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경성방송국에서 부른 이난영의 노래는 일본 NHK전파를 타고 우리나라와 일본은 물론 만주, 대만에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창가라고 불리던 대중가요가 넓은 지역에서 동시에 전파를 탄 것은 1934년 왕수복에 이어서 두 번째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때는 우리말 방송을 할 수 있는 채널이 새로 생기 면서 유행가 또는 창가라고 불리는 노래가 본격적으로 방송전파를 타던 때였습니다. 레코드가 나와도 방송에 실려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때 노래 운명이 결정될 만큼 방송은 노래보급과 가수들의 인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방송과 레코드사, 가수는 서로 밀접한 연관 하에 2차 대전이 일어나기까지 유행가 전성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이난영과 방송, 주옥같은 노래들과 사연 목포의 눈물
이 가운데서도 이난영은 노래를 부르게 된 배경이나 환경이 다른 가수들과는 달랐습니다. 가정의 부녀자가 대중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이 금기시 되어있던 시절에 기생 출신이나 배우가 노래를 불렀지만 이난영은 아주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아래 신문기사는 1972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내용입니다.
1931년 막간가수로 출발한 이난영은 천성적인 재능을 지녀 1933년부터는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1935년부터 불려 지기 시작한 목포의 눈물은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민족지 조선일보가 민족의식과 애향심을 고취하기 위해 1934년 노래가사를 모집했습니다.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이 출품한 가사 목포의 눈물이 당선되고 목포출신 가수 이난영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작곡한 손목인은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의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이 노래를 담은 레코드가 발매되기 시작 하면서 순식간에 5만장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깜짝 놀란 일제는 그 가사를 문제 삼았습니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이 문귀가 조사의 초점이었습니다. 노적봉은 유달산의 별칭으로 이순신 장군의 왜적 섬멸과 연관이 있는 전설의 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작곡가 손목인이 이 고비를 슬기롭게 넘기면서 이 노래는 모두가 함께 부르는 민족의 노래가 되었고 그 뒤에도 이난영이 부른 노래들은 모두 히트하면서 주옥같은 천여곡의 노래를 남겼습니다. 1937년 그 시대의 최고의 연예인으로 불리던 김해송과 결혼하면서 1950년 6.25로 김해송이 납북 될 때 까지 7남매를 낳아 기르면서도 그의 노래는 계속 되었습니다. 이난영에 관한 더 자세한 예기는 본 블로그에 올린 다음 글과 노래로 대신합니다.
이난영노래, 목포의 눈물에 담긴 민족혼 http://blog.daum.net/jc21th/17780294
이난영의 해조곡 (1937년) http://blog.daum.net/jc21th/17780981
다방의 푸른 꿈 (1939년)
http://blog.daum.net/jc21th/17780292
낙화의 눈물 / 이난영 http://blog.daum.net/jc21th/17780291
김해송, 박향림의 그때 그 노래와 김해송 이난영 부부 http://blog.daum.net/jc21th/17780565
이난영, 유성기 옛 노래 모음 http://blog.daum.net/jc21th/17780290
이난영/진달래 시첩과 힛트곡 모음 http://blog.daum.net/jc21th/17780293
가수 이난영의 생애와 목포의 눈물 http://blog.daum.net/jc21th/14694509
김해송과 손석우, 손석우님 육성으로 듣는 그때 그 얘기 http://blog.daum.net/jc21th/17781072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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