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낮 12시 뉴스가 끝나면 송해님의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노래자랑시간이 되었음을 알리고 즐거운 한나절이 됩니다. 이 프로그램을 거슬러 올라가면 1955년에 이릅니다. 6.25전에도 프로그램을 시도 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두번에 그친 프로그램이어서 노래자랑의 기원은 1955년 부터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라디오에서 했지만 TV챂으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라디오와 TV로 함께 방송했습니다. 요즈음도 인기가 높은 프로그램이지만 라디오시대에는 이 프로그램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지역방송에서도 이 프로그램을 했고 가수 등용문으로도 활용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시작 할때 1955년 음악계장으로 계셨던 김창구님이 그때의 얘기를 자세히 기록 해 놓은 글이 있어서 옮깁니다. 이 글 읽으시고 노래자랑에 관한 더 자세한 얘기는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셔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0321
노래자랑을 시작 하던 날 1955년 「땡의 유래」김창구님
부산방송국에서 10Kw방송을 하면서 중앙방송국 행세를 하던 몇 년 전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어떻게 그 아비규환의 흙탕물 속에서 방송도 하고 목숨도 부지 할 수 있었는지 내 스스로도 대견하기 이를 데 없는데 아무튼 5년 세월을 그럭저럭 보내고 1955년 서울로 귀향 했을 때는 어느새 음악계장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 돌아와서 더 한심했다. 조선일보사 뒤편에 있던 6.25전의 중앙방송국은 폐허가 되어 버리고 음악프로를 제작하면서 내 손 때가 묻었던 피아노는 인민군이 도망가면서 어디론가 가져 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수천 매의 레코드도 온데 간데없다. 할 수 없이 나는 미군방송 AFKN을 찾아가서 사정을 말하고 레코드를 빌리기로 했다. 그 레코드 몇 장을 옆구리에 끼고 당인리에 있는 연희송신소로 가서 그곳에서 명색뿐인 음악방송을 이어갔다. 이 길을 얼마나 왕복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중 기술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우선 깨지고 망가진 방송기기를 고쳐서 50Kw방송을 송출 할 수 있게 되고 딴 스튜디오 중앙방송국 바로 이웃에 있던 대한방송협회 건물을 복원해서 그럭저럭 전상방송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제자리를 찾은 방송국 직원들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고 누구의 명령이나 지시는 없었지만 이심전심으로 더 좋은 방송을 하자는 결의가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에 용솟은 치는 그런 때였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고 새로운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누구의 제안이었는지 기어기 없지만 공개방송을 하자는 말도 이때 나왔다. 이때가지는 실연이라고 해서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을 중계방송 하는 일은 더러 있었지만 소위 현대적인 공개방송은 없었다.
일본 NHK에서 “미쯔노 우다“(우리말로 하면 노래고개 세 고개다.) 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을 때였으니까 아마 이 프로를 들어본 사람이 아이디어를 냈던 것 같다. 이 프로는 공개방송으로써 출연자가 세 가지 노래를 불러 다 넘기면 상을 주는 것이었다. 우리의 노래자랑을 말하면 이 프로를 커닝한 것이다. 처음 제목을 부치려고 여러 사람이 의논하는데 일본 프로를 그대로 직역해서 노래고개 세고개로 하자는 말도 나왔지만 누군가가 그것은 너무도 일본 것을 모방 한 것 같으니 노래자랑이 좋겠다고 제안해서 1955년 이 땅의 노래자랑이 처음으로 탄생되었다.
노래자랑 공개방송의 첫 어려움은 장소였다. 요즘도 공개홀로 사용할만한 것을 찾으려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6.25직후 서울에서 공개방송을 할 만한 장소를 얻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이나 힘이 들었다. 궁하면 통한다던가. 마침 스무고개를 담당하고 있던 문시형씨가 동화백화점 건물주와 알고 있으니 그분과 의논 해 보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공덕동 같은 마을에 살아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사장의 이름은 강일우시다. 강 사장은 시쳇말로 끼가 있는 분 이었다. 물론 백화점 얀에 영화관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우리가 노래자랑과 스무고개를 묶어서 공개방송을 하려고 하니 장소를 대여 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즉석에서 영화관을 무료로 쓰라는 것이었다. 장소가 해결되어 구체적인 제작방법을 의논하게 되었다. 먼저 누가 심사를 맞고 어떻게 진행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심사는 음악대학 성악과 출신인 음악계장이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소위 클래식을 전공한 음악대학 출신이 대중가요 심사를 맞는다는 것에 대해 적지 않게 당황했으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길로 책방을 찾았다.
그 당시 광화문 네거리에는 서 너군 대의 책방이 있었다. 대중가요곡집을 세권 샀다. 왜냐 하면 어떤 대중가요가 있는지 그리고 그 대중가요들이 가사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것을 모조리 외우지 않으면 안 되다 때문이다. 출연신청자에게 처음에는 자유곡을 부르게 한다. 잘 못 부르면 “땡”하고 불합격을 알려준다. 만일 합격이면 “딩동댕”으로 합격임을 알려주고 심사위원장의 지정곡을 즉석에서 내 주어야 한다. 심사위원장은 당연히 음악계장이다. 혼자서 심사하고 딩동댕도 치고 또 지정곡도 정해서 아나운서에게 넘겨주는 1인 3역이었다. 따라서 나는 또 다른 노래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나운서는 당시 제일 인기 있는 장기범 아나운서로 정했다. 다음은 차임을 준비해야 했다. 마침 구황실 아악부 출신인 이병우씨가 철 파이프를 세워서 치면 실로폰 같은 소리를 내는 악기를 개발 했다고 해서 그것을 사기로 했다. 땡과 딩동댕 만을 울리자면 도 미 솔 만 있으면 되지만 이 씨가 개발한 것은 12개의 파이프로 되어 있어서 그 1조를 살 수밖에 없었다. 반주는 아코디언에 노명석씨가, 기타에 손석우씨, 트름본에 송민영씨를 정했다.
방송사상 최초의 노래자랑 공개 방송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광고방송을 몇 차례 하고 나니 당일 동화백화점에는 출연자와방청자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너무 사람이 많이 들어와서 출입문을 다치고 나니 유리를 깨고 다친 문을 부수고 노도처럼 밀려 들어 왔다. 속수무책이었다. 입추의 여지가 없어 공개방송을 진행하기 어려웠지만 첫 약속을 어길 수도 없었다. 사회를 맡은 장기범 아나운서에게 녹음개시 신호가 같다. 그런데 당대 제 1 인자였던 장 아나운서가 부들부들 떨고 있지 않은가?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실 무대에 처음 서게 되면 조명은 비치는데 객석은 불을 꺼서 자세히 보이지 않고 부엉이 눈 마냥 눈동자만 역광에 반짝 거리니 떨릴 수밖에. 딩동 댕 합격한 출연자에게지정곡을 주기 위해 8절지만한 메모지에 큰 글씨로 곡목을 적어 내가 넘겨 주었는데 장 아나운서는 공개방송이 끝난 후 너무 떨려서 그 글씨가 잘 안 보이더라고 말 한 적이 있다.
나는 떠 어떠했는지. 무대 위에 책상을 놓고 옆에 길이가 1M쯤 되는 차임을 세 가닥 올려놓고는 나무로 만든 방망이로 땡과 딩동댕을 치는데 때리는 힘이나 거리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힘껏 때리는 바람에 딩동에서 파이프가 “걸이”에서 떨어져 나가 뒹군 해프닝이 있었다. 스튜디오 안에서 쓰는 조그마한 차임에 줄을 이어 확성장치를 하면 훌륭하게 쓸 수 있었을 텐데 큰 장소라고해서 그런 미련한 짓을 했던 것이다. 또한 출연자들을 사전에 비공개 예선을 한다던 가를 안 하고 우선 급한 데로 올라와서 노래를 부르게 하니 신청자는 많고 시간은 없으니까 “백마야 우지 마라..........”하고 시작하면 땡, 여자 출연자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하고 시작하면 땡, 그러니 방청자들은 노래 부르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언제 땡을 치는가만 주목하고 있었다.
그때 가장 많이 불리던 노래는
남자는
0.신라의 달밤 0.백마야 우지 마라 0.방랑시인 김삿갓 0.페루샤 왕자 등이며
여자는
0.봄날이 간다. 0.아메리카 차이나 타운 0.단장의 미아리 고개 등이었다.
회를 거듭하자 노래자랑의 인기는 전국을 휩쓸었으며 지방방송국에서는 자기네로 와서 해 달라는 요청이 많았지만 그중 지금도 기억에 깊이 남아있는 출장 노래자랑은 대구에서 있는 비행단에서의 일이다. 비행기를 보낼 터니 자기네 비행단 장병들을 큰 격납고에서 위안 해 달라는 요청이다. 그때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참으로 구미가 도는 일이었다. 스무고개와 노래자량 약 30명이 전용비행기로 대구에 가서 공개방송을 했는데 그때 아나운서는 임택근씨였다.
첫 출연자로 나와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을 불러 딩동댕이 된 여자가 유난히 잘 부르기에 나중에 따로 불러 물었더니 공군의 교환수라고 한다. 내가 방송국 전속가수로 써 주겠다고 하니 너무 좋아하여 뒤에 정말 KBS전속가수가 되었는데 그 여자가 앵두나무로 중견가수가 되었던 김정애(金貞愛)양이다. 봄가을에 유원지에 가노라면 서로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고 잘 못 부르면 너는 땡이야 하는 소리를 들을 적마다 저 땡은 내가 시작 한 것인데…….하는 생각을 요즘도 한다.
부산 피난시절의 사진으로 2 이상송, 3 송영호, 5 강찬선, 6 노천명, 7 김창구, 8 방필주, 9 김용환, 10 이상만, 11 안병원, 13 조백봉,14 강정수, 15 문시형, 17 배준호, 19 최요안, 21 강익수, 그리고 공승규, 조규택님 등이 함께 한 사진인데 오래된 사진이라 몇분은 얼굴을 확실히 기억 할 수 없어 확인되는데로 올리겠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
'기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혜숙 회고록, 최초의 영화배우, 최초의 방송성우, 방송할머니, (0) | 2012.04.02 |
---|---|
KBS사가, 37년의 추억이 담긴 그때의 그 사가 2011년 2월까지 부른 김성태 곡 (0) | 2012.04.01 |
일제 강점기 심훈님이 쓴 조선 영화인 언파레드-1931년- (0) | 2012.03.19 |
공사창립 39주년에 초청한 KBS 전, 현직 사장과 박경환 이사 (0) | 2012.03.14 |
김문경 아나운서 경성방송국시절 방송 회상기 (0) | 2012.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