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영화시대 최고의 변사라고 일컬어 졌던 김영환과 황성옛터로 널리 알려진 이애리수, 그리고 1930년대 전후 방송극과 연극, 영화, 노래로 이름을 떨친 강석연이 재미있는 만담과 그 막간을 잇는 노래와 함께 김영환의 변사 실연을 듣고 계십니다.
변사 김영환과 영화 낙화유수, 가수 이애리수, 강석연의 만담과 막간노래
이 땅에 활동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영화가 들어와 “농중조”를 시작으로 무성영화가 상영된 이래 그 무성영화에서는 변사가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 변사는 여러명의 출연영화의 음성과 해설을 들려주며 영화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배우보다 더 있기있는 직업으로 자라잡았고 한 영화에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두 사람이상 몇 사람이 함께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948년 검사와 여선생을 마지막으로 무성영화에서 변사의 목소리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필자는 1950년대까지 시골 극장에서 그 변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영화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간에 수많은 변사가 있었지만 김영환은 널리 알려진 변사였고 작가이자, 노래 작사, 작곡 등에도 능해서 당시 영화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돈도 많이 벌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김영환이 자기 스스로의 처지를 쓴 작품이 활동사진으로 촬영되고 변사를 맡았으며 스스로 작사하고 작곡한 노래가 그 활동사진이 상영되면서 이정숙의노래로 불려 졌습니다. 그 노래가 “낙화유수” 주제곡이고 김연실, 신카나리아등 그 시대 최고의 가수들이 불러 오늘날까지도 전해오는“강남달”입니 다. 남인수가 부른 낙화유수는 다른 노래입니다.
최초의 영화배우 복혜숙 주연으로 1926년에 상영된 “농중조”에 이어 1927년 단성사에서 상영된 낙화유수는 김영환이 자기 어머니와 자기에 관한 얘기를 시나리오로 쓴 것으로 이구영 감독, 복혜숙, 정암, 이원영이 주연을 맡아 상영되었습니다. 김영환의 어머니(기생 : 복혜숙)는 아름다운 미모였지만 생활이 어려워 마침내 경상도 진주 기생으로 팔려갔습니다. 기모는 복혜숙을 돈 있는 부자에게 시집보내려 했지만 화가(주인공 정암)와의 사이에 마음이 맞아 김영환을 낳았습니다. 부자 집으로 시집보내려는 기모의 행동에 오해를 낳은 화가 정암(김영환의 아버지 역)은 떠나가고 어머니(기생 : 복혜숙)는 정신이상이 되어 남강에 빠져 생을 마감합니다. 김영환은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 문필가로 연예인으로 대성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영와골자입니다.
이토록 젊은 시절 부와 명예를 한 몸에 않았던 김영환은 아편중독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비참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해방 후 복혜숙이 충무로 길가에서 구두닦이 하는 모습을 보고 용돈을 주고 왔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복혜숙은 한강물 (남강대신)에 빠져 숨지는 장면을 찍다가 몸살이 걸려 고생했다고 했습니다. 이때 노래를 부른 이정숙은 이구영감독의 여동생으로 중앙보육학원에서 홍난파로부터 음악공부를 하면서 동요를 부르던 학생이었지만 마땅히 영화 주제가를 부를 가수가 없던 때라 무대 앞에 서서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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