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루시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 주고 난 후 이승만 대통령은 말했다.
“캡틴 루시 수고 많았소.
한국을 떠나기 전에 진해에 있는 내 별장에서 한 달쯤 쉬었다 가시오.” 루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각하, 정말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대통령은 눈을 가늘게 뜨며 흔쾌히 답하였다.“물론, 물론! 그때 윤인자씨도 함께 오시오.”대통령은 윤인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오늘 윤인자 씨에게 따로 훈장을 못 주었지만, 윤인자씨는 애국자입네다. 암, 우리 대한의 꽃이지, 대한의 꽃이야!”
방송작가이자 인물 전기작가 김광휘 “나는 대한의 꽃이었다.” 라는 책명의 표지에 나온 글이다.
배우 윤인자 “나는 대한의 꽃이었다.” 최종고 교수 김광휘 작가
우리나라 최초의 키스신이자 윤인자 데뷔작 1954년 "운명의 손"의 한장면이다. 끝부분에 그때의 영화를 연결했다, 1923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어 그 얼굴을 기억할 수 없는 윤인자가 12살 때 기생학교에 들어가 기생 공부를 하면서 기생이 되고 악극단의 배우, 가수가 되었으며 6.25때 한국에 파견되어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의 고문관이자 미 해군 함대사령관 미 해군 대령 루시와의 삶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힘을 기울인 윤인자를 가르켜 김광휘는 "대한민국 최후의 관기"라고 했다. 지금 들리는 음성은 배우 윤인자에 대해 설명하는 김광휘 육성의 일부다.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거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발굴, 재 조명하기 위해 오랜 세월 힘을 기울여온 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최종고 교수가 6월 29일 (2013년) 마련한 한국 인물 발표회에 윤인자를 선정했다. 서점에서 김광휘가 쓴 윤인자 전기를 읽다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단순한 배우가 아닌 파란만장한 가시밭길을 해쳐온 윤인자가 한편으로는 나라를 위해 힘을 기울인 애국자였고 국가 유공자이기도 했다. 는 그의 삶에 감동을 받아 이날의 인물 발표회장에 올린 것이다. 타고난 아름다움 용모와 음색으로 사리원의 기생권번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기생이 되었지만 큰 뜻을 펴려던 윤인자가 만주로 떠나던 악극단을 만나고 그 단원이 되어 연극도 하고 노래를 불렀다. 평양과 금강산,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 등지에서 활동하던 윤인자가 서울의 국일관 기생으로 돌아와 있을때 중국 하얼빈에서 활동하던 태양극단의 입단권유를 받고 참여한 것은 1943년 으로 이때 윤인자 나이 20살이었다,
1944년 유치진의 <소>에 출연 주연으로 순회공연을 했고 이때 윤인순 본명대신 윤인자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만주 봉천에서 해방을 맞아 귀국해서 북한땅에 머무르던 윤인자는 북한의 선전극 “묘향산맥”, “불국사의 종소리” 등의 순회공연을 하다가 월남했다. 주연배우로 연극 활동을 하면서 모윤숙이 운영하던 낙랑클럽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때의 낙랑 클럽은 고급 사교 클럽으로 국내, 외 고위 층 인사들이 드나들었다.
부산으로 피난을 간 윤인자가 1950년 8월 광복동 미군 장교 클럽에서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의 고문관이자 미 해군 함대 사령관 마이클 J. 루시 중령을 만나 동거를 시작하게 되어 1951년 말 루시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이어진다. 국난의 어려움 속에서 미국의 환심을 사야 하던 때라 그들의 마음을 한국과 친근 하게 유도하도록 한 것이 엄청 중요시 되었다. 윤인자는 루시 중령 (떠날때는 대령)을 통해서 애국적 행위를 한 것으로 평가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극찬을 받았고 김광휘는 이것을 “나는 대한의 꽃이었다.”는 책으로 엮어진 것이다.
윤인자가 영화에 입문한 것은 1954년이다. 이때 한형모 감독 :“운명의 손”에 출연해서 입술에 새로 판지를 대고 7초간의 키스를 한 것이 국내의 최초 키스신으로 기록되며 그 당시로서는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드디어 키스신이 나왔다면서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이 영화 "운명의 손"을 밑에 연결해서 여기서 볼 수 있오록 했다. 윤인자가 1957년에는 김한일 감독 “그 여자의 일생” 에서 옷을 벗은 속살을 보였다고 해서 최초의 누드 신을 촬영한 배우로 기록된다. 누드 신이 금기시되었던 그 시절 창문너머로 보이는 윗저고리 벗은 모습을 보여 준 것이었지만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31살이라는 비교적 늦게 시작된 영화배우 생활이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여러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TV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 영화는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던 때라 조미령, 최은희, 문정숙 등과 더불어 인기를 모았던 배우였다. 윤인자는 사도세자, 옥단춘, 그여자의 일생, 아리랑, 낙화유수, 왕자미륵, 마부, 장희빈, 연산군,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빨간마후라, 거지왕자, 남편은 바람둥이, 울며 헤어진 부산항, 남자 조종법, 홍도야 우지마라, 등 윤인자가 출연한 작품이 100편에 달하고 1965년 “빨간 마후라”에서 여우조연상등을 받기도 했다. 몇차례의 결혼에 실패한 윤인자는 한때 속리산 수정암으로 출가해서 보현 이라는 법명을 갖기도 했지만 2년 후 다시나와 환속, 아제 아제 바라아제, 그리고 1979년 마지막 출연작으로 신승수 감독의 “얼굴” 등을 남기고 2012년 8월 20일 세상을 떠 국가유공자로 국립 이천 호국원에 안장되었다.
1959년 가수와 연기인들이 총출연한 KBS 연말특집방송 남녀대항 방송올림픽 프로그램에서의 윤인자님입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임택근, 강영숙님이 남, 여팀을 대표하는 응원단장이고 , 그때의 이름있던 연예인들현인, 복혜숙, 원방현, 박경원, 황금심, 백설희, 나애심, 금사향, 신 카나리아, 박재란, 김정구, 김용만, 도미, 안다성, 송민도, 도미, 안다성, 김광수 악단등이 총출연한 특집방송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 윤인자가 성우로 기독교방송에서 드라마에 출했을때 성우 주상현, 김범석과 함께 출연한 모습이다. 민구와는 루시대령과 해어져 방송활동 중에 만났다. 민구는 목소리도 좋고 얘능에 재능이 있어서 1947년 조남사, 위진록 등과 더불어 방송국의 성우가 되었다가 연출가가 되어 기독교방송에서 활동을 많이했다. 윤인자 역시 바쁜 틈을 내서 기독교방송에서 방송활동을 했다. 민구는 구민과 성우로 같이 출발했지만서로 다른 사람이다. 아래는 1957년 기독교방송 인기드라마 수정탑 연출장면이다.
윤인자 주연 운명의 손 영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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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혜, 대한민국 해군의 어머니, 손원일제독과 해군창설 http://blog.daum.net/jc21th/17781896
김명희 여사가 1957년 윤인자 최무룡 영화촬영때 토샐리의 새레나대를 부른이래 윤인자, 문정숙과 더불어 친분을 쌓았던 추억담을 김광휘 작가가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들려주고 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기회에 보완 할 것이다.
인물 발표회가 끝나고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2. 배동인교수, 9. 오인환교수, 12. 최종고 교수, 13. 김광휘작가, 14. 김명희 여사님입니다. 성함을 아는데로 보완하겠습니다.
이 모임에 1957년 윤인자와 최무룡 문정숙이 함께 출연한 영화에서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부른 인연으로 윤인자, 김명희, 문정숙의 글자 한자씩을 따 "윤명숙"이라는 공동이름을 만들어 함께 부를 정도로 세 사람이 친분을 이어왔던 김명희 방송선배와 1956년 처음으로 극장영화를 접했던 필자가 그때 옥단춘을 본 이래 최고의 영화배우로 마음 속 깊이 자리했던 윤인자에 관한 인연으로 그 자리를 찾은 것이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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