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 중계방송은 1948년 런던 올림픽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으로 시작된 초기 라디오 해외 중계방송의 내역을 보았더니 해방이후 1961년의 5.16전까지 모두 13회를 했습니다. 모두 뜻깊은 중계방송이었고 세월이 지났어도 그 시절을 사시던 분들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는 중계방송이었습니다. 첫번째 중계방송 14회 런던 올림픽은 최근까지 여러차례 얘기를 해서 필요하신 분은 영문자를 클릭하셔서 보셔요.
런던 올림픽! 1948년 태극기 앞세우고 감격의 첫 출전
http://blog.daum.net/jc21th/17781317
두번째 해외 중계방송은 6.25 전쟁중에 열린 제15회 필란드 헬싱키 대회였습니다. 이때도 엔지니어 없이 서명석 아나운서 혼자 중계장송을 했습니다. 그때 중계방송을 서명석 아나운서의 회고담 한토막을 인용했습니다. “조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여기는 헬싱키의 수도 핀란드입니다. 잠시 후에 60여명의 대한의 아들과 딸들이
참가한 제 15회올림픽 대회의 개회식이
시작 되겠습니다.
여기는 헬싱키의 수도 핀란드입니다. 이 무슨 소린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이지 헬싱키의 수도 핀란드가 무슨 소린가. 그것도 양념으로
두 번씩이나…….순간적으로 아차하고 이마를 쳤다. 물론
이마 치는 소리는 중계방송으로 안 나갔지만….
이 얘기는 두고두고 오늘날까지 얘깃거리로 남아있다.
더 자세한 얘기는 다음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최초의 TV방송 아나운서 서명석님 (2) http://blog.daum.net/jc21th/17780685
세번째 해외 중계방송은 일본 도오교오에서 열린 세계 축구대회 극동지역 예선대회였습니다. 6.25직전 방송국에 들어와 그시절 축구중계방송에 능했던 양대석 아나운서와 엔지니어 정경순님이 파견되었습니다. 엔지니어가 해외 중계방송에 파견된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이때 파견된 정경순님은 1947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일생을 방송 기술과 함께 하셨습니다. 회선은 NHK 단파기를 활용했습니다.
네번째는 1954년 5월 1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아세아 경기대회 중계 방송이었습니다. 윤길구님, 최승주님과 엔지니어로 유병은님이 함께한 방송단을 편성해서 파견했습니다. 처음으로 두사람의 아나운서가 파견되었습니다.
윤길구 아나운서는 1943년에 들어와 이때 아나운서 실장이었고 최승주님은1948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여러종목의 중계방송에 능숙했습니다. 엔지니어는 1943년 방송국에 들어온 유병은님으로 기술과 계장이었습니다.
다섯번째은 역시 1955년 12월 12일부터 18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로 윤길구 아나운서와 1951년에 들어와 이무렵부터 야구중계방송을 시작한 황우겸 아나운서와 엔지니어 박능상님이 파견되었습니다. 박능상님은 해방될 무렵 방송국에 들어와 6.25 때 많은 노력을 기울인 분입니다.
여섯번째는 1956년 6월 3일부터 10일까지 일본 도오꾜오 (동경)에서 있은 16회 올림픽 한, 일 축구 극동 예선전에 최승주, 양대석 아나운서와 엔지니어 박경환님이 파견되었습니다. 박경환님은 1947년에 들어와 1950년 6월 27일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피난길에 오르다가 한강 폭파되어 구사일생으로 생존해서 피난길에 올랐던 분입니다.
일곱번째는 1956년 11월 22일부터 12월 8일까지 호주 멜번에서 열린 제16회 세계 올림픽으로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참여한 이래 송순천선수가 은메달을 힉득해서 최초로 은 매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역도에 출전한 김창집 선수가 동메달을 따서 모두 두개의 메달을 획득한 대회였습니다.이때는 장기범, 임택근 아나운서 와 김성열 엔지니어가 파견되었습니다. 장기범, 임택근 아나운서는 여러차례 말씀드렸고 엔지니어 김성열님은 1948년에 들어와 TV방송 개국 여의도 센터건설 등에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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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번 올림픽과 임택근 아나운서 방송추억 http://blog.daum.net/jc21th/17780286
최초의 은메달 송순천 선수(오른쪽)
여덟번째는 1958년 5월 22일부터 6월 2일까지 일본 도오꾜오(동경)에서 열리 제 3회 아시아 경기기대회입니다. 이 대회에서 일본, 필리핀에 이어 종합순위 3위를 했고 8개의 금메달을 땄습니다. 금메달리스트는 마라톤의 이창훈, 멀리뛰기 서영주, 자전거도로 이홍복, 역도 프라이급 이장우, 페더급 이택영, 권투 라이트급 정동훈, 웰터급 김기수, 자전거 종합 1위였습니다.1951년 동기 강찬선, 임택근 아나운서와 엔지니어 이중집, 김성배님이 파견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엔지니어 두사람이 파견된 대회입니다. 이중집, 김성배님은 1948년 방송국에 들어와 6,25 피난시절을 거쳐 방송에 힘을 기울였고 김성배님은 6.25방송 유공자 중 한분이기도 합니다. 그때의 얘기는 강찬선 아나운서 회고담으로 가름합니다.
강찬선 아나운서 회고담
30년 동안 지내온 아나운서 생활에서 몇 가지 추억에 남는 것 들을 간추려보면……, 작년 말(1982년) 뉴델리 아시아 경기실황의 TV중계실황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인데 꼭 24년 전인 1958년 일본 도오꾜오에서 열렸던 제 3회 아주 경기대회 때의 일이었다. 그때 아나운서 2명, 기술자 두 명, 모두 네 명으로 구성된 중계반이파견되었는데 임택근 아나운서와 나는 제 3회 아시아 경기대회 파견 대한민국 방송단 단장이라는 어마어마한 감투를 쓴 해의 첫 나들이였다. 특히 이창훈 선수가 마라톤에서 1등으로 꼴인 하던 중계방송의 감격은 지금도 새롭다.
마라톤 금메달 리스트 이창훈선수
“지금 스탠드의 8만관중이 긴장하는
가운데 스타디움 남쪽 문을 주시하고 있습니다.동쪽 스탠드에서박수가 터져 나옵니다. 지금 막 이창훈 선수가 그 용자를 나타냈습니다.가슴에 태극기를 단 대한의 건아 우리 이창훈 선수가 지금 당당히 메인 스타디움에 1위로 뛰어 들었습니다.” 하고 외치고 나서 이창훈 선수의 모습을 보니그게 아니었다. 기진맥진, 허둥지둥 올렸던 다리가 다시 그 자리에 내려지는 것 같은- 당장에라도 쓰러 질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경기장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의 흐름이 마치 10년과도 맞먹을 그러한 순간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와 같은 이창훈 선수의 모습으로 나는
중계방송 담당이라는 입장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창훈 선수 여유 있게 지금 제 3코너를 들어와 제4코너에…….
“이창훈 만세” “대한민국만세” 그것은 중계방송이라기보다 금방
쓰러질듯 이를 악물고 금방 쓰러질 듯 한 이창훈 선수에게 보내는격려의 말이었다. 결승 테이프를 끊은 이창훈 선수는
그대로 쓰러지고 의무 반에의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것을 보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 시상식장면, 아시아 경기연맹 조직위원장이었던 이상백씨가 이창훈 선수목에 금메달을 걸어주고 이어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이와 같은 광경을 중계방송 석에 같이 앉아 바라보면서 왕년의 마라톤 왕 손기정씨는 “내가 지난날 배르린 올림픽에서
우승을 했으나 그때 올라가는 깃발은 일장기였고 울려나오는 국가는기미가요였습니다. 그리고 올림픽 파견을 위한 선발전에서 내가 1등으로 꼴인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손기정씨의 눈에는 눈물이 서려 있었다.
제3회 아시아 여자농구 중계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임택근 아나운서 정경순 엔지니어
1959년 4월 18일부터 25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4회 아시아 여자농구대회는 임택근어너운서와 정경순엔지니어가 파견되었는데 임택근 아나운서가 열병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신력으로 중계방송을 무사히 마쳐 하제거리가 되었습니다. 임택근 아나운서의 "열병에 들떴던 중계방송" 이라는 글 한편을 인용합니다.
1959년 4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농구 리그전엔 한국, 자유중국, 필리핀, 홍콩, 일번 등 5개국이 참가했다. 마닐라에 채재하는 20여일간 한증막같은 지는듯한 무더위와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목조거물인 경기장 시설도 선풍기가 대 여섯 돌어 길 뿐 냉방장치 하나 되어 있지 않은 한증막 속 같이 엉성했었다. 이 어려운 조건 속에서 우리 한은 선수들은 연전 연승이었다. 단일 경기여서 중계방송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으나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고 교대 아나운서도 없이 혼자 중계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그런데 2차 리그에서 제일 중요한 자유증국 팀과의 대전을 하루 앞두고 나는 그만 열병에 쓰러졌다.
먹지도 못하고 텅빈 호텔 방 안에서 밤새 심한 고열을 발하며 헛 소리를 하면서 신음했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았다. 그 이틋날 게임시작 30분전 정경순 (엔지니어)씨 부축을 받고 간신히 경기장에 나갔다. "지금 고국에서는 이 중계방송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쓸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방송 해야만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했다. 나는 옆에 있는 기술담당 정경순씨에게 말했다. "만약 내가 중계방송 하다가 쓸어지면 정형이 대신 마이크를 잡으시오." 경기가 사직되자 나는 정신없이 지껄였다. 방송이 끝났을 때는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온 몸이 땀에 함빡 젖어 있었다. 한국은행은 8전 8승 전승의 기록으로 아시아의 왕자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나는 무사히 내 임무를 끝냈다.
열번째 해외 중계방송은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 야구대회로 황우겸 아나운서와 정유언 엔지니어가 파견되었고 VUNC에서 근무하던 홍양보 아나우서의 도음이 컸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방송 1959년 가을 호에 게재 된 황우겸 아나운서 글이 있어 인용합니다.
제2회 야구대회 (1955년 12월)가 열린 필리핀 마닐라 시는 먼 곳이기 때문에 관연 내목소리가 국내에까지 들릴 수 있을까. 반신반의 했었다. 경험이 없는데다 전파에 깊은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아나운싱을 잘하려는 욕심 때문에 내 목소리가 고운 상태로 수신될 수 있을까. 가 걱정되어 처음 등장하는 국외서의 중계방송에 소리를 너무 크게 질렀었다. 더욱이 경기장에서 시시각각으로 진전된 4개국의 희비 얽힌 장면 묘사에는 흥분 안 할 수가 없었고 민족의식을 북돋우느라 냉정을 찾지 못하고 마구 큰 소리를 질렀었다.
후에 생각 해 보니 잘한 중계방송은 못된 듯 해 웃음이 절로 났다. 마닐라에는 윤길구 선배를 모시고 갔기 때문에 불안스럽지 않았지만 기후와 음식이 맞지 않아서인지 그곳에 도착한 날부터 병석에 눕게 되었다. 물론 윤길구 선배 혼자서도 중계방송을 잘 할 수는 있었으나 외국에서 중계라는 책임감 때문에 나는 연방 주사를 맞아가면서 방송을 하게 되었다. 정신 차릴 사이 없이 접전하는 우리 대표 팀과 필리핀과의 대전 때 우리 대표 팀이 리드 하다가 역전 당하기를 서너 번……. 분통한 장면이 연이어 전개되지 않은가. 가뜩이나 몸이 아파 짜증도 나는데 우리 선수들이 공연한 실수로 역경에 빠지게 되니 그 순간 메모하던 만년필을 나도 모르게 휙 내 던져 버렸다. 국제경기의 경험이 없었던 경솔함이었다.
그러나 제3회 아시아 경기대회 (1959년 9월 동경) 때는 4년 전 미흡했던 점들을 무난히 해 낼 수 있었다. 그 예로 동경 대회 때는 거리가 가깝다는 요인도 있었지만 내가 중계하는 것이 곧 송파 되는 것을 수신하면서 방송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닐라 대회 때처럼 목소리를 높여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았거니와 마이크 감도 조절을 생각하면서 아나운싱 할 여유도 있었다. 또한 마닐라 대회 때는 승패에만 주안을 두어 감정에 휩쓸린 흥분상태였으나 동경대회에서는 20대 1이라는 큰 차로 일본에게 참패당할 때도 아나운서로서 끝내 감정을 사로잡히지 않고 침착성을 잃지 않았던 것은 역시 경험이 말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 경기에 우리 팀이 일방적으로 압도당해 패해가는 께임 내용을 중계 할 때는 아나운서의 심리도 무척 비참하고 괴롭기만 했다.
1960년 8월 24일부터 9월 11일까지 이태리 로마에서 열린 제 17회 올림픽 대회는 11번째 해외 중계방송으로 임택근, 이광재 아나운서와 김성배 엔지니어가 파견되었습니다. 1956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1958년부터 스포츠 중계방송에 두각을 자타내기 시작한 이광재 아나운서는 이 대회를 게기로 임택근 아나운서와 더불어 그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로마 올림픽은 84개국 5,343명으로 이때까지 가장 많은 남녀선수가 참가해서 17개종목 150개 경기가 거행되었고 찌는
듯한 무더위속에서 마라톤 코스를 맨발로 달린 아배배가 아프리카 최초로금메달을 안겨주어 일약 세기의 영웅으로 탄생했던 대회입니다.
아래 영문자를 클릭하시면 자세한 얘기가 있습니다,
로마 올림픽과 이광재 아나운서의 중계방송 추억 http://blog.daum.net/jc21th/17780285
1960년 12월 11일부터 17일까지 일본 도오꾜오에서 얼린 제17회 올림픽 극동 예선 축구전은 전영우 아나운서와 이승우 엔지니어가 파견되었습니다.
박신자 일행 농구선수단 환영회 출처:서울시 언론담당관 촬영일:1967-05-07
5.16전의 마지막 해외 중계방송은 1961년 2월 16일부터 3월 1일까지 일본 도오꾜오, 나고야 등에서 열린 상업은행 여자 농구 원정경기였습니다. 강찬선 아나운서의 회고담으로 대신합니다. 61년 봄 상업은행 여자농구팀의 일본원정에 동행 중계방송을 했던 일도 하나의
유쾌한 추억이다. 도오꾜오를 시발로 나고야, 오미야,
도요하시, 교도, 오쯔등 각지를 순회하면서 상업은행 팀이
9전 전승의 기록을 새웠거니와 특히 박신자 선수의
멋진 경기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사카에서 일본 최강인 나찌보 팀과의
대전 때는 엎칠락, 뒤칠락 하는 시소 끝에 막판에 가서는
우리가 리드를 뺏겨 패색이 짙어졌다. 더구나 일본 관중들의와ㅡ 와ㅡ 하는 열띤 함성에 우리 선수들은위축되어 실수가 속출했다. 그러자 박신자 선수의 독단장이 벌어졌다. 장거리 중거리 슛을 쏘고 재빨리 달려 들어가 노-꼴인 볼을 리바운드 하여 잡아넣고 적이 바싹 달려 들면 요리 저리 재치 있는 드리블로 상대방의 파울을 유도하여 자유투를 얻어 득점하고 그야말로 종횡무진 능수 능란한 프레이로 역전승을 거두자 관중석에서도 호ㅡ 호 ㅡ 하는 감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박신자 선수의 전성기 장충체육관에서 한일전이 벌어졌을 때 박신자 선수의 멋진 경기를 지켜보던 어떤 관객이 바로 중계석 뒤에서 “야 저건 농구가 아니라예술이야 예술” 하고 감탄하던 일도 생각이 난다. 그런데 제 3회 아시아 경기나 상은 팀의 일본 원정 때나 모두 아직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되기 이전의 일이라서 더울 기억에 새로운지 모르겠다.
가난하던변방의 나라 대한민국이 해외중계방송을 하는것은 쉬운일이아니었습니다. 달라 한분이라도 쓰려면 대통령의 친필 사인을 받아야 할 정도로 달라를 아끼던 시절이었 습니다. 또 지금처럼교통통신이 발전한 것도 아니어서 오고가는 것도 힘들고방송상태도 좋질 않았습니다. 그리도 그 방송을 들으며 즐기고 환호하며 마음을 하나로 모아 대한민국 긍지를 가지며 살았기에 큰 국제 경기가 있을때면 중계방송을 하며 국민과 함께 했습니다. 그때는 텔리비젼방송도 없었고 CBS외에는 만영방송도 없었을때라 국민들은 KBS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해외중계방송을 들었습니다.
1956년 멜바른
1960년 로마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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