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체육

제 16회 멜버른 올림픽, 첫 은메달 송순천, 중계방송, 장기범, 임틱근 아나운서

이장춘 2012. 7. 12. 03:46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참여한

이래 그렇게도 기다리던 은 매달을 목에 걸었던

올림픽이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멜바른, 열여섯 번째로 열린

 올림픽에서 송순천 선수가 경기에서 이기고 판정에서 져 금이 은으로

색깔이 바뀌었을 때 국민들은 아쉬움을 금치 못했지만 국력 탓으로 돌리면서

 부강한 나라를 이룩해야 된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힘을 주었고

 자신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장기범, 임택근 두 중계방송 아나운서는  멜번의 경기장

마다 뛰어다니며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본 방송 외에도 여러 차례 재방송을 실시해서

그 방송을 들려주었습니다. 라디오가 적었던 시절 길거리, 학교, 극장 등등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곳이나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또

확성기를 틀어 그 방송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웃고, 울고,

또 환호성을 올리며 그 방송을 들으며 국민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던 때였습니다. 뒷 부분에 임택근

아나운서 회고담이 있습니다.

 

 

제 16회 멜버른 올림픽, 첫 은메달 송순천, 중계방송, 장기범, 임틱근 아나운서

 

 

 

 

코리아를 외치는 관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한관수(韓寬洙)복싱감독이 든 대형 태극기를 선두로

 한국선수들이 38번째로 입장했을 때 열열한 환영의 박수가

 울려 퍼졌습니다. 6.25전쟁에 피를 흘렸던 오스트레일리아 국민들은

 반공의 맹방으로 대한민국은 친근한 나라가 되어있었습니다. 여기서

태극기가 하늘높이 올라가는 가운데 동양선수로는 최초로

송순천선수가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해머 펀치라고 불렸던 송순천 선수에게

당할 권투선수는 누구도 없었습니다. 독일의 베레트

선수와의 마지막 결승경기에서도 시종 파고 들어가 부수는

 송 선수 힘 앞에 상대선수는 맥을 못 추었습니다. 시합이 끝나고 판정을

 기다리는 많은 관중들이 코리아를 연발하며 승리를 축하했고 한국 임원들도

 우승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베레트선수의 손이 올라갔습니다.

아우성치는 관중의 야유와 고함, 한국 최초의 금메달 꿈이 은메달로 바뀌었습

니다.   K. O승을 거두지 않으면 판정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던 약소국의

설움이었습니다. 1948년 권투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한수안 선수가

그랬고 이 대회에서 송순천, 김창희 선수가 그랬습니다.

강해져야 된다는 다짐 속에 권투는 오랜 기간

국제대회에서 메달박스가 되었습니다.

 

 

 

 

김창희 선수는 역도 라이트급에서

종합 370Kg을 들어올려 3위를 차지,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때도 결승진출을 놓고 깨끗이 들어 올린

추상에 대해 엉뚱한 실격판정을 내려 결승이 좌절되면서 동메달에

그쳤던 것입니다. 20년 역도를 해온 김창희 선수는 1948년 런던대회에서

6위 1952년 헬싱키 대회에서 4위, 이번 멜번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집념의

선수였습니다. 1948년, 1952년의 김성집 선수에 이어 이번 대회에서

김창희 선수가 매달을 딴 이래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역도에서 메달 권에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이창훈선수는 2시간 28분 45초의 기록으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면서 15회 헬심키 올림픽 대회에서 최윤칠

선수가 4위를 차지한데 이어 한국 마라톤 올림픽 연속 4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마라톤 실황을 중계방송하던 임택근 아나운서는 망원경이 없어 달리는 현장확인이 

 어려웠던 터에 이창훈선수가 마지막 골인지점에 가까워 오면서 일본선수와 선두다툼을 하고

있었지만 육안으로는 확인이 안되어 옆에서 중계방송하는 일본아나운서의 외치는 일본선수의

 4위라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도 4위로 일본 선수가 들어온다고 방송했다가 순간적으로 태극기를

단 선수가 눈에 들어오자 "아! 제 4착은 일본선수가 아닙니다.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제 4착으로 우리 이창훈 선수가 골인했습니다." 라고고쳐 방송하기도 했습니다. 이날

마라톤 4위를 했지만 국내 반응은 뜨거워서 일부 언론에서는 같은날 있었던

송순천선수의 은메달 소식에 우선해서 기사를 올리기기도 했습니다.

이창훈선수는 2년뒤인 1958년 제 3 회 아시아 경기대회 우승을

하면서 1950년대 말까지 아시아의 마라톤 왕자였습니다.

 

 

 

 

멜버른 올림픽 때부터 두 사람의

 아나운서에 엔지니어가 파견되어 현장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종전과는 다른 양상의

 중계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북반구에서만 열리던 올림픽이 처음으로

남반구 호주에서 열려 올림픽기간도 다른때와는 달리

1956년 11월22일부터 12월 8일 까지 열렸습니다. 멜버른 대회는

수에즈 운하의 봉쇄, 소련의 헝가리 침략 등 어수선한 속에서 불참국들이

 늘어나 67개국에서 남자 2813명과 여자 371명이 참여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불참한 국가들이 있는가 하면 동독과 서독은 이념을 초월해 단일팀으로 참가

이채를 띠기도 했습니다. 독일선수의 시상식에는 독일국가대신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한 소절이 연주되었습니다.  

 

 

 

 

호주국민들의 따뜻한 환대 속에 300만 명이란 사상

최고의 관객 수를 기록했고 경기장은 연일 만원을 이루었

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민들이 보여준 따뜻한 인정속에 선수촌의

분위기도 어느 대회보다 화기로웠습니다. 국가, 인종, 이념이나

 정치적 갈등을 넘어 우의와 친목이 넘실댄 선수촌이 특히

멜버른 올림픽의 인상을 돋보이게 했습니다.

 

 

임택근 아나운서의 멜버른 올림픽 중계방송 회고담

 

 

 

 

1956년 호주 멜버른에서 열리는

올림픽대회의 중계방송을 맡게 되어 처음으로

해외출장을 떠났을 때의 일을 나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장기범선수와 엔지니어 김성열씨와 함께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여의도 모래사장에 미군이 임시로 지어놓은 공항에서 가족들의 뜨거운

 전송을 받으며 프로 팰라 비행기에 올랐다.  동경에서 여객기로 바꿔 탄 뒤

홍콩을 거쳐 마닐라에 도착 거기서 일박한 후 다시 호주로 떠났다. 드디어

제16회 올림픽 개막식 날,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멜버른 스타디움에

들어서자마자 잘 갖추어진 운동장시설에 저절로 감탄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대로 된 울타리와 관중석도 없이 바람만 불면 흙먼지가

자욱이 날리는 서울의 초라한 경기장을 멜버른 경기장과

비교하니 또다시 전쟁이 원망스러웠다.

 

 

 

 

우리나라는 여섯 종목에 선수단 57명이

참가해서 두개의 메달을 획득, 23위의 순위를

기록했다. 복싱의 송순천 선수는 올림픽 경기사상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결승전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어 씩씩한 대한남아의 기상을 세계에 떨쳤다.

 

역도의 김창희 선수가 출전하기전날엔

한 번도 중계방송 해보지 못한 역도중계에 자신이

없어 밤을 새우며 경기규칙을 공부해야했다. 김성집 선생과

 역도관계자에게 일일이 물어가며 외운 벼락치기 상식을 가지고

대담하게 역도경기장에 들어섰던 기억을 떠 올리면 지금도 그때 일이

회상되어 식은땀이 난다. 역도경기는 용상, 인상, 추상의 세 종목에 걸쳐

한 종목에 세 번씩 도전해서 제일 무거운 중량을 들어 올린 기록으로

성적을 메기는 기록경기다. 실내경기장을 꽉 메운 관중들이

숨을 죽인 체 조용히 선수들의 선전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내 김창희 선수차례가 왔다.

 

 

 

 

"가슴에 선명한 태극기 표지를 단

대한의 건아 김창희 선수의 등장입니다. 위아래

짙은 감정색 유니폼을 입고 널찍한 가죽벨트를 허리에 메고

 있습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면서 바벨 앞으로 한발 한발 들어서고

있는 대한의 아들, 용상 1차시기를 하려는 순간입니다."고요한 실내경기장에

왕방울 단 듯 크게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 얼마나 목소리가 컸던지 박수 속에

김 선수의 일차 시기가 끝나자  본부석으로부터 조용히 해 달라는 부탁 겸

주의 쪽지까지 받을 정도였다.   나는 한 옥타브 낮춰 방송하려 했지만

우리 선수가 등장 할 때마다 자연히 커지는 목소리를 어쩌지 못했다.

드디어 김창희 선수가 종합 3위를 기록하여 동메달을 획득하고

멜버른 하늘높이 또 하나의 태극기를 계양했다. 

 

  

 

송순천선수(밴텀급)독일의 베렌트 선수의 결승전

모습입니다. 이 결승전에서 우리는 흔히 경기에서 이기고 퍈정에

 저서 금메달을 도둑 맞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첫 금메달의 꿈은

20년 후인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올림픽 선수단의 귀국 접견시 송순천선수의 메달을 관람하고 있는 이승만대통령 / 국가기록원

  

 

 

 

 호주에서는 경주용 말의 통관이 어려워 승마경기는 스톡홀름에서 7월 10일부터 17일까지 따로 개최되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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