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아나운서클럽

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여사, 둘째 딸 노라노여사 / 한국 아나운서 클럽 초대석 황인우

이장춘 2012. 12. 28. 00:06

 

 

 

우리나라 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여사!

한국 아나운서 클럽 회보 2012년 연말특집으로

이옥겸여사에 대한 얘기를 담기위해 들째 딸이자

대한민국 최초 패션디자이너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노라노 여사를 사단법인 한국 아나운서클럽 편집장

 황인우 아나운서가 만났습니다. 이 글은 한국

아나운서 클럽 회보에 실린내용

전문을 옮겼습니다.  

 

 

 

연말 특집 초대석

-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 여사의 둘째 딸 노라노 여사-

 

 

 “어머니는 미모와 지성을 갖춘 헌신적인 분이셨죠”

 

1952년 ‘노라노의 집’ 열고 올해 패션인생60년 회고전 개최

 

 

노라노 여사와 황인우 편집장, 황 편집장은 입고 있던,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1955년도 노라노 투피스를 패션박물관 전시용으로 기증했다.

 

 

부군인 방송 선구자 노창성 권유로 방송 입문

 

한국 최초 아나운서 이옥경, 그의 딸 노라노

 

 

KBS 아나운서실장실에 걸려 있는

 ‘서울중앙방송국을 빛낸 사람들’ 명단은 ‘李玉慶’으로

 시작된다. 이옥경(1902년 9월 7일~1982년 5월 1일)은 경성

중앙방송국 개국공신인 부군 노창성(1896년 3월 25일~1955년

 1월 9일)의 권고로 1926년 7월 방송에 입문해 둘째딸이 생겨 방송을

접기까지 약 2년간 우리나라 최초의 아나운서로 활약했다. 그 둘째딸이

 노명자,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의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여사이다, 이번

호엔 이옥경 여사의 40주기를 보내며 편집장인 내가 노라노 여사를

 만나 문화혁명가 가족사를 들어보기로 했다.

 

청담동 사무실에 도착하자 큰 키에

 검정 바지정장 차림의 노라노 여사가 환하게

맞아주었다. 처음 통화할 때 84세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맑고 활기찬 목소리에 ‘역시 아나운서 딸이구나.’

싶었는데, 실제로도 20년 가까이 젊어 보인다.

모친은 어떤 분이셨을까 궁금해졌다.

 

인천여고 수석 졸업 ‘꽃 중의 꽃’ 이옥경

 

“존경하는 어머님은 흠잡을 데 없는 분이셨죠.

정확하고 현실적이며 판단력이 뛰어나지만 나서지 않는

조용한 성품에 헌신적이셨어요. 명문, 명필에 그림도 잘 그리고 육상,

스케이트, 테니스까지 다재다능한데 노래만 못하셨어요. 1921년 일본인

여학교인 인천여고를 수석 졸업할 때 신문에서 ‘꽃 중의 꽃’이라고 대서특필

했대요. 한 마디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분이죠. 제가 얼굴은 안 닮았지만,

목소리가 어머니 같다는 말 많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워낙 말수가 없으셔서

어머니로부터 아나운서 시절 이야기는 별로 듣지 못 했어요.”

 

1935년 ‘삼천리’ 8월호에 이옥경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그의 빛나는 두 눈동자, 배꽃 같이

하얀 살결, 동그스름한 그의 얼굴, 호리호리한 몸맵시,

명랑한 목소리는 그 때의 방송국 안 여러 사람들의 눈을

황홀케 한 때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최첨단 직종 아나운서로

 수양장에 모자를 쓰고 마이크를 상대하는 이옥경의

모습은 장안의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경성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개국 방송 진행

마이크 앞에 선 이옥경 모습에 장안이 들썩

 

영친왕의 영어교사였던 인천세관장의

무남독녀 이옥경은 벳부의 미션스쿨을 다니던 중

부친의 별세로 귀국해 인천여고 졸업 후 다시 도쿄의과

대학으로 진학했다가 초등학교 동창인 노창성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고아 출신의 관비유학생으로 구라마애공업전문학교 

전기화학과를 졸업한 노창성은 체신국 기술자가 되어 1924년

 12월 9일 서울 미스코시백화점 3층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실시한 시험방송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한 방송 선구자이다.

 

처음엔 기술직 직원들이 시험방송을

 맡았는데,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효과적이라

생각한 노창성이 일어에 능숙한 자신의 아내를 아나운서로

추천한다. 1926년 7월 이옥경은 음성 테스트를 받고 체신국

 소속으로 다음 날부터 혼자서 매일 밤 2시간 30분간 일본어와

우리말로 시험방송을 진행했고, 경성중앙방송국

(JODK) 개국요원으로 영입된다.

 

교통사고 후에도 헌신적으로 4남 5녀 키워

 

둘째를 임신하며 가정으로 돌아간

 이옥경은 막내를 낳기 석 달 전인 1936년

 전차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에 의지해

살면서 4남 5녀의 대가족을 건사한다. “아버지가 고아,

어머니가 무남독녀라 가족을 많이 갖기를 원하셨어요.

우리 집엔 방마다 라디오가 있었고, 아버지 방은

종일 라디오를 켜놓았었지요.

 

형편이 어렵지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절약하며 검소하게 생활하셨어요. 어머니가

온통 빨간 털실로 짜 입혀 제 별명이 홍당무였지요.”

경성방송의 설립을 주도한 노창성은 1943년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인해 우리말 전담 제2방송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우에무라제약소 부사장으로 이직했다가 1949년 말 복귀해

중앙방송국장을 맡았고, 1953년 방송 최고 책임자인

 공보처 방송관리국장으로 방송 시설 재건과

복구에 힘쓰다가 1955년 작고했다.

 

부모의 도전정신, ‘노라노’로 이어지다

 

노라노 여사는 여고를 마치고 정신대를

피하려 장교와 혼인하지만, 곧바로 출정한 남편이

 살아 돌아올 리 없다고 여긴 시댁에서 이혼을 요구하자 짧은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1947년 패션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2년간 직장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돌아와

1952년 서울 퇴계로에 정식으로 ‘노라노의 집’을 개업하자

 이옥경은 70년대 후반까지 의상실 회계를 맡아 파리,

뉴욕으로 진출하는 딸의 전성시대를

 지켜본 후 1982년에 작고했다.

 

“종로에서 의상실 할 때 어머니는

집에서 반찬을 싸와 밥을 지어 먹이며 한일관

 장국밥도 못 사먹게 하셨어요. 종자돈을 마련할 때까지

함부로 돈을 써선 안 된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1956년에 파리로

6개월 연수 가겠다고 하니 선뜻 5000 달러를 내 주시더군요.

 그래요. 능력, 독립도 경제력이 있어야 가능한 거죠!

어머니는 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를 풀솜으로

 만든 사슬로 조정하셨답니다.”

 

아나운서를 위한 패션 지침은 ‘절제’

 

노라노 여사에게 끝으로 아나운서를 위한

패션 지침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옷이란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하고 인식하는 데 도움이 돼야 해요. 자신의 취향,

직업, 장소에 어울려야 합니다. 아나운서의 패션은 ‘절제’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올 봄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의 주선으로

‘패션인생60년 회고전’을 열며 세대를 넘어 협력하고 경험을 전수하는

과정에서 큰 발전 가능성을 보았다는 노라노 여사는 “화려해 보이지만,

 전 일만 하며 살아왔어요.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지요. 최선을

 다하면, 누군가 지켜보다가 한 단계 올려줍니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나는 따뜻하고 겸손한 노라노 여사에게

감명 받아, 입고 갔던 노라노 투피스를 패션박물관

전시용으로 기증하고 돌아왔다. 내가 1995년에 시어머니로

부터 물려받아 착용했던 그 옷은 그동안 모아진 400여

벌의 ‘노라노’ 의상 중 가장 이른 1955년경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글 / 황인우 편집장

  

낡은 사진 속 역사, 왼쪽부터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남편), 큰딸 영자,

둘째 딸 명자(노라노), 우리나라 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 여사

 

 

박단마 슈산보이.mp3

 

 

 

[파일:6]

  

박단마 슈산보이.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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