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2월 16일은 우리나라 방송이 시작 된지 30주년이 되는 날 이었습니다. 그 무렵 새로 발간된 방송지에 실으려고 방송초기에 방송을 하셨던 분들을 모시고 특집 좌담회를 가졌습니다. 1924년 조선일보 시험방송에서 방송전파에 음성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기자 최은희, 경성방송국에 근무했고 최초의 TV방송국 HLKZ를 창설한 황태영 우리말 방송을 시작하면서 1932년에 선발된 김문경, 이혜구, 이하윤, 농구중계방송을 최초로 실시한 아나운서 이현, 우리나라 방송사상 최초의 보도실장 이덕근, 1957년 당시 방송관리국장 이규일, 방송관리과장 송영호님이 연사로 출연했고 당시 방송관리국 지도계장 노정팔님이 사회를 보았 습니다. 1957년 2월호 방송지에 실린 내용으로 초기방송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되어 전문을올렸습니다. 장소는 방송관국장실이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한국방송 30년 특집좌담회 1957년, 최은희, 김문경, 이혜구, 이하윤, 황태영 등
이(이규일) 관리국장 : 오늘 옛 방송에 역사(役事)하였던 여러 선배님을 모시게 된 것은 일제하에서 우리의 여러 가지 경험담을 본국에서 발행 하는 방송지에 소개하려고 함에 있는 것입니다. 좋은 말씀을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송(송영호)관리과장 : 여기에 모이신분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먼저 방송을 하신 최은희 여사를 비롯해서 초대 여자 아나운서였던 김문경여사와 20년 전에 방송에 종사하셨던 선배들로서 일제하에서 우리나라 방송의 토대를 닦아놓은 우리나라 방송의 공로자라 일컬을 수 있는 여러분인줄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재미 스러운 말씀을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사회(노정팔) : 10년이면 산천도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아득하게 30년 전 얘기를 듣고자 하는 것은 오는 2월 16일로 우리나라에서 방송을 개시한 30주년 기념일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먼저 마이크 앞에 스셔서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하신 최은희 선생님의 당시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최은희(崔恩喜) : 글쎄요, 하도 오래된 일이라 생각이 잘 안 납니다만 우리나라에서 방송국 설치허가가 난 것은 4259년 (주: 1926년) 11월 30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 보다도 만 1년 전인 4258년도에 조선일보사에서 독자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독자위안으로 무선전신 방송공개시험을 실시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첫 방송을 하게 된 것이지요. 사회 : 그럼 최 선생님께서는 당시 조선일보에 근무하시던 때셨나요?
최은희 : 네 기자생활을 할 떼지요. 그런데 당시 조선일보사 청사가 그때 수표정평 기와집이었는데요. 사장으로는 이상재 선생이 계셨고요. 당시에는 라디오라는 말은 없었지요. 이 공개방송시험을 지금 소공동인 장곡천정 공회당과 우미 관에서 청중을 모아놓고 내가 사회를 하게 됐지요.
사회 : 그때 그것을 들르려고 얼마나 사람이 모였었습니까?
최은희 :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지요. 인천, 기성, 수원 등지에서 퍽 많이 올라왔으니까요. 개산(槪算)으로 3,000명이나 됐었지요. 사회 : 아무튼 최 선생님의 음성이 우리나라에서는 제일먼저 전파를 탄 샘이군요. 이혜구선생님께서도 무슨 재미 스러운 말씀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이혜구 : 뭐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방송국 안테나를 퍽 무서워했습니다.(一同笑聲)
사회 : 왜요.
이혜구 : 비가 오든지 천둥이 나면 벼락이 내린다고 겁들을 냈었지요.(一同笑聲)
사회 : 당시 방송시설 이라던가 프로面은 어떠셨는지요?
최은희 : 위생 강연이 많았다고 기억되는 데요.
이혜구 : 일본어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우리말 방송은 중간 중간 방송을 했었지요. 그러나 우리민요도 있었고 들을만한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최 선생께서는 그 당시의 수신기 가격을 기억하고 계신지요?
최은희 : 비싼 샘이었지요. 그때 돈으로 10원내지 15원이면 혼자서 들을 수밖에 없어요. 소리가 적어서, 100여원이면 한 가정에서 들을 수 있었지요. 500원부터 천원까지 값이 나가는 것이 있었지요. 이런 것은 지금의 확성기 식으로 수천 명도 들을 수 있었다고 기억되는데요. 라디오 값이 한참 내리기는 1940년경이지요. 방송국에서 대량 수입해서 외교원을 내 보내서 월부로 사 놓도록 일반에게 판매방법을 썼었지요. 그런데 우스운 얘기는 청취자가 방송을 듣다가 재미있는 프로를 다시 한 번 더 듣고 싶으면 방송국으로 전화를 해서 지금 방송 한 것을 다시 한 번 들려달라고 부탁을 하는 일도 있었지요. (一同笑聲)
사회 : 그럼 방송국에서는 어떠한 반응이 있습니까? 청취자의 요구를 들어 줍니까?
이혜구 : 그럼은요. 들어주지요. 마치 극장 같은데서 가수가 노래를 부르다가 손님들에게 재청을 받아가지고 다시 노래를 부르는 수가 있잖아요. 그런 식이죠.(一同笑聲) 아무튼 또 한 가지는 방송국측서도 대단했지요. 방송을 하다말고 5분, 10분씩 청취자들에게 기다려 달라는 청은 보통이었으 니까요.(笑聲) 일종에 막간형식같이…….
사회 : 아무튼 재미있군요. 그때는 중계방송 같은 것은 없었나요?
황태영 : 있었지요. 일본 동경방송을 중계했었지요. 이 관리국장 : 중계소가 지금 주안이었고. 주안서 서울로 연결시켰지요.
사회 : 기술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애로가 많았을 텐데요. 황 선생님은 언제 방송국에 계셨었지요.
황태영 : 그러니까 내가 방송국에 들어간 것이 1929년도이었으니까 27, 8년 전이지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일반은 무선지식에 대해서 전혀 무식한 편이었지요. 내가 학생시절에 광석 수신기를 만들어 가지고 시골집에 방학 기를 당해서 그것을 가지고 내려갔더니 동리 사람들은 물론 이러니 와 近東에서도 그 광석 수신기를 보러 수백 명이 집으로 몰려와서 신기 하다고 별의 별 소리를 다 하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여러사람이 방송을 듣고 있던 중 동경에서 중계방송을 하는 프로였는데 시간 고시가 있어서 아나운서 멘트로 지금 9시 15분입니다. 하니까 듣고 있던 사람들이 동경에서 지금 9시 15분을 알렸는데 동경에서 여기까지는 수 천 리 인데 동경서 몇 시간 만에 저 소리가 날아오느냐. 고. 묻지 않겠어요?(一同笑聲)
사회 : 전파의 속도를 물어보는군요.
황태영 : 그렇지요. 그때 동경서 지금 9시 15분 정시에 알리는 것을 우리가 지금 그 시간에 듣고 있는 것이라고 말은 해도 곧이듣는 사람이 별러 없었어요.
사회 : 그렇겠지요.
광석기 안에 사람이 들어 있다고 해도 곧이들었을 텐데요.(一同笑聲) 그때 동경은 몇 Kw방송을 했었습니까?
황태영 : 동경방송이 10Kw방송을 했었고 우리방송이 10Kw방송을 한 것은 그 후죠. 이 관리국장 : 그렇죠. 서울방송이 10Kw로 되기는 4266년도였고 50Kw로 된 것이 지나 사변 때였으니까 4270년도구요.
사회 : 당시에 기계시설이라든가. 調整같은것은 어떠셨습니까?
이 관리국장 : 지금 기계는 잘 정돈시설이 돼서 차려 놨지만 그때는 그냥 그대로 늘어놓고 시설 같은 게 말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한 가지 우스운 얘기는 조정원이 스위치를 잘 못 다루면 진공관이 펑 하고 튀어 다나나고 해서 소동이 가끔 났었지요. (一同笑聲)
사회 : 그거 큰일이게요. 진공관이 튀어 나간다면 당시 여자 아나운서로 계셨던 김문경 선생이 대단한 인기를 끄셨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는데요.
황태영 : 대단 하셨지요. 어디 지금 그런“모던 걸”이 있습니까? (笑聲) 이혜구 : 김문경 여사는 그때 울기를 잘 했지요.(笑聲)
이하윤 : 사실 그때 김문경 여사는 얼굴이 고왔지요.(笑聲) 그런데 만당이 아나운서로 있을 때 “실례 했습니다”라는 말은 제일 많이 썼지요. (笑聲) 김문경 여사가 여기 계시지만 그때 학교를 갓 졸업하고 방송국에 오셨을 때는 모두들 다시 한 번 쳐다 보았지요.(笑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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