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방송문예 15년사 1945년부터 1959년까지/ 원로 방송작가 최요안님 유고

이장춘 2013. 2. 4. 23:16

 

 

 

최요안 선생님은 해방 후 정부수립 될 무렵

KBS전속작가로 출발한 이래 6.252전쟁중 KBS가

부산에 가 있던 때 문예계장을 맡아 방송작품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960년대까지 KBS 작가실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그 시절 방송된 제일 많은 글을 쓴 분으로 알려지고 있습

니다. 이 글은 최요안 선생님이 해방될 무렵부터 1959년까지

 15년간 방송문예의 흐름을  1959년 가을 호 방송지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최요안님에 관해서는 아래 영문자를

 클릭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ㅣ.

 

 

최요안 (崔要崔)님과 방송

http://blog.daum.net/jc21th/17780851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우동방송

 

 

방송작가 최요안님이 쓴 방송문예 15년사 1945년부터 1959년까지

 

 

10년 하지만 사회적 변동의 영향이 크므로

 해방부터 사변 전 까지를 한시기로 잡고 사변발발과

 더불어 피난 환도 1, 2년 까지를 제 2기로 잡고 그 후 오늘에

이르는 시기를 제 3기로 나누는 것이 편리하다.

 

 

 

 

제 1기

 

 

해방은 방송 문예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의미로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그

 이전 4, 5년간은 태평양 전쟁 기간이었으나 일제의

전쟁목적에 이미 끌려가기에 바빴고 의욕적인 작품 활동은

거의 볼 수가 없었고 마비된 공백시기로 돌려야한다. 태평양전쟁

이전으로 다시 기어 올라가 보면 한때 n대극 작가들의 활동이

엿보이나 대체로 여기(餘技)정도였고 자작 무대극이나

 외국 작품의 축소판에 그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시기는 말하자면 개척기인 만큼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대체로 그런 형태를

 취했던 것이다. 시간상으로 보더라도 극히 미미했고

작가들의 태도도 방송 문예라는 새로운 장르를 중요시 않았던

것이며 내가 쓰려는 이 「종으로 본 역사」에는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기록적으로 그때 일이 흥미의 대상은

 될 것 같은데 연령상으로 내가 그때 일을 쓸 적임자가 아니며 차라리

그때 편성책임자의 추억담에 맞기는 것이 좋으리라고

믿고 더 이상 건드리지 않겠다.

 

해방 후 방송 문예면은 갑자기 활발해 졌는데

그것은 군정관리 하에 미국 사람들이 미국의 본을 따서

 방송국내에 전속작가 시스템을 만든데 있다. 방송은 소설이나

시와 달라 어느 정도 편성자와 기계와 이 3자가 타협 할 것이 필요하다.

즉 방송이라는 분위기에 몸이 배어야 한다. 이점은 제작과 촬영과 감독과

호흡을 맞춰야하는 영화 시나리오 라이터와 비슷한 점이 있다.

 

이 군정시의 전속작가 시스템 멤버는

김성민, 유호, 김희창, 이익 등이었고 외부에서

작품을 제공한 것은 이서구, 박진, 진우촌, 김내성, 김영수

그리고 말석에 필자가 한 목 끼어 있었다. 김영수씨는 당시 드라마

연출을 보고 있었으나 외부 작가라기보다 준 전속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이밖에도 라이터들이 있었으나 월북했거나 또는 한두 편 남기고 지속하지

않았으므로 구태여 이름을 들지 않겠다. 이상은 모두 라디오 드라마 부문인데

박진, 이서구, 진우촌, 김희창등은 순수한 무대극 작가이고 나머지는 모두 소설을

 쓰던 사람들이 드라마작가로 참여한 것이었다. 한편 낭독, 소설 2부문에는 박계주,

정비석, 정이택, 최영수, 그 박의 중견 작가들의 작품이 방송 되었으나 그들은

대개 경(硬)과 연(軟)을 겸한 작가들이고 염상섭, 김동리, 이무영,

황순원 같은 사람들의 소설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이들

작가의 변을 들어보면 방송소설에 맞춰 쓰기가

 싫거나 혹은 곤란 하다는 것이다.

 

일련의 순수파 소설가들은 「방송소설」에는

 담을 쌓은 것인데 여기에 「방송문예」의 「매스컴」의

 특징이 있다고 본다. 눈으로 새겨보는 소설이 아니고 귀로 듣는 작품을

요구 했던 것인데, 이에 융화 할 수 있는 작가가 있고 융화 못하는 작가가

있었다고 하면 그만이겠으며 한편 생각하면 외국에서는 순수작가들도 방송에

많이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 방송 문예를 대중문화의 방편으로 모라 넣는 것은

 타당치 않고 「장콕토」의 작품이 방송되어 파리의 라디오 팬들의 귀를

즐겁게 한 것으로 보자. 방송문예의 폭은 대중선과 순수성에

 두 다리를 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융화성이 적은 작가에게

일반의 책임이 있는 반면 순수성의 도입에 편견을

 갖는 편성면에도 일반의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각설(却說). 문예 편성면에서 보면 희극, 세계명작, 그리고 일반방송국

 세 가지 장르가 있었는데 방송극에 특히 힘을 드린 느낌이 있었다. 정치적

으로 불안정하고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과도적 혼란기에 처해 있었으므로

너무도 웃음이 고갈된 시기였다. 김희창은 정수동 봉이 김선달 등, 우리나라

 소담(笑談)을 많이 극화했고 김화랑의 이름으로 악극대본에 관록 있는

이익도 소극을 연발했고 동양극장의 물을 먹은 유호도

재치 있는 유모어극을 많이 쓰고 있었다.

 

필자도 희극에는 자신이 없었으나

사회생활을 풍자한 「12난 봇다리」라는 짤막한

 희극을 쓴 일이 있다. 「세계명작」은 일본서 간행된

세계희곡 전집에서 두드러진 것을 1막이고 다막이고 간에 뽑아서

 30분으로 다이제스트해서 보낸 것으로 전기한 작가들이 돌려가며 집필

하고 있었다. 일반 드라마 프로에 있어서는 사극이 절반의 패스를 차지하였고

이에 많이 활약한 것은 진우촌이었다. (주 : 우촌은 해방 후 「두뇌수술」이란

 3막 희곡을 무대에 올려 크게 호평을 받은바 있는 극작가인데 6.25

사변 때 병사 혹은 폭사한 걸로 인정된다)

 

연극계에는 유호, 이익, 김희창, 김성민,

김영수 등 모두 23편의 가편(佳篇)이 있는 걸로 기억하건만

각 필자에게 물어도 거의 그 제목과 방송된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지

않다.  필자의 기억에 의하면 김영수 씨에게는 한국 사람의 미국사람에 대한

의타심을 재치 있게 풍자한 「돼지」라는 작품이 좋았고 이익씨는 늘 넌샌스 극을

 다루던 솜씨와는 달리 대학을 졸업한 인테리 가정과 국민교 밖에 졸업 못한 가정을

대조하여 행복이라는 문제를 취급한 작품이 있었는데 아담히 꾸며진 맛이 아직도

인상에 남아있다. 필자는 그리 많이 쓰지 않았으므로 기억나는 몇몇 작품이

있는데 후에 연속극으로 발표한 아담히 꾸며진 작품이 아직도 인상에

남아있다. 후에 연속극으로 발표한 「느티나무 있는 언덕」을

30분짜리로 발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세계 명작」푸로에고 함대훈씨가

누구의 작품인가를 하나 각색한 것이 있었는데

연출은 김영수씨였는데 필자가 듣고 도무지 이야기의

 줄거리를 잡을 수 없었던 적이 있다.김희창씨에게 그 말을 했더니

 시인한 일이 있었다.전속작가 시스템에서 자온 작품은 비교적 큰 실패작은

없었는데 어쩌다 쓴 작가에게는 이런 예가 많았던 모양 같았다. 이당시 청취자

 인기를 끌고 오늘날까지 그 인상을 남긴 작품은 「똘똘이의 모험」과 「목단등기-

牧丹燈記」두개의 연속극을 들어야 한다. 「똘똘이의 모험」은 어린이 시간에

 방송된 동극으로서 시초는 미국 고문이 미국 동요를 번역한 것이었다. 그것을

나중에 한국의 실생활을 무대로 얘기 줄거리를 발전시킨 것이며 

집필자는 고 김래성, 김영수, 홍은순, 유호 등이었다.

 

얘기 줄거리는 반드시 전반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 아니고 똘똘이와 그 주변의 중요인물을

중심으로 각자가 그때그때 독립적인 스토리를 전개해 간 형식

이었는데 말하자면 연작 릴레이 극의 시초라고 하겠다.

 

「목단등기-牧丹燈記」는 중국의

고대 괴기 소설집 전등신화(剪燈神話) 중의

한 작품인 동명의 소설을 박진 씨가 3회에 걸쳐 극화하며

무더운 여름밤을 택하여 메일 방송된 것으로 생전에 사랑을 못 이루고

 죽은 유령의 처녀와 한 총각이 사랑하게 된 이야기인데 유령의 등장이 오싹 오싹

소름이 끼쳐 남양 프로로서는 히트였다. 이극을 듣고 무서워 밖을 못나가겠다는 에피

소드도 있었다. (필자 주 : 목단등기는 역시 박진의 붓으로 해방 전에도 방송된 바가

 있었으나 각색, 연기, 연출부문에 있어서 이 무렵의 것이 훨씬 우수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좀 알로 쳐지지만 김희창씨의 사극 대원군( 김경원씨의 소설을

각색) 이 10여회의 연속으로 매주 한 번씩 나간 것도 많은 청취율을 가

졌음을 얘기 해 두고 싶다.그리고 낭독소설 부문에 있어서

「유모어 소설」이 등장한것도 이 무렵이었다.

 

  

아래로 계속 이어집니다.

 

 

 

 

 

 

 

 

 

제 3기

환도 후 4년 기간에 작품을 많이 쓴 순서로

이름을 적는다면 최요안, 이석정, 조남사, 김성민, 유호,

장수철, 박흥민, 한운사, 박화목 등이라 하겠다. 필자 자신의

얘기를 자꾸 쓰기는 안됐으나 수년간 계속한 유모어극장의 약 80%는

日草의 필명으로 필자가 쓴 것을 적어두지 않을 수 없다. 그 기간에 사극에는

이석정씨가 솔거 황진이등의 가편을 썼고 인기프로인생역마차는전기한 여러

작가들을 비롯하여 박순녀, 김자림 두여류작가가 많이 집필했다. 이 무렵에

기독교방송국이 생기어 그쪽에서 발판을 얻은 신인작가들이

배출했는데 이경재씨는 “인생 역마차” 집필의

한사람으로서 대열에 서게 되었다.

 

 

아래로 계속 이어집니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최요안 (崔要崔)님과 방송 

http://blog.daum.net/jc21th/17780851

 

 

 

 

 

차홍련 아주가리 선창-1.wma

 

차홍련 아주가리 선창-1.wma
1.4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