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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KBS 전국 순회 이동방송 보고서/ 정읍, 순천, 여수 /임택근 아나운서

이장춘 2013. 2. 3. 03:17

 

 

없이 살던 시절, 라디오방송마저 듣는 사람이

 적었던 시절! KBS는 라디오를 제대로 들을 수 없던 지역에

 이동방송국을 통해서 방송문화의 체험을 안겨주었습니다. 6.25

직후부터 이런 일을 했지만 1957년 두 대의 이동방송차를 도입하면서

 그해 여름 전국적으로 이동방송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때 그 이동방송국장

들로부터 이동방송 실시에 관한 보고서를 받아 방송지에 계재 했습니다. 오늘

글은 1957년 8월 1일부터 실시된 임택근 이동방송국장의 보고서입니다. 그 시절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좋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이동방송이 끝나면서 그때 사용

되었던 이동 방송차는  포항, 여수, 속초에 배치되어 고정된 이동방송국이

 되었고 또 얼마 안 있어 발족한 KBS TV방송국 중계방송차로 활용

되었습니다. 오늘의 글을 읽으시고 이동방송에 관한 글을

 더 보시려면 아래 영문자를 클릭하셔요.

 

 

6.25 한국전쟁의 세계 최초 해상 이동방송국

http://blog.daum.net/jc21th/17780270

 

6.25때의 이동방송에서 이동방송국까지  

http://blog.daum.net/jc21th/17780417

 

오지 이동방송 라디오 보급 30만대였던 시절 1950년대 말

 http://blog.daum.net/jc21th/17780268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정읍, 순천, 여수지구 이동방송을 마치고 / 임택근

 

 

지난 8월 1일부터 (주:1957년)1주일간

 대천에서 활약하고 있던 제1 이동방송국을 인계받고

정읍, 순천, 여수지구를 순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더욱이

방송국 7년에 아직 방송 풋내기인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게 되었으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고 두려움부터 앞섰다. 가는 곳은 모두 산 설고

불설은 초행길인데다가 맡은바 책임은 중대한 것이었다.

 

방송국 시설이 없는 지방에서 민중 속에

파고드는 방송을 하고 그 지방 향토문화를 살리고

지방민을 계몽하며 동시에 전파를 확장 강화하는 제1선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이제 돌이켜 생각 해 보면 고생스러우면서도

한없이 즐거운 한 달이었다. 가는 곳마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었다. 동고동락하는 5명의 대원 (진윤영, 이의대, 문찬남,

심종호)일동의 동지 결합과 젊은 의욕으로서 맡은바 직책에 최선을

다했다.  지루한 장마에 비와 더불어 여행한 한 달 동안 심신을

아끼지 않고 공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한곳에 정착해서 낯선 그 고장의

거리거리에 정이 들 만하고 다정한 얘기라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가 생길만하면 떠나야 되는

집시와 같은 유랑생활이었으나 아직 연륜이 얕은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매일 매일이었다. 이제

 고생스러우면서도 즐거웠던 지난날의 달력을

 한 장 한 장 제쳐보기로 한다.

 

 

7월 31일 청 후 우

 

 

마치 소학생이 소풍가는 기분이다.

밤새도록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 그대로

맑게 개인 여름 하늘 아래 아침 공기가 더한층 싱싱했다.

총총한 마음으로 정든 서울과 작별 일행과 함께 철마에 몸을 싫었다.

가슴이 마냥 부풀어 올라 한없이 즐겁기만 했던 희망에 넘친 출발이었다.

오후 2시 대천에 도착 할 무렵 나리기 시작한 빗방울은 마구 차창을 내려

 갈겼다. 심한 비로 말미암아 우선 여장을 풀고 쉬기로 했다. 숙사에서

 전반으로부터 사무인계를 받고 밤늦도록 대원일동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의론했다.

 

 

8월 1일 우

 

 

밤새도록 퍼부은 비가 쉬지 않고

줄기차게 내린다. 객창을 두들기는 소리에 선장을

깬 첫날 아침이다. 조반을 일찍 먹고 오전 8시 대원 전원이

 우중에 철수작업을 계속했다. 발목이 푹푹 빠지는 논두렁에 서있는

 안테나를 철거했다. 오전 10시 대천을 출발 방송 차에 몸을 싫은

 대원일동은 일로 제일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차체는 크고 높아서 조금만 길이 나빠도

운행에 지장이 막심했다. 오랜 장마로 인해 도로가

파손되어 직선 코스로 가지 못하고 차안으로 우회하여 국도를

 따라 시속 20마일 내지 15마일 속도로 기어가다시피 달려 오후

8시경 어두워서야 대전에 도착했다. 갈 길은 먼데 도로가

나빠 배 이상의 코스를 돌아야 하며 그나마 중요한

방송기재가 상할까 봐 느린 속도로 달려야

하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8월 3일 우 후 청

 

 

오후 4시 제 1목적지 정읍에 3일 만에

겨우 도착했다. 대전에서 공주 강경을 거쳐

이리에서 1박 다시 거기서 전주를 거쳐 정읍까지 지루한

자동차 여행이었다. 도중 길이 막히면 대원들은 우산을 들고

우중작업을 하며 지칠 대로 지친 몸을 간신이 가누어

오후 4시경 정읍에 도착했다.

 

드디어 제1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일동은 차내에서 때 묻은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정읍에 들어서면서부터

씩씩한 행진곡을 울리며 들어갔다. 「여기는 공보실에서 파견된

제1이동방송국입니다. 앞으로 10일간 정읍에 정착하여 주파수 1360Kc」

 마이크를 움켜쥔 나는 오랜 나그네 길에 시달린 피곤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힘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가두방송을 하면서 읍내를 일주했다. 정읍군수

홍석모씨의 마중을 받으면서 군청에 들어 지방 인사들과 인사를 교환하고

 읍사무소 광장에 방송차를 정착시켰다. 시간이 늦어 공중선 가설을

하지 못하고 확성기로 서울 방송을 중계 방송했다.

 

 

8월 4일 청

 

 

아침일 찍 전원동원해서 읍사무소

 건물을 이용하여 「안테나」를 가설하고 전파를

 발사 할수 있는 만반 준비를 갖추었다. 오후 3시부터 발전기를

이용하여 시험방송을 실시했다. 인구 4만을 헤아리는 정읍은 앞으로

 시 승격을 바라보고 일로 발전도상에 있는 군청소재지이다. 시청 규모를

갖춘 읍사무소는 신축된 2층 건물로 아담한 벽돌건물이었다. 그리고

신 시장은 건축도중에 있었으며 앞으로 발전 할 여지가 많은

곳이다. 더욱이 이공장의 물이 맑고 어름과 같이 차며

물맛이 좋았다. 어느 곳을 파더라도 맑고 시원한

 물이 솟아나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새암정자, 정읍이라는 것이다.

 

이 고장 주민들의 방송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 것이었으며 라디오 가진 청취자는 언제나

우리방송에 「다이얼」을 맞추었으며 「라디오」가없는 사람은

수백 명씩 연일 밤늦도록 읍사무소 주위와 논두렁 길 바닥에 주저앉아

 우리 방송 차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방송을 즐겨 들었다. 그들에게는

「여기는 주파수 1360Kc로 방송 해 드리는 정읍 이동방송국입니다.」의

콜사인이 서울방송보다 더한층 정겨웠으리라 믿는다. 이곳 정읍의

 전기사정은 극히 불량해서 주로 발전기에 의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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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도 고향초-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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