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아나운서클럽

이광재 아나운서 영면. 1950, 60년대 국민의 벗이었던 인기아나운서

이장춘 2012. 9. 5. 12:11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기뻐 해 주십시요.』

 

 

1950, 60연대 대한민국 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목소리의 주인공 이광재 아나운서가 미국

현지 시간으로 8월 30일 세상을 뜨셨습니니다. 전 미주

방송인협회 정영호회장님으로 부터 한국 아나운서 클럽

김규홍 부회장님께 보낸  글을  보고 그때 그 목소리와

그 시절을 떠 올리며 간단한 글 한편을 올립니다. 

 

 

 이광재 아나운서 세상을 뜨시다. 1950년대 60년대 국민의 벗 

 

 

정영호님이 보내온 글 내용입니다.

 

 

오늘자 (2012 ,9,4자) 이곳 신문에 소개된

기사입니다.  전 아나운서였던 이광재 원로목사가

 30일 소천했다. 80세. 1960년대 한국 KBS 방송 아나운서로

활동했으며 미주 한인 사회에서도 20년 가까이 아나운서로 활약했던

 이 목사는 지난 2001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세계선교사역에 헌신해 왔다.

이외에도 원로성직자 목사회, 부모님선교회, 재미방송인협회,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한인 케뮤니티 발전을 위해 봉사했다. 입관예배는

 6일 오후 7시, 천국환송예비는 7일 오전 11시 다우니의 가주장의사 (9830

LAKEWOOD BLVD., DOWNEY, CA 90240.  전화 (562)-622-9393)

에서 남가주사랑의교회 고석찬 목사의 집례로 엄수된다.

저는 7일 천국환송예배에 참석예정입니다.

 

2012년 9월4일 아침 10시

미국에서 정영호

 

 

 1956년 대학교 2학년 재학중 공개채용시험을 거쳐

아나운서가 된 이광재님은 타고난 목소리와 재능으로 아나운서가

된지 얼마 안되어 두각을 나타냈고 1958년부터 스포츠 중계방송을

시작한 이래 1960년 로마올림픽과 1964년 도오꾜오 올림픽 등 국내, 외

스포츠 중게방송에서 님의 목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젊은

패기와 독특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청취자들과

하나되어 웃으면서 환호했고 즐거움을 같이 했습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때는 선배 임택근

아나운서와 함께 16개의 경기현장을 바삐 돌아 다니며

중계방송을 해서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 해 주십시요."

고국에 계시는 동포 여러분의 기뻐 하시는 모습이 아나운서의 눈에 선합니다."

경기장이 떠 내려갈 듯 큰 소리로 웨치다가 조용히 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하지만

국민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려는 일념으로 주변의 눈치 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대회 때는 우리 선수들이 메달 하나도 목에 걸지 못했지만 임택근, 이광재

아나운서의 중계방송은 금 메달감이라고 했습니다. 올림픽 기간중 그

중계방송과 함께 애환을 같이하며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1964년 도오꾜오 올림픽 때는 KBS아나운서

실장으로 현장을 중계방송했습니다. 스포츠 중계방송과

북한 신금단의 출전에 얽힌 님의 현지방송은 동포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큰 스포츠 중계방송는 본인이 직접 참여하면서 기회를

 얻기 힘든 후배들로 부터 다소 불만의 소리도 들렸지만 국민

들로 부터는 더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이광재 아나운서가 1968년 2년

기간으로  VOA 미국의 소리에 파견되었습니다. 기간이

끝난뒤 미국에 머무르면서 국내에서는 차츰 잊혀져 갔어도

미국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LA에 있는기독교방송국의 방송국장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2002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월드컵 때 임택근 아나운서와

함께 라디오 중계석 마이크 앞에 앉은적이 있었어도 그것은 잠시였고 들은분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오랜기간 건강이 안 좋다는 얘기가

 들리더니 마침네 세상을 뜨셨습니다.  다른 얘기는

본 춘하추동방송 글을 링크했습니다

  

 

이광재 아나운서의 영면소식을 들은

이용억님, 이보나님, 장근식님, 박경규님, 최홍준님,

이석희님, 조봉균님, 강영숙님, 우제탁님, 김규홍님, 박민정님,

황인우님, 이재신님, 이형균님, 채영신님, 박서림님 등 많은 분들이

 추억담과 함께 "명복을 빈다"는말씀을 전해 오셨습니다. 긴 추억담과

애도의 말씀 또 기도를 올리겠다는 말씀 등 여러 얘기를

 전해 오셨지만 사연이 생략된것을 이해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광재 아나운서와 1956년

KBS 입사 동기이기도 한 박종세 아나운서는

이광재 아니운서의 영면소식을 들은 오늘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금할길이 없다면서 깊은 애도를 표하며

명복을 빈다고  하셨고 한국 아나운서 클럽 김동건

회장님께서도 같은 뜻릏 전해 오셨습니다. 

 

 

다음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시면

이광재아나운서에 관한 글을 더 보실 수 있습니다.

 

 

이광재 아나운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http://blog.daum.net/jc21th/17780853

 

 이광재 아나운서의 KBS시절 방송 회고록

http://blog.daum.net/jc21th/17780729

 

로마 올림픽과 이광재 아나운서의 중계방송 추억

http://blog.daum.net/jc21th/17780285

 

 

베가본드님의 글 (2012년 1월 30일 일기장에서)

 

이 광재 아나운서

 

-12시 가 되면 이 광재 아나운서의

 맑고 청명한 음성이 온동네의 스피커를 울렸다.

시대가 1960년대라 라디오 있는 집이 몇집 없어 모두들

가을 농사지어 벼를 주고서 달았던네모 상자의 스피커. 다른

 아나운서의 음성은 잉잉 거렸어도 이 광재 아나운서만은 목소리가

 유난히 맑아잘 들렸다. -조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요 여기

 자카르타에서 벌어진  축구의  우리선수들 잘싸워 이겼습니다.

그가 먼저 감격해 목소리가 더 높아진 그의 목소리.

그럴것이다. 외국에 나가 당당히 이겼으니 그 감격은 어찌

 아나운서라고 담담하게 중계만 하겠는가24가지 축구중계를

 할수 있는 아나운서는 이 광재란 말이 나돌 정도로 스포츠엔

전문가 수준의명 아나운서 였다. 아마도 <임 택근

 아나운서>와 쌍벽을 이루지 않았을까?

 

결혼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산단

애긴 들었지만.....그의 근황이 궁금하다. 한번 정도는

나와서 그 당시에 하던 중계를 한번 들었으면 좋겠다. kbs에서

진행하던 <퀴즈 열차>도 씨의 진행으로 한참 인기가 있었다. 그 당시론

 얼굴이 주가 아니고 음성이 중요해 좋은 음성의 소유자가 아나운서가 되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듣는 시대서 보는 시대로 달라져 외모가 쥬요 포인트가

 되어 음성은 별로여도 아나운서되는사람 많은거 같다.

 

-쟁반에 옥굴러가는 듯한 고려진 아나운서의 음성.

-한음성도 다 알아듣는 이 광재 아나운서.

-차분하지만, 묵직하고 담담한 임택근 아나운서.

그래서 그 당시엔, 아나운서야 말로 스타가 아니엇을까?

 

 

 

호랑이 선생님 글

 

 

저는 오늘 이광재 아나운서님의

영면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늦게나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 실감나게

 스포츠 생 중계방송을 잘 하셨지요. 지금도 그때

생 중계방송하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멋진 생 중계방송이였지요.

생 중계방송의 달인이였는데...

 

 

김무생 KimMooSaeng님의 댓글을 옮겼습니다.

 

 

저에게 아나운서라는 그 꿈을 갖게 해버렸던

대 선배님!! 저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떠나시는 모습

뵙지 못하고 영면 소식조차 뒤늦게 알게 돼 너무 서글프고 땅이

꺼지는 아쉬움만 제 맘과 뇌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97년 수서역

근처에서 된장찌개를 같이 드실 때 식사전 저를 위한 기도에서
"훌륭한 아나운서로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켜주시라"는

기도를 정성으로 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60년대 당시 방송하셨던 방송자료들을
방송에 참고하라고 저에게 하나씩 하나씩 제가 사는

부천으로 꼼꼼히 챙겨 보내주셨던 대선배님!! 이 못난 후배를

용서해 주실것을 기도합니다. 천국에서 그 금속성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혹 못다하신 방송이 있다면 이 못난 후배가 끝까지

기도할테니 멈추시지 마시고 방송하십시오!!


대선배님!! 너무 아쉽고 저의 가슴과 머리는

어딘지 모르게 텅 비어있는 허전함이 메워지질 않습니다.
당신께서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해마다 20년 가까이 저에게

정성으로 보내 주셨던 크리스마스카드를 펼쳐보며 당신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부디 천국에서 못다한 방송과 설교를 영원히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며 기도합니다.!!

 

 

두번째 댓글입니다.

 

 

고맙습니다. 부족한 저는 사연이

무척 많은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사연이 가장 많은)

늦깎이 프리랜서 아나운서로서 방송활동을 시작했습니다.
KBS-TV:<이것이 인생이다.> HBS-TV:<부라보 돈키호테> HBS-TV

<심씨와 여자들> 등의 프로그램에서 늦깎이 "집념과 열정의 아나운서"
로 시청자 여러분들과 만나기도 했습니다. 저는 대선배님이셨던 이광재

 아나운서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99.9%정도) 받았던 사람입니다.


옛날 교복과 교모를 착용했던 중고교 시절

각 시(市) 대항 체육대회 현장 중계 소년 아나운서로

 활동하게 담력을 불어 넣어 주셨던 분이 바로 이광재 대 선배

아나운서님이십니다.-까까머리 교모와 교복을 착용한 학생 현장

소년 스포츠 중계아나운서로서 인기가 아주 대단했었습니다. 관중들은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게 아니라 '이광재 아나운서님이 오신 줄 알고'

본부석의 이른바 중계석에 있는 어린 소년 아나운서인 저를 빙

둘러 싸버리는 촌극이 자주 연출되곤 했답니다.


관중들은 저에게 다가와 "학교 그만 다니고

서울 KBS 중앙방송국으로 빨리 가라"고 저를 자꾸 떠밀 정도로
당시에 인기가 대단했던 소중하고 가장 행복한 추억이 있습니다.-이런

 값진 체험은 바로 대선배님이셨던 이광재 아나운서님이 이 세상에 계셨기에

 가능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데로 사연이 아주 많습니다 앞으로 자주 들어와

이광재 아나운서님을 중심으로 에피소드,여러가지 방송 체험 등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겠습니다. 이광재 대선배님을 기도하면서 오늘은

이것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세번째 댓글

 

 

 

댓글을 연재한는 김무생님입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이었던

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우리의

김기수 선수와 이탈리아의 벤베누티 선수와의 "세계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매치"가 벌어졌다. 이 중계 방송은

 당시 최고의 인기 아나운서이셨던 故이광재님이 직접 중계를

 담당하셨다. 난 그때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있었다. 이때 라디오

에서는 <<우리 김기수 선수, 라이트, 레프트 성공입니다. 얻어 맞고 있는

벤베누티, 로마에서 벤베누티에게 패배한 그 설움을 되갚고야 말겠다던 김기수

선수! 파인 플레이입니다.!....>> 난 이소리가 귀에 들어오자마자 손짓 발짓을

해 가며 힘차게 그대로 따라 해 버렸다.(중계방송이 그렇게도 신이나고

좋았기 때문에---) 그런데 갑자기 이발사 아저씨의 강력한 알밤

한 대가 내 머리에서 번쩍하질 않겠는가!

 

아뿔사! 내가 요동을 치며 중계를 하는 바람에

그만 가위가 내 왼쪽 귀를 스치고 지나가버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난 그때 기억이 생생하게 나는데

 그 순간엔 정말로 아픔을 느끼기는 커녕 그 이발사 아저씨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신나는 중계 방송의 방해물로만 보였기에---)

 이때부터 故이광재님처럼 그런 훌륭한 아나운서가 되겠노라고 내꿈을

완전히 굳혀버렸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초등학교 5학년 녀석이 길거리를

다니면서까지 혼자 중얼중얼 스포츠 중계방송을 꽤 높은 톤으로 하다가,

힘들다 싶으면 좀 낮은톤의"백만인의 퀴즈" "재치문답"등의

공개방송의 MC멘트도 양념으로 섞어가며 꿈 많은

 초등학교 시절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네번째 댓글

 

내가 이광재님에 의해 꿈의 씨앗이 아나운서로

영글었다 한다면 그 씨앗을 맺게한 텃밭이 있었다. 60년대의

 농촌 시골 마을을 상상해보면 대충 짐작하고 남음이 있으리라. 너무

못 살고 가난했던 그 시절 ! 문화 시설과 정보 매체가 너무 메말라 있던 곳.
내가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그 시절에 유일하게 방송을 만날 수 있는 게 꿈의

나라와도 같았던 일명 '유선라디오 방송'이 있었다. 초등학교 근처에 "유선

라디오 중계 사업소"라는 게 있었는데, 여기서는 각 동네마다 전신주에

 전깃줄을 매달듯이 유선을 연결해 방송을 송출하는 시스템이었다.


집집마다 쌀과 보리 콩 잡곡 등 곡식을 계량할 때

 쓰는 '되' 크기의 사각형 모양 속에 스피커가 내장된 기구를

설치해 꿈에 그리던 KBS방송을 청취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일명

'청취료'라는 걸 받아 가는데 일년에 두번 -7월쯤 보리 타작할 때 보리 한 말,
가을 벼 추수할 때 벼 한 말 이렇게 "유선라디오" 중계사업소 사람들이 집집마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받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 전신주 같은 장치가 바람이 세게

불거나 기타 등등으로 가끔 넘어진다거나 유선이 끊어지는 사고가 종종 발생해 애를

 먹이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날 갑자기 방송 소리가 멈춰 버렸다. 웬 변고란 말인고!

큰일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방송을 못듣다니!!----. 난 그길로 바로

 밖으로 나가 유선을 따라 뛰면서 죽 점검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난 어지간한 건 내가 또는 친구들을 동원해

 직접 응급처치를 하기도 했다.-힘든 건 약 3Km 거리에 있는
유선방송 사업소까지 달려가 구조요청을 했지만---) 그날은 도저히

초등학생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유선을 받쳐 꽂은 나무가 넘어졌고
유선이 끊겨 버렸다. 빨리 3Km를 달렸다.(집에서 그곳까지 약 3Km 거리)

상황 설명을 들은 그 유선 방송 사업주는 현재 자기 혼자인데 자기

 혼자로는 힘들겠다며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난 얼른 "제가 도와주면 되죠"했더니 "네가?

힘들텐데" 하는 것이었다. 난 빨리 방송을 들어야 하기에 그 아저씨

 팔을 끌었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는 너털웃음을 웃더니 "일단 가보자"하며

여러 장비를 챙겼다. 그중 일부는 내가 들고 어른 유선방송사업자와 초등학교

 꼬마 유선 방송 사업자가 한 팀이 돼서 바삐 현장으로 출동했다. 사고 현장에서

난 낑낑대며 유선을 끌어 주고 그 아저씨와 함께 간신히 유선을 이어 그렇게도

신이 나면서도 유익한 방송(뉴스,스포츠,공개방송,라디오 드라마,여러

정보 등)을 청취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나는 지금 생각해 봐도

방송이라는 텃밭을 꼬마 녀석이 조금씩 일구어 가고 있었다.

 

 

문동주 선생님

 

 

내나이 70이지만 그때그시절

이광제아나운서님의 힘차고 전율을

 느게했던스포츠중계 지금도 생생합니다.

고인니되셨다니 슬픈일입니다. 비록 고인이

 되셨지민 기록은 있을것입니다. 다시한번

듣고싶습니다전율을 니끼게했던

 그목소리를/

 

 

 

 

1958년 연말특집 아나운서 언파레이드를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입니다,

앞줄 왼쪽부터 1.송영필, 2.강익수, 3.장기범, 4.임택근, 5.박종세, 6.최세훈, 7.이규영,

8.강영숙, 9.전영우, 10.황우겸, 11.유석춘, 12.강찬선, 13.김동만, 14.최계환, 15.최두헌,

16.문복순, 17.장금자, 18.유창경, 19.이광재, 20.한경희 21.김준철, 22.최만린,

23.이현숙, 24.윤영중, 25.조영준, 26.이본 아나운서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이광재 천규덕1-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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