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체육

1986년 10회 서울 아시안 (아세안)게임, 방송, 문화축재

이장춘 2013. 6. 12. 21:28

 

 

 

1981년 9월 30일 밤 11시 45분!

88올림픽 개최지가 대한민국 서울이라고

발표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같은 해 11월

 25일 86 아세안 게임 개최지가 서울이라고 발표되었다.

1970년 아세안게임을 유치 해 놓고도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반납하고 말았던 나라 대한민국이 그로부터 20년이 채

안되어 아세안 게임은 물론 올림픽까지 한꺼번에 열게 되었으니

실로 깜짝 놀랄일이었고 감개무량했다. 현대 올림픽은 스포츠

경기임과 동시에 문화 축제이고 방송올림픽이라고 할만큼 

문화축제와 방송은 스포츠경기와 올림픽에서 중시된다. 

아무리 스포츠경기가 훌륭힉디헤도 축제와 방송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올림필의 의미는 없다. 

 

 

1986년(제10회) 서울 아세안게임과 방송

 

 

88 올림픽과 아세안게임 개최지가

 대한민국 서울로 결정되면서 그 주관방송사 역시 

대한민국의 대표방송 KBS로 결정되었다. 올림픽방송은

모든 종목의 경기를 신호로 제작해서 세계 각 나라 각 방송국에

 제공해야 하는 일이어서 엄청난 장비와 인력 기술이 따라야 하는

일이어서 대단히 중요한 큰 일이었다. 아세안 게임만 해도 각 경기마다

 1,232시간의 신호를 제작해서 배분해야 했지만 올림픽은 이 보다 더 엄청난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이어서 세계는 과연 대한민국의 방송사가 이런 일을

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서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우리보다 앞서 1972년

멕시코가 올림픽을 치루면서 멕시코 국내방송으로 주관방송사를 결정되었다가

포기하고 결국 서방 방송사들이 참여해서 올림픽 방송을 했던 선례가 있어서

 당시만 해도 변방으로 치부되던 한국의 방송사가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 초미의 관심사였고 그것은 아세안 게임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판가름 나는 일이었다.

 

 

 

 

 

초미의 관심속에 주관방송사로 정해진 KBS

국제적 감각이 남다른 이정석을 사령탑으로 올림픽

방송본부 임시 직제를 만들어 우수한 인재를 배정하고 올림픽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면서 모든 국 내외에서 열리는 경기를 아세안 게임과

올림픽에 연계해서 초점을 맞추어 나갔다. 1984년에 열린 LA대회에는 강용식

보도본부장을 단장으로 대한민국 합동방송을 실시하면서 모든 경험과 기술을

 익혔고 그해  동계 올림픽에는 중계방송은 물론 SORTO 기술요원  오승룡을

중계방송과는 별도로 파견해서 기술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1985년 전국

체전은 아세안 게임의 전초전으로 치러졌다. 86, 88에 쓰일 모든 장비를

 점검 부족한 장비는 모두 보강되어 중계차만 해도 KBS 16대와

 MBC 8대로 24대가 준비되었는가 하면 새로 들여온

중계차는 움직이는 거대한 스튜디오였다.

 

 

 

KBS, MBC 아세안 게임 방송단 결단식 1986년 4월 23일

 

 

 주관방송사는 KBS였지만 MBC도 지원방송사로

손을 잡고 힘을 모아 아세안 게임 방송단을 결단하고

아세안게임 방송센터(ABC)건립도 서둘러 86년 6월 12일

 준공되어 중공, 홍콩, 인도, 말련,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호주, 싱카포르, 사우디 아라비아, 일본, 서독, 미국 등

여러나라 방송단이 ABC에 입주했다.

 

 

 

 

9월 20일 개회식에 4대의 중계차와

18대의 카메라가 동원되는 등 수많은 장비와

훈련된 인원이 참여해서 역사적인 개회식을 성공리에

 마친 것을 비롯해서 성화 봉송, 문화축제, 10월 5일의 폐회식

까지 완벽하게 신호가 제작되어 송출되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치러진 아세안 게임, 올림픽의 예비행사적인

 성격을 지녔던 아세한 게임도 성공을 거두었고

방송도 성공을 한 것이다.

 

아세안게임에 출전한 이래 늘 경기에서

일본에 밀리던 우리나라가 이 대회에서 일본을

앞서기 시작하면서부터 1994년 일본 히로시마 대회에서

아슬아슬하게 일본에 뒤진 것을 제외하고는 줄곳  일본을 뒤로

밀고 우리가 중국다음의 자리를 지켜왔다. 약소국가 대한민국이

올림픽, 아세안게임 개최국이 되면서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딴 선수

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등 체육발전에 더 힘을 쏟아 1984년

 LA올림픽을 계기로 선수들의 기량이 알아보게 향상

되었고 서울 아세안 게임, 올림픽을 계기로

 스포츠 강국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방송역시 작은 변방국가 방송에서

세계적인 방송으로 위상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88올림픽에 이어 2002년에는 월드 컾 축구경기를

개최하면서 제14회 아세안 게임을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었고 내년에는 인천에서 대한민국 세 번째의

아세안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관련글 더 보기 영문자 클릭

 

 

88 서울 올림픽 4강의 신화창조, 동서화해의 전환점 그 감동

http://blog.daum.net/jc21th/17781662

 

1984년 23회 LA올림픽과 10강의 감동, 올림픽 영웅 

http://blog.daum.net/jc21th/17781761

 

제14회 사라예보 동계 올림픽 1984년, 최초의 동구권대회

http://blog.daum.net/jc21th/17781755

 

 

글 내용은 가급적 줄이고 

더 많은 사진을 활용해서 그때를

되돌아 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많은 사진을

올렸습니다. 

 

 

 

 

 

맨 마지막 순서로 개막식 입장한 대한민국은

일본에 밀리기만 하던 경기에서 2위를 목표로해서 중공에

이어 2위를 달성했고 그로부터 1994년 일본 히로시마 에서 열린

12회 경기를 제외하고는 줄곳 우리나라가 앞서 왔다.

 

 

 

 

전대회 9회의 1위국가 중공은 일부 공산국가들이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당당히 참여해서 서울대회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동서의 높은 벽이 가리워져 있었고 우리나라

와도 내왕이 별로 없던 때라 중공의 참여는 그 의미가 컸다.

 

 

 

 

일본선수들이 입장하면서 손에 태극기를

들고 흔드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일본은 이 대회

때부터 우리나라에 2위자리를 내 주었다.

 

 

 

 

 

 

 

위 아래 사진은 우리 선수들의 선전하는 모습을 담았다.

위 사진의 위 왼쪽쪽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탁구의 나라 10억 중공을 누르고

 탁구에서 우승한  유남규선수,  세계정상이라던 파키스탄을 누르고 우승한 여자 하키팀,

전종목 우승이라는 대 기록이 확정된 순간, 남자 복식의 유진선과 김봉수, 평행봉에서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보인 권순성 선수, 한국 축구팀의 열전하는 모습, 수영 2연패의 대 기록을 수립한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 아시아의 탄환열차 장재근, 우리 가슴에 감동의 홰오리를 일으켰던

임춘애, 7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태권도, 여자 탁구의 아성 중공을 격침시킨

양영자, 현정화 복식조 자랑스런 얼굴들이었습니다.

 

아래는 일본 유도에 쐐기를 박은 한국

유도의 간판스타 하형주, 아시아 양국계의 새별

양창훈, 레스링 강국을 확립한 레스링, 권투 전체급을 석권한

권투선수들, 역전 드라마를 펼치며 금메달을 획득한 역도의 황우원,

탈 아시아를 선언한 핸드볼팀, 요트에서 금메달을 따서 놀라게 한

 그 선수들 그 자랑스런 얼굴 그 이름  영원이 빛나다.

 

 

 

 

아세안 게임에 등장한 주요 장비들이다.

 

 

 

아시안 게임의 중계방송을

 총괄한 아시아 게임 방송센터 (ABC)

에는 11게국 17개 방송기관이 입주 중계방송을

했다.  아래는 각 나라 방송기관이 ABC안에서 일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ABC는 가건물로 지어 대회가

끝나고 IBC(국제방송 샌터)를 세우며

그 앞 정원 터가 되었다.

 

 

 

 

 

제 10회 아시안 게임은  88 서울 올림픽 성공의

서곡이었다. 모든 방송은 국내 방송인들이 국내기술로

이룩한 쾌거였다. 아시아 게임을 연 여러 나라들이 외국의 기술

외국 방송인을 고용해서 부족함을 보충했던 것과는 달리  86 서울

 아세안 게임은 순수 우리 힘으로 방송을 해 냈다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100여명의 SORTO (서울 올림픽 방송본부) 요원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일사분란한

움직임에  국제 신호제작과 ABC 운영요원 1,500여명, 국내방송 요원 1,000여명이 모두

 KBS와 MBC 사원들이었고 국내 단기 고용 요원들이었다. 그토록 어렵게만 생각되었던

 아시안 게임의 방송이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의 방송수준을 다시

평가했고 88 서울 올림픽방송에 관한 국 내외의 우려가 안도로 바뀌었으며 88

올림픽에 대한 자신감과 기대가 충만했다. 아시안 게임의 방송은 세계

올림픽 방송에 못지 않는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다음 사진은

그때 SORTO에서 일한 기술요원들이다. 오래된 일이라

 성함이 잘 생각나지 않아 차츰 보완 할 것이고 다른

분야의 사진도 입수되는대로 올릴것이다.

 

 

1.손정호, 2,전영일?, 3,신기철, 5.김탁, 6.안석종, 8,안동수, 9,현일범,

10.전주호, 11.오승룡, 12.백운학, 13.안경환, 14.신형섭

 

 

 

 

 

 

 

 

  

역대 아세안 게임이 열린 나라들

 

 

제1회 1951년 인도 뉴델리 (11개국}

제2회 1954년 필리핀 마닐라(18개국)

제3회는 1958년 일본 도쿄(20개국)

제4회 1962년 인도 자카르타(16개국)

제5회 1966년 태국 방콕(18개국)

제6회 1970년 태국 방콕(18개국) 

제7회 1974년 이란 테헤란 (25개국)

제8회 1978년 태국 방콕 (27개국)

제9회 1982년 인도 뉴델리(33개국),

제10회 1986년 한국 서울 (27개국)

공산국가 불참, 권도 신규채택 25개종목

제11회 1990년 중국 베이징(37개국),

제12회 1994년 일본 히로시마(42개국),

제13회 1998년 태국 방콕(41개국)에서 개최

제14회 2002년 한국 부산 9.29 ∼ 10.14 (16일간)

44개국 38개 종목 11,000명 참가

국내에서 개최되는 국제대회에 북

한이 분단이후 처음으로 참가

(북한은 18개 종목에 311명

(선수 184명)을 파견)

제15회 2006년 카타르 도하 (45개국의 12,000여 명)

제16회 2010년 중국 광저우

42종목 참가국

45개국참가 선수

14,454명

제17회 2014년 대한민국 인천

 

 

 

  

 

 

이 글은 KBS와 노익중, 오승룡 선생님등

선배, 동료분들의 도움으로 썼습니다. 진심으로

고마운 말씀 올리며 앞으로도 계속 수정보완해서

더 충실한 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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