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여름 호 방송지에 실린 김문경 아나운서의 글입니다. 김문경 아나운서는 우리말 전담방송 제2방송을 앞두고 1932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6년간 근무했습니다. 처음에는 두 여자 아나운서가 있었지만 최정석(아지)아나운서가 2년 후 방송국을 떠나면서 한 사람의 여성 아나운서가 4년간을 방송했습니다. 김문경 아나운서는 1981년 미국으로 이민 하후 말년을 뉴욕의 플러싱 너서 홈에서 지나시가다 2007년 4월14일 향년 95세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2007년 5월 1일자 미주방송 참조) 김문경 아나운서가 근무하던 시절의 방송을 이해하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되어 올립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방송지 1957년 2월 5월호 이혜구, 송영호, 황태영, 이현님등이 참여한 지상좌담회에서 1938년부터 방송했던 이현님의 글 한 토막을 올립니다. 김문경 아나운서에 관한 글을 더 보시려면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셔요.
일제 강점기 우리말 여자 아나운서와 최아지(兒只), 김문경 http://blog.daum.net/jc21th/17780489
京城放送局의 女性 아나운사(아나운서)들
http://blog.daum.net/jc21th/17780454
이현 : 지금도 김 여사의 목소리가 곱지만 그때는 누구든지 김 여사의 방송을 듣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을 저도였지요. (웃음소리) 어린이 신문방송을 위주해서 자작 수필을 낭독한 것 등은 많은 인기를 모았지요. 그 내용도 재미있었지만 그 음성의 부드러움은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가 됐었지요.(웃음소리) 연말에 가서 아나운서들 끼리 혼성합창 같은 것을 방송하고 했는데 그 굵은 남자 목소리 속에 유덕 김 여사의 소프라노는 듣는 이들을 혼미 시킬 정도였지요(웃음소리).
김문경 아나운서 일제강점기 방송 회상기 -추억의 마이크 흘러간 시절- 마이크를 떠난 지 어언 1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라디오를 떼어놓지 못하고 듣고 있는 저에게 어느 날 방송지 편집자는 지나간 아나운서생활을 얘기 해 다라고 부탁 했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현대식으로 건축된 청사에서 떳떳한 우리말로 국민에게 전해주는 젊은 아나운서 들의 목소리를 들을 적마다 지난날을 회상하게 되고 지금의 아나운서들이 부럽기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또 이런 부탁에 새삼 과거를 그려야만 한다니요. 그러지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아직도 교복을 벗지 않은 나는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아나운서란 직업이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고로 나는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시험을 치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행히도 합격의 통지를 받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고난 다음 마침내 여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방송국에 들어와 막상 방송 사업에 종사하고 보니 이렇게 어려운 일은 또다시 없는 성 싶었습니다. 그 당시 방송은 이중방송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일본어방송을 제1방송 우리말 방송을 제2방송이 불렀습니다. 저는 입국하자 우리말 낭독법 표준어 사용 등을 여러 선배의 지도하에 테스트 기간을 가졌습니다. 이때 여자 아나운서로는 최아지시, 남자 아나운서로는 남정준, 박춘근씨가 계셨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처음으로 스튜디오에 들어가 텅 빈 방안에 장치된 스위치를 돌렸고 그때는 자못 긴장과 흥분 속에 싸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마디 두 마디 나오기 시작한지 어디선지 자신이 생기고 대담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날이 흐르는 가운데 어린이 시간에는 제법 재미있게 하느라고 있는 애교와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해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열심히 방송한 다음 스튜디오를 나오면 웬일인지 쑥스럽고 부끄럽고 보다 더 잘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아나우서가 방송해야 할 어린이를 스튜디오에 안내 하기도 하고 어린이극이 있을 경우 음향효과죠 미리 준비하고 어린이 신문 원고도 읽어 보아야하고 방송이 끝나면 사례금까지 나누어 주어야 하니 바쁘다는 건 이루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허둥지둥 어린이 프로를 치룬 다음에는 저녁 7시 뉴스 뒤에 있을 일기예보 부호를 찾아야 합니다. 그때는 전문부호를 적어온 일기예보이기에 이를 방송문장으로 고쳐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하루는 기분도 좀 좋지 않아 스위치를 잘 못 돌려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기술 부원 에게 말을 들은 것은 물론 이려니와 체신부에 시말서도 제출했던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도 혼이 났었던지 사건전후가 지금도 모호하여 어쩌다가 그냥 실수를 했었다는 기억뿐 자세한 것은 잊고 말았습니다.
이밖에도 주부시간이나 강연시간이 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녹음방송을 실시하고 있어 방송이 중단되는 경우가 없습니다마는 그때는 생방송인데다가 시간이 되어도 강사가 오지 않는 경우 아나운서는 그야말로 허겁을 떨어야 했습니다.물론 일반 청취자에게 미안한 것은 이루 말 할 수 없고 대신 레코드를 틀어야 하는데 이 곡명도 즉시 체신부에 통고하여 결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골치 아픈 일은 거의 남자가 하는 일이었지요.
지금은 6.25 전란으로 말미암아 자취도 없어진 전 청사에는 스튜디오가 세 개밖에 없어 제1 제2 방송이 겹치는 경우에는 제 2방송인 우리말 방송은 언제나 양보해야 하며 국악이나 창도 좁다란 스튜디오에서 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처음에는 여자 아나운서가 둘이어서 주야를 교대해서 근무했는데 후에 저 혼자 남게 되어 야간근무를 많이 했습니다. 이렇듯 어렵고 괴로운 일도 많았습니다. 마는 이와 반면으로 즐거웠던 일도 적지 않았 습니다. 더욱이 여자가 나 혼자여서 귀여움도 많이 받고 청취자에게서 온 편지를 읽는 것도 즐거운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낮에는 방송시간이 별로 없어 따뜻한 양지쪽을 찾아 즐긴 적도 있었고 어느 날에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민가에서 내 목소리를 들들 것이라는 일로 흐뭇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마이크와 고락을 같이 하던 나는 아나운서생활 6년 만에 이별을 고했으나 지금도 라디오는 나의 벗이요 위안이기도 합니다. 그 언제 예쁘다고 했던 내 얼굴에는 주름지고 희망에 벅찼던 그런 패기는 사라졌으나 또 한 번 마이크 앞에 서 보고 싶다는 의욕은 내 마음 한구석에 아직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방송에 관한 것이라면 어느 것이고 잡고 싶기에 무진 애썼고 이런 보람 있어 아나운서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방송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고 없이 방송을 마친 날만이 즐거운 날이 될 수 있었던 그날만이 그리워지는 까닭은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이라고 돌려야 할런지요. 오늘도 여학교에 입학한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내나라 내 민족을 위한 아나운서가 되어 달라고 이는 일제하에 얽매여 부자유스러운 방송을 했던 나의 반항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김문경 아나운서가 근무하던시절 방송인들입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촬영한 사진입니다, 김문경님을 비롯해서윤백남 제 2방공과장, 남정준, 박충근, 이혜구, 최아지(정석)님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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