 이 순직비 하부에 한자로 그 내용이 적혀있다.
이시중 집배원은 1927년 7월22일 전주우체국 소속으로 우편물 배달을 나갔다. 그때 홍수로 전주군 우전면(현 전주시 평화동 2가)에서 냇물이 불어 건너의 마을에 편지를 배달할 수 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편지를 돌멩이에 매달아 냇가 너머로 던졌다. 돌멩이만 냇물을 넘어 가고 엽서는 물속에 빠져 버렸다. 이시중 집배원은 그 엽서를 건지려고 탁류에 뛰어 들었다가 그만 익사하고 만 것이다. 이 순직비는 이 집배원의 시체가 걸렸던 바로 그 바위를 옮겨다가 글을 써서 기념비로 세운 것인데 모든 공무원들의 사표로 삼기 위해 천안 교육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노거수 3그루를 볼 수 있다. 한 그루는 위의 회화나무로 이곳 우정총국 뜰에 있고 두 그루는 이곳에서 바로 보이는 조계사 경내에 있다. 아래 노거수는 "수송동 백송" 이름이 붙은 약 500년정도 된 높이 14m 천연기념물 제 9호다
큰 길가에 있는 표지석
설명은 앞 부분에 있어서 생락한다.
서울 중앙우체국 앞에 있는 우정총국 초대 우정총판 홍영식 동영상을 올립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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