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체육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전쟁 중의 동메달, 김성집 강준호, 1952년

이장춘 2012. 7. 11. 03:39

 

 

포성이 귓전을 울리던 1952년

전쟁에 지친 국민들이 마음 둘 곳 모르던 그때

 헬싱키에서 들려온 승전보는 국민들에게 위안을 주고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올림픽 기간을 통해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대한민국이 있음을 세계만방에 알렸고 그토록 어렵던 와중에서도

 44명이나 되는 많은 선수들을 북 유럽의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참여시켜 용감히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희망 있는 나라임을 알렸습니다. 김성집

선수의 전 대회에 이은 역도 동메달, 강준호 선수의 권투 동메달로 세계인이 보는 헬싱키

 하늘아래 태극기를 올린 것이, 지금으로 보면 별것 아닐지라도 그때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변방의 나라 대한민국의 존재를 알리기에 충분했고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러

넣어주는데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엔지니어도 없이, 보조 아나운서도 없이

한사람의 아나운서가 그 일을 도맡아 고국의 동포들에게 알리는 것 은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지만 그때 파견된 서명석 아나운서는

 그 일을 해 냈고 또 다른 역량을 발휘해서 대한민국을

세계 만방에 알렸습니다. 끝 부분에 서명석

아나운서의 회고담이 있습니다.

 

 

1936년 제11회 베르린 마라톤영웅 손기정선수를 기수로 한 한국선수들의 입장 (출처 : 손기정 기념관)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전쟁의 동메달, 김성집 강준호, 1952년

 

 

대한민국은 이때의 올림픽 참여를 위해서

전 국민과 해오동포 그리고 참전했던 미군들까지

올림픽 성금을 갹출 힘겹게 마련한 여비로 임원, 선수 44명으로

구성된 한국선수들이 부산을 출발 헬싱키 선수촌에 태극기를 계양했

습니다.전쟁 뉴스를 통해서 익혀온 코리아선수들이 입장식에 모습을

나타내자 그 어느 나라보다도 뜨거운 환영을 받았습니다. 한국

 선구들이 가는 곳 마다 사인공세를 취했고 기록보다

참가의 의의를 통해 한국 이미지를 심는

민간사절의 첫 출발이었습니다.

 

 

 

 

전란 중 군인의 신분을 출전한 강준호(姜俊鎬)선수는

 강화훈련이나 합숙훈련은 고사하고 제대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적 없이 천부적으로 타고난 소질과 끈질긴 집념으로 강력한 우승후보인

 미국의 무어 선수를 물리치고 준결승에 올라 상처투성이의 얼굴로 에이레의

맥넬리 선수와 격돌 판정패로 입상규정에 의해 3. 4위전 없이 동메달을

 땄습니다. 강선수의 귀중한 동메달은 복싱한국의 동메달을

 수립하는데 커다란 발판이었습니다.

 

 

 

 

피난지 부산의 근무처 해군 사관학교 공터에서

 꾸준히 바벨과의 고독한 투쟁을 계속한 심성짐 (金晟集) 선수는

 런던대회에 이어서 이번 대회에서도 종한 382.5킬로로 (런던 380킬로)로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의 활약은 역도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데 귀중한 밑거름

이었을 뿐 아니라 올림픽 2회에 걸친 메달리스트로서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

었습니다. 피난시절 충분한 영양은 고사하고 세끼 식사조차도 어려운

 시절 자기 기록을 2.5킬로나 갱신하면서 두 번씩이나 메달을

 차지한 김선수의 투지는 전란중인 한국 스포츠 청소년

들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습니다.

 

 

 

 

런던 마라톤에 출전, 마지막 레이스에서

다리경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최윤칠선수가 자토백의

선풍이 불던 이 대회에서 마라톤 4위를 한것은 큰 의미가 있었고

다음 1956년 멜보른 대회에서 이창훈선수가 이를 이어받아 4위를 하면서

아세아 마라톤 왕자가 되었습니다. 1932년 김은배, 권태하, 1936년 손기정,

 남승룡선수의 마라톤 세계재패 등과 아울러 한국 마라톤의 저력을 과시한

 것이었고  한국 마라톤은  뒷날 황영조선수의  세계재패로 이어져

세계적인 마라톤 강국의 전통을 이었습니다.

 

 

 

 

제 15회 필란드 헬싱키 올립픽대회는

 1912년 제정 러시아가 올림픽에 참가한 이래

 공산권으로 바뀐 소련이 295명의 대 선수단을 최초로

출전시켰고 독일과 일본이 다시 대회에 초청을 받고 참가 하는 등

 그때까지 제일 많은 69개국 남자 4,407명 여자 518명의 선수가 참가했습니다.

핀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육상영웅 파보 누르미가 왕년의 그 늠름한 모습으로

성화를 높이 들고 들어와 함성과 갈채 속에서 운동장을 돌아 63세의

 한네스 콜로마이넨 옹에게 성화를 인계했습니다.

 

 

 

 

초기 올림픽 육상의 영웅인 콜로마이넨 옹은

가파른 계단을 가볍게 뛰어 올라 성화대에 점화했습니다.

인간 기관차 자토백의 초인간적인 경기 100m에 0.001차로 승패에

엇갈리는 극한의 경쟁, 공중에서 육체의 예술을 표현한 천재소녀 팻 멕코믹선수,

육상 여자부문에서 탱크처럼 힘으로 밀어 부치는 소련 여자팀 등 이 대회에서 미, 소의

 메달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자본주의 놀음이라 해서 오랫동안 올림픽을 외면 해 온 소련은

그동안 엄청난 경비 시설투자로 국가가 생산하는 아마추어 선수들을 대량으로 생산

회부터 미국과 불꽃 튀는 경쟁을 벌렸습니다. 올림픽에서 정치적 프로파간다 효과를

 거두자는 속생이었습니다. 메달 획득 수에 있어서는 미국과 많은 차이가 있었어도

 단번에 2위로 부상한 대회였습니다. “평화와 전 세계인들의 우호증진을 위한

씨움에서 스포츠는 일종의 무기” 라고 말한 소련 올림픽 조직 위원회

사무국장 소브레프 표현대로 공산권 스포츠가

정치의 나래를 폈습니다.

 

 

 

 

 

KBS 서명석 아나운서 헬싱키 올릭픽 중계방송 회고담

 

 

 

 

1952년 6월 중순까지 나는 용감하게도 (?)

금주를 단행했다. 술좌석에서 동료들에게 비난을

받으면서도 술은 끝까지 마시지 않았다. 그해 6월 초에

핀란드 올림픽 대회에 중계방송 차 파견되는 것이 결정되고

수속절차를 밟느라고 매일같이 동부서주 했다.

 

출발하기 전날인 6월 20일 당시

공보부장관 이철원 박사가 경상남도 지사관저를

임시 경무대로 쓰고 있던 곳으로 데리고 갔다. 외화 사용결재를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받기 위함이다. 나는 경무대 경찰서장실에서

대기해야 했다. 3천 달라 가까운 외화 사용승인은 당시 대통령이

직접 재가 할 때이다. 오후 늦게 결재를 받아 한국은행에서

외환을 바꾸고 방송국에온 시간이 6시경 노창성 국장이하

간부들과 동료들이 환송회를 열어 주었다.

 

닭표 브랜디가 수십병, 오징어와

마른안주 여러 사람에게서 술잔이 한잔씩

들어오니 수개월 금주했던 나의 내장은 순식간에

만취가 되어 버렸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고 식사도 제대로

못한 빈속이 어찌 되었겠는가? 나는 완전히 인사불성이 됐다.

지금에서야 얘기지만 방송국의 공용물인 시계가 없어지고

임시여권과 외환이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한 채로

다음날 10시에야 초량동 숙소에서 눈을 떴다.

 

그러나 정말로 다행스럽게 여행서류와

외환을 그 당시 어느 동료 직원이 잘 보관 하였다가

되 돌려준 것이다. 이런 상태로 그날 오후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났다. 동경에 도착하고 UN군 사령부에서 대 이북방송을

담당하던 작가 김영수, 아나운서 위진록, 유덕훈, 세분의

도움으로 겨우 며칠 만에 식사를 한 샘이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도착해서는

양식으로는 속이 편치를 않아 가지고 갔다 고추장과

날 오이로 비위를 가라 앉혀야만 했다. 올림픽경기가 시작되기

전날 그곳 방송국장 최초로 각국 방송 팀을 위한 환영 리셉션이

있었다. 각국 방송 팀의 단장만을 부른 모양이다.

 

주최 측 인사와 합해서 약 80명 정도,

물론 나는 한국인 유니폼으로 정장을 하고 참석하였다.

그런데 리셉션 데스크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실레지만 당신이

한국 방송 팀의 단장이십니까? 그런데요!”증명서를 가지고 계십니까?

ID카드 사진을 보고 내 얼굴을 두리번거리더니 그는 죄송하다고 하면서

나를 연회장으로 안내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불쾌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방송 팀으로는 나 혼자만 갔으니 내가 단장이요, 총무요,

아나운서요, 기술자일 수밖에 너무 젊은 사람이 한 나라의

중계방송 팀의 단장 자격으로 참석했으니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이러한 사전 곡절을 파티 장에

들어가서야 더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가 50전후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그 가운데 26세의 한국의 젊은 청년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미국, 소련, 일본, 프랑스, 독일, 이태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각국 대표와 칵테일을 마시면서 환담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 신문기자와 카메라맨이 내 옆에 다가왔다.

 

“코리아에서 오셨나요?” “그렇습니다.”

“코리아에서는 중국어, 또는 일본어중

어느 나라 말을 사용하십니까?”

 

영어로 묻는 그자의 말투는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 사람도 아니고 소련 사람이 아닌 것도

분명한 것 같았다. 나는 그 기자에게 반문했다. “우선 한 가지

물어 봅시다. 당신은 어느 나라분인지 모르겠지만 귀국에서는 영어와

러시아어 중에서 어느 말을 사용하십니까? 했더니 천만에요. 우리는

서전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이죠.” 하고 펄펄 뛰는 시늉이다.

“실례지만 한국의 세종대왕을 아시나요?” “모르는 데요”

 

“그 분이 500년 전에 한국 글을 제정하신

우리의 문화 창달의 대왕이셨지요.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세계

어느 사람도 발음 할 수 없는 한국 사람들의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화가 오고 가고 옆에 있던 여러 나라 대표가

한국문화에 대해서 더 많은 질문을 던져왔다.

 

다음날 신문에 한국의 고유한 문화라는

기사가 실리고 나는 방송 팀 단장들의 리셉션에서

얘기치 않았던 부산물의 얻은 샘이 됐다. 이 신문을

나는 방송국과 공보부 장관실에 보내고 귀국 후

대단히 칭찬을 받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를 범아고 말았다.

입장식 실황을 중계방송 할 때는 너무도 피로하고

흥분되어 있었다. 그것은 연일 1인 2역 자연 삼역을

하다 보니 과로가 겹치고 만 탓이었다.

 

“조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여기는 헬싱키의 수도 핀란드입니다.

잠시 후에 약 60여명의 대한의 아들과 딸들이

참가한 제 15회 올림픽 대회의 개회식이

시작 되겠습니다.

 

 

여기는 헬싱키의 수도 핀란드입니다.

 

이 무슨 소린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이지

헬싱키의 수도 핀란드가 무슨 소린가. 그것도 양념으로

두 번씩이나…….순간적으로 아차하고 이마를 쳤다. 물론

이마치는 소리는 중계방송으로 안 나갔지만……. 이

얘기는 두고두고 오늘날까지 얘깃거리로 남아있다.

 

그러나 강준호 선수가 권투에서 태극기를

올렸다던 지 김성집 선수가 역도에서 태극기를 올린

순간을 중계방송 할 때는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였다. 나는

아나운서 생활을 하면서부터 특히 각종 스포츠 중계방송에

열중했다. 농구, 축구, 권투를 비롯한 각종 경기를 …….

그래서 스포츠 관계 인사나 그 당시 선수들을 거의 다

알게 되었다. 지금은 60이 거의 가까운 노인들이지만

서로 만나면 그분들이 지난날에 활약하던

모습을 회상 해 보기도 한다.

 

 

 

  

 

 

 

  5,000미터 결승에서 결승점 불과 30여 미터를 남겨놓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 선두로 나서는 자토백선수.

그 뒤를 파랑스의 미몽선수, 독일의 샤데선수가 다르고 있고 영국의 차타웨이 선수가 넘어져 있습니다.

 

 

자토백 선풍이 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여자 투창에서 자토백 부인인 다나 자토백선수가  최초로 50미터 벽을 넘어

50미터 47의 대 기록을 차지하며 우승을 차지, 헬싱키 대회를 자토백 부부대회로 바꿔놓았습니다.

 

 

 

런던대회 우승이후 한국전에 폭격기 조종사로 참가 27번 출격했던

 미국의  말빈 윗트필트 (936) 선수가 800미터에 다시출전 감격의 2연패를 했습니다.  

 

 

올림픽사상 처음으로 3층으로 된 선수촌 건물들이 집단으로 건설되어 선수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소련은 따로 선수촌을 마련 주변에 철조망을 치고 삼염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동구 공산권 선수들만의 숙소를 차렸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축소.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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