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5월호 방송지에 실린 월탄 박종화선생님 글입니다.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1년에 가신 선생님은 이 땅에 방송이 탄생하던 때부터 방송인과의 친교, 방송원고 집필, 방송출연 등을 통해서 방송과 인연을 맺어왔고 대표적인 문학가로, 지식인 으로 대접받던 분이었습니다. 이 글은 방송 초창기부터 1950년대까지 방송을 이해하는 좋은 내용이어서 전문을 옮겼습니다. 대부분 한자로 쓰여 있었지만 한자로 옮겨야 할 필요가 있는 내용 외에는 한글로 바꾸어 썼고 한자로 옮겨야 할 글은 한글과 함께 썼습니다. 문법이나 내용은 수정치 않았기에 지금과는 문법이 다소 다를 수 있고 약간의 내용이 실제와 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이해 해 주셨으면 합니다.
월탄 박종화 선생님 글, 방송의 금석(今昔) -일제강점기부터 1957년까지-
(1)
우리나라의 방송국이 새로 설치되고 청취자가 라디오를 월부로 사다가 집에 놓기 시작한 것이 벌써 30년 전의 옛일이고 보니 어느듯 반반세기의 오랜 일이라 감회가 깊은 대다가 요사이는 「텔레비죤」방송국까지 생겨나서 사람의 얼굴과 동작까지 앉아서 보게 되니 시대의 변천과 과학의 진보의 더한층 감회가 깊다. 영성문안 방송국이 처음 방송국이 완성 되었을 때 나는 회월(懷月) 박영희군 노작(露雀) 홍사용군과 함께 초대를 받아 처음으로 방송국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이때 초대에 방송국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은 모두다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면 연극인들이었다. 고범 이서구, 최승일, 석금성, 안석영, 연학년, 복혜숙 이런 분들의 얼굴이 생각에 떠오른다.
이 무렵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고범의 방송소설과 「라디오 드라마」와 명기 명창들의 가창이었다. 이 시절만 해도 서울에는 명기 명창이 많았다. 남도단가에 김소희, 창부타령에 신해중월, 사발가의 박채봉, 죽기사에 김진홍, 이밖에도 삼설음(三說音) 낭독에 이문원, 악기로 가야금 산조에 심상건, 창극 이동백들은 모두 다 국보적 존재요 이들의 푸로는 초하(初夏와 심동(深冬)에 청취자들의 촌음을 다투어 경청하는 좋은 행악이었다.
연극인들의 극단은 경영이 아니 되고 유지가 되지 못하니 토월회이후에 역량있는 작가와 연출들은 「라디오 드라마」에 정열을 기울였다. 나는 친우들을 가끔 찾이면 그들은 안방에서 「라디오 드라마」방송을 연습하고 있었다. 문외한인 나 연만 그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시간 가는 것을 잊으며 즐거이 듣고 있었다. 이때 「라디오 드라마」를 위한 클럽들은 연출에 박진, 홍노작(露雀), 등장배우로 진장섭, 그의 아내 백월, 안석주, 복혜숙, 박재행, 이백수, 이소연, 이정호 모두다 일류들이었다.
진지하고 정열이 있고 고답 헌신적인 까닭에 요사이 방송극 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았다. 요사이는 일류 음악가의 성악을 여간 해서는「라디오」로 들을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일제시대의 일이라 훌륭한 성악가들도 자기의 예술을 발표할 기회가 없으니 자연히「라디오」를 통하여 가요를 발표하는 일이 많았다. 홍난파, 이흥열, 이관옥, 정훈모, 김순애. 이런 분들의 작곡과 가창이 일류시인의 작사로 되어 발표되었다. 무애(無涯) 양주동형의 「어머니 마음」이라는 명시도 이흥열씨의 작곡이라 기억된다.
나도 그 무렵에 「정월 대 보름」이란 민요를 지어 소멸되어가는 민속을 노래했었는데 이관옥씨가 「라디오」로 어린이들에게 지도 해 주신 기억이 난다. 다음으로 방송국 직원인 연포 이하윤(異河潤), 안서 김억, 청천 김진섭, 이계원, 영운 모윤숙, 노천명, 이혜구, 송영호, 최요안, 유호, 모두 굴지의 시인이요 소설가요 학자요 기획가로 일부당궐(一夫當闕) 만부(萬夫)가 섭복(拉伏)하는 애주가들 이었다. 이러므로 이러한 시인들을 통하여 시낭독과 명시 낭송이 고조되었다. 「라디오」는 한국 신문예 부흥기에 있어서 음악과 연극과 시와 서설로 커다란 계몽의 임무를 완성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2)
반도산하에 8월 15일 정오 돌연히 일장기가 떨어지고 무장한 일본 패전군의 기세가 민민(憫憫) 했을 때 방송국의 임무는 참으로 컸던 것이다. 희구(喜懼)의 교착(交錯)으로 질서가 잡히지 못한 이때 「라디오」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이름으로 삼천리 방방곡곡에 민심을 수습시키는 큰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일본군과 일본인은 아직도 삼천리 구석구석에 풀기는 죽었으나 악에 바쳐있고 미군은 아직 상륙을 하지 못했는데 소련군은 벌써 평양에 들어왔고 좌익의 난동은 요원의 불길 같은데 임시정부와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박사는 까마득 소식이 없고 이러할 때 방송국은 실로 신중한 태세를 잘 지켜서 민심을 조금도 교란케 아니하였다. 이것은 당시 방송국의 공로라 아나 할 수 없다.
이 뒤를 이어 미군이 상륙한 뒤에 방송국 관리권은 미군정으로 돌아갔거니와 우리는 임정요인을 비롯하여 이승만 박사 귀국의 일성인 「한데 뭉쳐야 산다.」이 귀중한 금언은 아직도 우리 귀에 쟁쟁한 듯하다. 6.25 사변이 돌발되자 「방송국」은 자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정부가 수원으로 피난 한 뒤에도 28일 오전 3시까지 피를 토하는 애국의 방송을 했던 것이다. 3시 즉후에 정훈과장인 김대령은 빨지산의 총탄에 최후를 마쳤고 방송국은 그만 적의 수준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기계는 탕진이 되고 1.4후퇴 이후에는 부산 지방방송국 일우(一隅)에 중앙방송국이 있었다. 환도 후에 폐허초토에서 파괴된 기구를 재건하여 전력사정도 흡족치 못한 처지에 오늘의 중흥을 이룩한 것은 당국과 직원들의 열의의 결정이 아닐 수 없다.
(3)
환도직후인 4년 전에 비하여 방송국의 푸로는 시설과 함께 점차 안정과 약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정부 예산의 부족으로 인하여 방송국 직원의 대우와 여기에 출연하는 인사에 대한 사례가 충분하지 못한 것도 어쩔 수없는 현실이다. 위선 정부는 산하직원에 대하여 적당한 생활비를 보장 해 준 뒤에 전심(專心)을 경주하여 책임을 완수시킨다면 모든 일은 괄목할 만큼 향상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먼저 이런 방법을 취하려면 정부예산에만 의존하지 말고 방송국은 신문사나 잡지사에 유료신문과 잡지를 간행하듯이 전국적으로 청취자에게 적당한 청취요금을 청구하여 직원의 생활을 보장 할 뿐만 아니라 일류 예술가들을 총동원하여 우대하는 예금(禮金)을 기여하면서 좋은 푸로를 구성시킨다면 이것은 일석이조의 양책이 아닌가 한다.
방송료를 청취자가 지불하는 것은 일제시대 때도 이행 했던 것이라 약간의 요금을 낸다 해서 「라디오」를 아니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래 정부에서 지변하는 국고비와 민간에서 청취료를 받는 금액을 기간으로 하여 직원을 우대하면서 현재 이상의 좋은 프로를 구성시키는 등 방송 사업은 비로서 약진상을 보이는 동시에 「오락푸로」「교양푸로」「문예푸로」「뉴스해설」 등이 좀 더 훌륭히 결실 되리라고 믿는다. 삼가 당국 여러분들의 일찬(一餐)을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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