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단상

담양장터, 1950년대 대바구니, 참빗 대나무의 추억,

이장춘 2012. 11. 3. 22:38

 

 

벌써 60년이 더 지난 옛 이야기다.

대바구니와 참빗이 주요 생활용품으로

사용되던 그때의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위

사진은 1952년 쯤으로 추정되는 방송계에서는

다 아는 윤길구 선생님이 담양장터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옆의 어린 아이는 1960년대 KBS

탤런트로 연기를 한 고 윤형일이다.

 

 

 

 

담양장터, 1950년대 대바구니, 참빗 대나무의 추억,

 

 

1950년 늦가을부터 1951년 초 여름까지

담양 친척집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담양읍애서 2Km 쯤 

떨어진 "구름다리"라는 자그마한 마을이었는데 온 마을이 일 년 내내

 대바구니 참빗을 만들어 담양장날 팔아서 돈을 만들어 생활했다. 그 마을뿐만

아니라 담양군내 마을마다 대나무와 함께 살아갔다. 이상하게도 그 일은 담양

에서만 했다. 담양 경계를 넘어 순창, 장성, 곡성에 이르면 대나무와는 거리가

 멀다. 용면에서는 죽세공을 해도 경계를 넘어 복흥에서는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담양 금성에서는 그 일을 해도 옆 마을 순창 금과에서는

하지 않았다. 전국 유일하게 담양에서만 그 죽물을

 만들었다. 온 가족이 그 일에 메어 달린다.

 

대나무를 자르는 일, 속대와 겉대를

 갈라내는 일,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는 일, 가족마다

각자의 역할을 맡아서 쉴 새 없이 일한다. 그래서 담양 사람

들은 농한기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도 별로 없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죽물은 2일, 7일에 서는 담양장날 팔러나간다. 작은

시골길은 소쿠리, 석작, 참빗 등 죽물을 이고 진 마을 사람들로 줄을 잇고

 이렇게 모여든 담양장날은 담양川 제방을 중심으로 그 넓은 담양천과 장터가

대바구니, 참빗, 대나무로 가득 찬다. 전국에서 죽물을 사러 오는 사람들로

붐비고 많은 양의 죽물들이 우마차에 실려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또 아낙네들이 수십 개, 수백 개의 소쿠리를 둥지로

만들어 등에지고 팔러나간다.

 

 장사꾼들의 행 열이 장날 오후부터 다음날까지

이어진다. 담양사람들이 “밀 너머” 라고 부르는 밀재 너며

복흥을 지나는 아낙네들의 행 열은 볼만했다. 자동차로 다니기

어려웠던 시절, 이들은 걸어서 밀 재와 가을 재를 넘어 정읍, 김제, 전주 

멀리는 충청도까지 돌며 소쿠리와 참빗을 판다. 짧게는 5일정도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길게는 열흘에서 한 달도 더 걸라눈 경우도 있었다. 인심 좋을 때라 밥은

돌아다니다가 밥 때가 되면 집 주인과 한술씩 같이 나눈다. 잠도 그런 식으로

 잔다. 특별히 신세를 지는 경우 소쿠리 값을 할인해 주기도 한다. 걸어서

다니니 교통비 안들이고, 밥값이 안 들어 죽물을 팔아서 남는 돈은

 고스란히 소득으로 남는다. 그래서 담양 부근사람들은 소쿠리,

참빗을 팔러 다니는 아낙네들이 많았다.

 

천변에 써인 대나무는 소쿠리, 참빗을

만드는 사람들이 사 가기도 하지만 농악대 깃발을

 만드는 데도 쓰이고 감을 따는 도구로도 쓰이고 가느다란

 대나무는 낚싯대로도 쓰이고, 상여를 만드는데도 쓰이는 등 그 용도는

 다양했다. 농악을 할 때가 되면 전주나 논산등지에서 청장년들이 새벽밥을

 먹고 바쁜 걸음으로 이곳에 와서 대나무를 구해갔다. 집 뒤뜰에는 대나무가 있는

집들이 많았고 때로는 수천 평 되는 대나무 밭도 있었다. 지름 10Cm 내외에

 높이 수 십M나 되는 대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3년마다 한 번씩

속아서 죽물을 만든다. “대나무가 1년에 몇 마디씩 자라느냐.”는

 중학교 구두 시험문제가 등장하기도 하던 시절에 담양사람

들은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 며 웃었다.

  

1970년대부터 플라스틱 바구니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죽물은 뒷전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1980년대까지는 담양의 죽물시장이 그런대로 명맥을 이어갔다.

아래 사진은 필자가 1980년대 초 담양 죽물시장을 지나다가 어린

아이들 사진을 촬영했던 것인데 앨범을 보니 나왔다. 그때의 죽물

시장을 떠올리는 추억의 사진이다. 지금은 그 마저도 사라지고

 대나무 밭도 찾아보기 힘들다. 죽록원 등 박물관 형태로나

 희귀한 가구 등으로 파는 죽물, 또는 악새사리가 있고

 식당에서 파는 대통밥 등이 있을 뿐이다.

  

참빗 얘기를 곁들인다.

담양사람들은 참빗을 챔빗이라고 했다.

 그 지방에서는 “ㅏ”를 “ㅐ”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아서

 담양을 대몽이라고 불렀다. 충청도 강경은 갱경이다. 참빗은

머리를 곱게 빗는 도구로도 사용되었지만 6.25 무렵에는 주로 머리의

 “이”와 “서캐”를 가려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는 몸에도 있었지만 머리에도

많아서 잡아내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지금은 웃기는 얘기로 되었지만 이를 박멸

하기에 심지어 DDT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이와 서캐를 참빗으로 가려내면

효과적이어서 그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다. 어린 시절이라 그 만드는 법을

익히지 못했는데 겉대를 아주 가늘게 쪼개어 실로 엮어서 만들었다.

 어찌 그리도 세심하게 만들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방법을 잘 보아 두었으면 생각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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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고향 순창 복흥을 말한다. 산태극, 수태극의 명당 / 이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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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내장, 전봉준 공원을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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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50년대 방송의 별이라고

 불렸던 윤길구님의 손주 윤병주님이 아버지

윤남일(남원)님의 유품 사진을 정리하다가 할아버지

 윤길구 아나운서의사진이 있어 보내 오셨다. 그 사진 속에

 1952년 무렵으로 추정되는담양장터의 모습이 담겨있는

사진이 있다. 그때의 추억이 되 살아나 필자의 사진

 앨범을 넘겼더니 1980년 초에 아이들과 담양장날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동백 아가씨 편집.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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