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방송인 노창성! 최초 아나운서 이옥경! 최초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노라노 패션 60년, 최초방송인 노창성 이옥경
이 땅에 방송과 디자인의 현대문명을 들여온 선구자 가족입니다. 방송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시절! 1924년 봄, 이 땅에 방송국을 설립하기위해 힘을 기울인 분, 이 분이 바로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 선생님 으로 방송국 설립 때는 방송 기술자였지만 우리말 전담방송을 하던 1932년에는 방송경영의 최고 책임자 사업부장이 되었고 1938년 함흥방송국이 문을 열 때 한국인 최초의 방송국장이 되었습니다.
1939년 제 2방송부가 새로 마련되었을 때 제 2방송부장이 되었지만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결국 그 자리를 물러나야만 했던 님은 해방된 조국에서 1949년 11월 서울 중앙방송국장이 되어 6.25 전시 중앙방송국장으로 임무를 수행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방송관리국장이 되어 방송 최고책임자로서 임무를 수행 하던 중 지병으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지금도 KBS아나운서실에 걸려있는 아나운서 족보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옥경 아나운서는 이 땅에서 정식 방송이 시작되기 전 1926년 7월부터 방송전파에 목소리를 실었고 1927년 2월 16일 1시 이 땅의 첫 방송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 무렵에 태어난 노창성, 이옥경의 둘째 딸 노명자 (예명 노라노)는 1947년 미국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돌아와 1949년부터 최초로 패션 디자인을 시작해서 그로부터 6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1952년에 시작된 「노라노의 집 」으로부터 60년을 맞는 올해 (2012년) 5월 23일부터 6월 2일까지 서울 청담동에 있는 호림미술관에서 60년 회고전을 엽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 매주 일요일 아침 7시 10분부터 8시까지 50분간 방송되는 KBS 한국 현대사의 증언 TV자서전 프로그램에 2회 계획으로 오늘 (5월 6일) 첫회방송을 했습니다.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는 첫 회 앞부분의 일부입니다. 13일 2회가 방송될 예정입니다. KBS홈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다른 얘기들은 본 블로그에 여러 편의 글이 올라 있어서 이곳에 링크하는 것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NORA NOH) 패션 70년 http://blog.daum.net/jc21th/17782066
경성방송국을 창설한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397
노라노가 쓴 최초방송인 노창성, 이옥경 http://blog.daum.net/jc21th/17780072
최초 아나운서 이옥경의 어린 시절 http://blog.daum.net/jc21th/17780048
경성방송국과 최초 아나운서 이옥경 http://blog.daum.net/jc21th/17780398
우리나라 최초방송 1924년 12월 9일! http://blog.daum.net/jc21th/17780388
가수 박단마와 최초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슈샨보이
KBS 홈에서 옮겨온 글
KBS에서 보도자료로 올린 글을 참고가 되실까 해서 옮겼습니다. 영문자를 클릭하시면 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office.kbs.co.kr/cyberpr/793598
<한국현대사증언 TV자서전 - 디자이너 노라노 -1부> 5.6 | 보도자료 2012/05/04 10:13
KBS 시사/교양 <<한국현대사증언 TV자서전>>
(한국의 코코샤넬 디자이너 노라노 _ 1부)
방송일시: 2012년 5월 6일 (일) 오전 7시 10분
1956년 국내 최초 패션쇼 개최
1963년 국내 최초 기성복 패션쇼 개최
1978년 성공적인 미국 패션계 진출
최초에서 최고가 된 대한민국 패션의 역사!
엄앵란의 <햅번 스타일>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펄시스터즈의 <판타롱>
1960-70년대 패션계 유행을 선도한
디자이너 노라노!
대한민국 패션을 이끌어온 그녀가 들려주는
60여년 한국 패션 이야기를 들어본다.
◆ 이혼녀 ‘노명자’에서
‘노라노’로 다시 태어나다. ◆
“내가 여기서 구박을 받으면서 시집살이를 해야 옳으냐.
저 사람들을 위해 식모살이 하면서 희생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제 새 길을 시작 한 거죠.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가 이혼을 한다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 문제예요. 남들은 쉽게 생각하지만 본인한테는 죽느냐 사느냐 문제만큼 힘든 거예요.”1928년 노라노는 경성방송국 창립자인 아버지와 아나운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일본정부는 남자에게는 징용을 여자에게는 정신대 징집을 강요하고 있었다.
노라노는 정신대 징집을 피하기 위해 1944년 경기여고 졸업과 동시에 일본군 한국인 장교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결혼 일주일 만에 남편이 출정을 떠나자시댁에서는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남편이 죽으면 나오는 보험금 때문이었다. 2년 뒤 남편이 무사히 돌아왔지만 시댁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컸던 노라노는 이혼을 결심한다. 열아홉 살에 이혼녀가 된 노라노는 집에서 독립하기 위해 은행 비서로 취직한다. 얼마 후 자신이 만든 드레스를 입고 은행관사 파티에 간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권유받는다. 이혼 후 새로운 삶을 꿈꾸던 노라노. 그녀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하고 194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노명자’라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노라노’로 다시 태어난다.
◆ 노라노 패션디자이너가 되다! ◆
1947년 미국 스포츠 웨어 회사의 견습생으로 취직한 그녀는 체계적인 디자인 공부를 위해 프랭크 웨건 기술전문학교 입학한다. 노라노는 공장에서 실전을 익히고 학교에서는 이론을 공부하며 패션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간다. 주경야독 패션 공부를 하던 그녀는 뜻밖의 문제에 부딪힌다. 옷을 만드는 공정이 분업화된 미국과 달리 한국은 모든 과정을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라노는 공장의 각 부서를 돌며 미싱(바느질)을 시작으로 마무리 작업인 프레싱(다림질)까지 모든 공정을 직접 경험한다.기본기를 철저히 익힌 노라노는 1949년 귀국한다. 유학시절 배운 솜씨로 의상실을 개업한 그녀는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로 고민하던 외국인과 상류층 부인들을 대상으로 파티복을 만들며 패션 디자이너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 피난지에서 무대의상을 디자인하다. ◆
파티복을 만들며 디자이너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노라노에게 시련이 닥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다.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으로 넘쳤던 부산에서는 전쟁의 고통을 잊기 위한 각종 쇼가 열리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무대의상을 만들게 된 노라노는 미국에서 배워온 패션기술로 쇼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피난생활을 끝내고 상경한 그녀는 부산에서 쌓은 의상제작 경험으로국내 쇼비즈니스의 중심인 미8군에 입성한다. 노라노는 유명가수 박단마, 저고리 시스터즈 등의 가수는 물론 연극, 무용, 영화 주인공의 의상을 만들며 디자이너로서의 영역을 넓힌다. 그리고 세련된 디자인과 실용성을 갖춘 그녀의 옷은 일반인들에게 까지 입소문이 난다. 1952년 그녀는 정식으로 <노라노의 집>을 개업하며 패션디자이너로서 입지를 굳힌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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