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호님은 1939년 아나운서로 JODK 경성방송국에 들어와 근무하던 중 평양방송국으로 옮겼다가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이 있은 후 경성 중앙방송국에서 편성원으로 근무했습니다. 해방 후 편성과에서 새로운 방송의 틀을 확립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고 곧이어 연출과장으로 있을 때 6개월간의 미국 유학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6.25 피난방송국 방송과장을 했던 님은 휴전 후 이리방송국장, 중앙방송국 방송과장, 출판과장 등을 역임했으며 4.19와 더불어 방송관리장으로 부임했다가 5.16과 함께 방송계에서 물러나셨습니다.
해방 전 후 그리고 1961년 5.16이 일어나기까지 방송사정을 가장 잘 아시는 인물이기도해서 님이 쓴 글은 바로 이 나라 방송사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네 편의 글을 써서 방송지에 게재 되었 습니다. 이 글은 1956년 11월과 12월 방송지에 있는 두 편의 글을 옮긴 것입니다. 남은 두편도 확인되는대로 올리겠 습니다. 영문자를 클릭 하시면 송영호님에 관한 글을 더 보실 수 있습니다.
현대적인 방송의 틀을 확립한 송영호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700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송영호님이 쓴 해방 전후의 방송 이면사
편집자의 청탁이 이면사였으므로 그대로 제호를 부치기로 했으나 차라리 종횡담 (縱橫담)으로 알고 읽어주기 바란다. 늘 생각이 내가 방송국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계속한 자가 없고 (주로 방송 면에서) 모두 중간에 작고하고 혹은 사고로 혹은 개인사정으로 그만둔 관계로 언제나 그 간에 번번이 바뀐 동료 선배들의 동향과 여러 가지 발전한 모습을 잘 기록해 발표 해 보자고 벼르기만 하던 차에 이번에 갑자기 여기에 관한 집필 요청이 있어 확실한 자료를 조사 할 겨를도 없이 대충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기로 하고 자세하고 정확한 것은 다음기회로 밀겠다.
해방 전후
해방직전 소위 조선방송협회의 방송부면을 담당한 기구는 경성방송국(호출부호 JODK)이었고 그 속에서도 기획부, 제1방송부(일어), 제2방송부(조선어), 기술부였다. 부장, 과장은 거의 일인이었고 제2방송부의 방송과장과 기획과장만이 한인이었다. 방송과장은 후에 방송국장직을 맡게 된 만당 이혜구였고 기획과장은 후에 방송협회장으로 한국방송망을 통솔하던 종곡 이정섭씨였다. ( 이분은 6.25사변 후 이북으로 납치되어 그 생사미지)제2방송부 방송과에 편성, 방송의 양계가 있었으니 편성에 안서 김억, 청천 김진섭, 영운 모윤숙, 전동익, 윤준섭, 임병현 그리고 필자였고 방송에는 이계원, 민재호, 윤길구, 이덕근, 조동훈( 현동화통신 보도국장)문제안, 전인국, 윤용로, 이지구(李之求-현 공주사대 교수) 조진호, 홍준, 호기수(VOA 여 아나운서로 다년간 활약 하다가 현재 미국에서 가정생활) 등등 제씨, 기획과에는 이정섭과장 밑에 한인이라고는 전에 아나운서로 알려졌던 남정준씨 한분이었다.
일제말엽의 한인에 대한 일인의 탄압과 멸시는 극도에 달했고 더욱이 문화인에 대하여는 일일이 그 언행을 감시 조사 하였으니 현 방송국 직원에게야 더 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단파로 또는 선배 짐병 지사에 가서 은밀히 일본의 패망을 들어왔고 또한 미구에 손을 들 것이라는 것을 듣고 반신반의 하면서도 어서 빨리 그날이 오기를 막연한 가운데 기다렸다. 그런데 8월 14일 수상한 분위기 속에서 한 장의 회람공문이 내 책상에 돌아왔다. 내일 정오에 일본천왕의 중계방송이 있을 예정이니 대기하고 경청하라는 상부의 지시였다.
일인 주시리. 에 함부로 입을 놀릴 수도 없고 한인들은 제각기 제 생각대로 무엇인가를 판단 했으리라. 그날 퇴근 후 우리 편성의 젊은 패들은 김진섭 씨와 함께 단골집에 모여 내일에 있을 일본 천황의 방송에 대하여 여러 가지 예측하고 희망을 얘기하며 얻어 마시기 힘든 배급 약주에 취기와 흥분을 느끼며 집에 돌아갔다. 익 8월 15일 아침부터 기다려지는 정각 12시는 왔다. 지금은 없어진 정동고개 마루턱에 우뚝 선 방송국 현관에 들어서 오른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소위 방송부장 겸 제1 제2 방송과실에 부 직원 전원이 모인가운데 난생 처음 들어보는 「히로히토」의 떨리는 목소리가 극히 불량한 수신 상태가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어귀 마디마디는 잘 들리지 않아 잘 모르겠으나 전체의 뜻으로는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다는 뜻임에는 틀림없었다. 실내 모니터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서 근청하고 있던 일인직원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리며 소리 내어 우는 자도 있고 절망의 긴 한숨과 더불어 창백한 얼굴을 서로N쳐다보며 눈치를 보기도 했다. 그 꼴이란 측은하기도 하면서도 어찌나 통쾌한지 그 자리에서 소리 높여 만세 라도 부르고 싶은 흥분을 억제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었으리라. 말없이 걸상에 돌아가 앉은 일인직원들은 책상에 엎디어 엉엉 울고 일인 여직원들은 퉁퉁 분 눈으로 훌쩍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우리 한인들의 꼴은 어떠했나? 속으로 통쾌하고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그놈들 앞에서 서로 침통한 얼굴을 가장하고 서로 눈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고 지금도 그때 그 친구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사실 그때 그 지리에서 일인들에게 무어라고 발을 붙이자니 쑥스럽고 그렇다고 잠자코 있자니 계면쩍고 우리 끼리 얘기 하자니 그놈들의 비위를 건드려 욕이라도 먹을까. 두렵고 해서 태도를 어떻게 가져야 좋을지를 몰랐다.
하나씩 둘씩 흩어져서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일인끼리 모여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피가 다르고 말이 다른 이 민족 간에는 절대로 섞이지 않는 법이다. 벌써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크고 높은 장벽이 가로 놓인 것이다. 그 시간 이후 우리는 일제의 소위 성전완수를 모토로 한 전반적인 프로를 폐기하는 무슨 방안이 설 때까지 사용할 양등판 레코드를 대충 골라 방송과에 맡기고 내일에 대비하기 위하여 또는 꼴 보기 싫은 일본 직원들을 피하기 위하여 모두 밖으로 나와 근처 단골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숙의를 했다. 당분간 뉴스와 레코드음악을 계속 할 것으로 하고 일단 해어졌다. 그동안 흥분과 감격에서 꿈같은 엄연한 사실 앞에 암읍한자 어찌 필자뿐이었으랴.
이튿날 8월 16일 아침 이제까지 영문 모르고 어리벙벙했던 시민대중은 오늘 아침부터 모든 것을 이해한 듯 만세성과 혼란과 소음으로 거리는 들끓었다. 어느새 보기도 낮 설은 그러나 얼마나 그리웠던 태극기가 여기저기 번득인다. 교통은 완전히 마비되어 어디를 가나 도보다. 동대문 밖에서 정동까지 걸어서 약 50분 피로를 모르고 방송국에 들어서니 휴일과 같은 분위기 속에 일인직원은 보이지 않으며 동료들이 웅성대고 있다.
우선 편성, 방송 동지들을 규합하여 간략한 부서를 정하고 전에 소위 방공연습에 쓰던 유물인 완장을 이용하여 뒤집어서 임시로 방송 자위대란 먹 글씨를 써서 번호를 먹여 각 직원들의 팔에 끼워주고 방화 봉으로 쓰던 갈쿠리 붙은 작대기를 들려 현관과 방송국 정문 앞에 교대제로 서게 했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별로 할 일도 없고 또한 밖의 사정이 궁금해서 제각기 완장한 팔을 뒤 흔들며 출입이 빈번하다. 각종 삐라를 또는 유인물을 얻어가지고 들어와서는 흥분으로 홍조된 얼굴들이 서로 침독하며 환성을 지르곤 한다. 이젠 완전히 우리들의 세상이고 제마다 방송국의 주인이다. 그 환경에서는 모두 국장이고 부장이고 과장인 것이다. 젊은 축들이 모여 너는 무슨 과장, 너는 무슨 과장 하고 제법 농이 그럴듯하다. 일인들은 꼴사납다는 듯 한방에 모여 절망적인 그러나 독기어린 얼굴로 할 일없이 부산히 왔다 갔다 떠들어 대는 우리를 노려보곤 했다.
방송과에서는 아나운서들이 취재활동을 개시했다. 당시 다만 통신에만 의존했던 것인데 사태가 이러고 보니 자연 아나운서들이 자진 취재활동을 개시하게 된 것이며 따라서 방송기자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미 선진 외국에서는 방송국 자체가 기자를 두고 눈부신 활동을 한다는 것을 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이제 벌써 결성된 건국 준비위원회에 소위 급조 방송기자들이 쇄도했고 무질서와 혼란을 극한 건국 준비위원회에서는 별신통한 재료가 나오지 않았다.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이날의 중요한 방송 뉴스는 휘문교정에서 있었던 여운형의 원등(조선 총독부 정무총감) 과의 회견 경과보고 취재 방송이었고 오후에 있었던 안재홍씨의 방송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안재홍 씨의 방송이야 말로 전국동포에게 다시없는 감격적인 방송이었다. 일인의 구속에서 벗어난 해방직후의 한인의 제일성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그 경위를 소개한다. 건준 에서 전화연락으로 지금 안재홍 씨가 방송을 하러 온다는 것이다. 일인들과의 공기가 험악한 때이고 중요한 방송은 일인 책임자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소위 국장실에서는 판원(板垣) 군 사령관 이하 일인 간부들이 모여 무엇 인지 학수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연락전화를 받은 필자는 약간 떨리기는 했으나 용기백배 국장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섰다. 그들은 일제히 살기 띤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다.
이제까지도 그들은 부쬬-니 과쪼-니 하며 안면으로 모두 숙친한 자들었다. 급히 간단히 그 뜻을 전하니 그자들은 내 뱉듯이 “맘대로 하라”대성 일갈이다. 나의 보고가 그자들 기분에 얼마나 분하고 불쾌했으랴 싶은 것은 그 후의 내 생각이다. 뒤도 안돌아보고 그 방을 빠져나온 나는 진땀을 흘렸다. 어느 때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지금 생각나지 않으나 그때에는 방송국 전후좌우에 무장한 일본군이 삼엄한 눈초리로 한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조금 후에 한재홍씨가 나타나 그대로 2층 방송실로 안내되어 「해내 해외에 계시는 3천만 동포 여러분」을 서두로 우리의 해방을 고하는 첫 방송은 3천리 방방곡곡은 물론 전 세계 동포에게 전파되었다. 이 방송의 소개는 이계원아나운서가 담당했다.
일인의 노성일갈에 혼도 났지만 그 방송이 어찌도 통쾌하고 감격적이었던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 기억에 삭막하지만 그 일만은 일생을 두고 잊지 못 할 쾌사다. 건준 얘기가 났으니 그날 건준 사무실 실태를 생각나는 대로 잠간 적어본다. 사무실의 위치는 지금 계동 휘문학교 운동장 담이 길게 뻗쳐 그 끝나는 지점쯤 담 건너편이 연록 색으로 단장된 2층 양옥 문화주택이다. 제법 크고 넓고 깨끗한 집이다.
그 근방에는 몽양 여운형 댁이 있다. 이집이 바로 우리 동료 임병현군의 주택이었다. 어째서 이 건물이 선택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대문을 들어서니 건장한 청년들이ㅣ 수백 명 들끓는 속에 어쩌다가 여운형의 얼굴이 보인다. 마치 무슨 잔치 집 같다. 가까운 지방 각처에서 동지 정객들이 모인다. 완장, 곤봉, 각종표치, 유인물 등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란과 흥분의 도가니다. 부서는 누구 주군지 모를 지경에 저마다 명령이다. 여기 모인 사람은 당장에 장관이요 국장이요 과장이 된 것으로 자처한다. 독립은 완전히 된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은 무리도 아니었다. 정치훈련이나 정치적이나 이런 것을 당해 본 경험이 없는 지식층 청년들에게는 그대로 해방을 독립으로 안 것쯤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동료 임병현군도 물론 이날부터 방송국을 자진사퇴다.우리들도 임군은 미구에 무엇이 된다고 생각했다. 벌써부터 그의 뒤를 쫓는 패가 새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방송뉴스의 재료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이곳을 빼고는 별로 없다. 동맹통신은 재빨리 우리말로 진행되어 역시 이것을 취택 했으나 신문기자들이 도리어 우리들에게 취재를 하러왔다. 동료 모윤숙 여사도 이날이후 방송국과는 인연을 끊은 인사 중의 하나다. 통신과 신문이 간행되기 전의 공백기에 있어 오직 방송만이 그 활동에 충실했으니 당시의 문재안, 조동훈 양기자의 눈부신 활약은 기리 사계에서 찬양해야 할 것이다.
차차 국내의 질서가 잡히며 조선방송협회가 기구를 개편하여 협회장에 이정섭씨가 되고 경성중앙 방송국의 국장으로 이혜구씨, 사무부장에 김억씨, 편성부장에 김진섭씨, 방송부장에 이계원씨가 각각 취임하였다. 9월 15일 미군이 방송국을 접수 할 때 까지 사이에는 시내에 유명, 무명의 대소정당이 우후죽순격으로 난립했고 그 많은 정당들이 저마다 방송국을 접수 한다고 몇 군데서 찾아왔다. 국장 이혜구씨는 이를 막아내는데 큰 구실을 했다. 우리는 불편부당을 목표로 하고 정당한 정부기관이 설 때까지 우리가 잘 보관 하였다가 고스란히 넘기는 것만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이다.
밑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헌법을 제정 공포하던날 국회의장 이승만 박사가 방송을 통해 헌법을 공포 하던 그 역사의 현장을 담은 사진으로 왼쪽 분은 홍양명 중앙방송국장, 뒷분은 송영호 편성과장 그리고 오른쪽 분은 이정섭 조선방송협회 회장이다. (이정섭은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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