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부터 1998년까지 KBS방송 현장에 있었던
최평웅 아나운서가 다음 블로그에 방송생활에서 있었던 생생한
체험담을 "마이크 뒤에 숨겨 둔 이야기"들 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한
글입니다. 아나운서로서 체험기록임과 동시에 우리 삶의 모습을 되 돌아
보는 글이기도 해서 소설보다 더 재미있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을 읽고
같이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옮겼습니다. 전체를 옮겼으면
했지만 너무 방대한 글이라 앞 부문만 옮겼습니다.
최평웅 아나운서 블로그에는 이 글 밀고도
여러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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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최평웅 아나운서가 쓴 마이크 뒤에 숨겨 둔 이야기들
내 살아온 길 되 돌아보며 옛날 같으면
사람이 일흔 고개를 넘어서면 살 만큼 산 것으로 여겼다.
오죽했으면 인간칠십고래희(人間七十古來稀)라고 했을까. 그러나
평균수명이 80세를 넘어서 머지않아 100세 시대를 맞이하게 된 지금은
아무래도 고희(古稀)란 말이 멀디. 먼 옛날얘기처럼 되고 말았다. 다만 나이가
80이 되든 90이 되든 자기의 의지(意志)대로 생각하고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만 있게
건강을 유지한다면, 즉 가족이나 주위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신세만 되지 않는다면 그 노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고하겠는가. 그러나 장수인구가 늘어날수록 앞으로 젊은 세대들이
떠안고 가야 할 경제적 부담이라든지 건강보험 재정악화 등 다가오는“100세 시대”가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은 국가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게다가 어느 신문에서는
100세를 “쇼크”로, 장수를 “재앙”으로 까지 표현했으니 오래 사는
삶을 축복이라 격려해주던 인사말은 노인들 끼리나
주고받는 덕담이 되지 않았나 싶다.
고희를 훌쩍 넘어선 우리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힘겹게 살아온 세대이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제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서 태어나 겨우 걸음마를 익힐
나이인 1945년에 조국의 광복을 맞았고 코흘리개로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가 학교공부가 무언지 겨우 알아갈 즈음인 1950년 북녘의 김일성이 갑자기
쳐 내려와 수백만 명이 죽이고 죽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며 어린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었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돼버린 교정 한
귀퉁이에 천막을 치고 칠판도 없는 교실에서 중학생이 된 우리는
불안한 휴전상황과 전화복구(戰禍復舊)의 어려움 속에서
겨우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엘 진학했으나
우리에게는 시련이 그칠 새가 없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해서 일어난 4.19혁명,
민생을 가난과 도탄으로부터 구해내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일으킨 5.16 군사혁명, 그것뿐인가. 5.18 광주민주항쟁. 인격형성의
가장 중요한 시기인 청소년 시절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랐고 학문과
지성을 갖추고 바로 세워 나아갈 시기인 대학시절은 혼란스런 사회상에
마음 아파하고 고뇌하면서 보낸 세대가 바로 우리들이다.
“새벽종이 울렸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하며 박정희대통령이 일으킨 새마을 운동.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고 온 국민의 가슴에 조국근대화의
불을 당긴 이 운동은 가난의 고통에 찌든 국민 모두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경부고속도로가 뚫리고
제철소가 들어서고 수출길이 열리면서 국민소득 80달러, 총수출액
16억 달러에 불과한 빈국의 멍에를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총 수출액 4500억 달러,
무역 1조 달러에 이르러 당시 경제규모의 200배로 성장
시켰으니 이는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경제건설에 매진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당시 농업인구 80%로 가난한 농촌의 처녀 총각들은
앞 다투어 도시의 공장들로, 젊은이들은 광부와 간호사들로 서독에 파견되는 등
국민 한 사람이라도 더 외화를 벌어들이기에 있는 힘을 다했다. 이렇듯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경이적인 경제발전과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지기 까지에는
온갖 시련과 고난을 헤치고 인동초(忍冬草)처럼 살아온 우리 세대가
주역을 담당했음은 명백한 사실이며 얼마 남지 않은 인생 황혼의
감회와 함께 뿌듯한 자부심을 느낀다.
인동초의 노래
1950년 6월 25일 내 나이 열한 살 때
북한 김일성의 기습남침으로 일어난 한국전쟁은
북한군의 파죽지세 속에 아군이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낙동강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다행히 UN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맥아더장군이 지휘하는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 수도서울을 탈환하고 패퇴하는
북한군을 뒤쫓으며 북진을 계속, 거침없이
압록강까지 진격해 나아갔다.
압록강 물을 떠 마시며 승리의 감격을
채 맛보기도 전에 이게 웬일인가.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전쟁개입은 승리감에 도취한 UN군에게 날벼락 같은 타격을 안겨
주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에는 아무리
막강한 무기로 대응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백두산 정상을
눈앞에 두고 아군은 통한의 후퇴를 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1.4후퇴와 전쟁사상 최대의 흥남 철수작전이다.
나의 고향은 경기도 이천. 1951년 1월 11일.
우리 마을에도 피난명령이 내려졌다. 무조건 남쪽으로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엄동설한 매서운 북풍이 몰아치는 이른 새벽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세 식구는 간단한 옷가지와 취사도구, 이불만
챙겨가지고 정든 집을 떠났다. 가다가 밥해 먹을 쌀과 부피가 큰 짐들은
아버지의 자전거에, 옷가지 등은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내 등엔 무거운 엿 덩어리가 짊어 지워졌다.
12살 사내아이지만 원체가 잔망하고
허약한 내 등엔 다듬잇돌만 한 엿 덩어리가 보통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이 엿은 피난길에 쌀이 떨어지면 비상
식량으로 어머니가 밤새도록 쑤어 만든 것이다. 내가 다 자란 뒤 어머니가
그 당시 나에게 엿 덩이를 지워주면 엿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꾸 뒤로 넘어지던
내 모습이 그렇게 애처로울 수 없었다며 옛날 얘기처럼 들려주시곤 했다. 아직
동이 트려면 한참 멀었는데 동구 밖을 막 나와 산모퉁이를 돌아서려는데
누가 “뒤 좀 돌아보세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이게 웬 일인가?
50여 호의 평화롭던 우리 마을이 온통 불바다가 돼 새벽
하늘을 버얼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피난길에 나선 동네사람들 중 어떤 이는
비명을 질러댔고 어떤 이는 길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도 재산도 가족의 목숨을 부지해야
하겠다는 절박함 속에서는 그리 대단한 것일 수가 없었다. 눈물을
삼키며 피난길을 재촉해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한 지 10여 일만에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인 영동군 황간까지 와서야 어느 집 허름한 단칸방을 얻어
피난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건
휴전협정으로 정전(停戰)이 된 봄이 되어서였다. 돌아와 보니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온 마을이 온통 잿더미로
변해버린 처참한 광경이었다.
동네사람 얘기로는 인민군이 쳐들어오면
집들이 군대의 주둔지로 이용될 테니 식량이 될만한
것들까지도 다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지서(支署)의 누군가가
불을 지르고 후퇴했다는 것이다. 학교 교실들도 성해 있을 리 만무했다.
망연자실(茫然自失)이란 이런 때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동네사람들이
똑같이 당한 일이니 슬픔이 누가 더하고 덜하고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부터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부모님은 다 타버린 집터에서 더듬더듬 잿더미를 헤치시더니
삽을 들고 그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두어 자쯤 파 내려가니 양조장에서
쓰는 커다란 항아리가 나왔다. 뚜껑을 여니 거기에는 쌀이 가득 들어있었는데
위쪽은 불기운에 그을려 누렇게 색이 변해있었다. 부모님의 얼굴은
보물이라도 찾은 듯 절망 속에서도 얼굴이 환 해지셨다.
우선은 세 식구가 굶지는 않겠구나 하는 안도의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그 쌀로 밥을 지어먹는데
밥에서 화덕 내가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아이 이지만
남은 그런 쌀도 없어 끼니가 어려운 판에 밥의 냄새타령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가을 햅쌀이 나올 때까지 반년을 그 밥을 먹으려니 한 끼 한 끼가
고역이었다.지금도 내가 훈제 식품이나 소시지류를 안 먹는 것은 그때의 그
지독한 화독내 때문이다. 그 난리 통에도 서울로 올라와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 진학까지 했으니 전쟁참화의 잿더미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돈벌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고 뼈 빠지도록 농사지어 학비를
대주신 부모님의 자식사랑은 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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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크 뒤에 숨겨뒀던 이야기들 -
5.16, 역사의 현장에 선 朴鐘世 아나운서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종세 아나운서는 타의
(他意)에 의해 역사의 현장에 선다. TV방송이 없던 남산시절,
당시 26세의 그는 야근조(夜勤組) 책임자였다. 새벽 4시쯤이었다.
정문 수위가 숙직실로 달려와 소리를 지르며 그를 깨웠다. 놀란
그는 1층 현관으로 내려갔다. 헌병들이 방송국 안에 쫙 깔려
있었다. 헌병 책임자가 그에게 다가오더니 북괴군 같은
정체 모를 군인들이 서울로 진격하고 있어
방송국을 지켜주러 왔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조금 있더니 헌병들은
도망치듯 철수하고 이번에는 얼룩무늬 군복의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공수부대 장병들이었다. 그들은
총을 쏘아대며 순식간에 KBS를 접수했다. 귀를 찢는 총소리에
혼비백산한 그는 온 몸에 총알이 박힐 것 같은 공포 속에서 텔레타이프실로
피해 몸을 웅크린 채 숨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박종세 아나운서 있습니까?
하며 그를 찾았다. 겁에 파랗게 질린 그는 겨우 정신을가다듬고 나갔다. 철모에
기관단총을 든 대위 한 명이 같이 가자며 그를 앞장세웠다. 2층 계단 앞에
이르자 한 장성(將星)이 대뜸 "박종세 아나운서입니까?
나 박정희라고 하오." 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와 악수를 하며 쳐다보니 모자에 별 두 개가
선명히 보였다. 그러더니 박정희 소장은 그를 결코
위압적이지 않고 차분하게 설득하는 것이었다. "지금 나라가
어지럽소.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우리 군이
일어섰소. 5시 정각에 방송해 줘야겠소." 하면서 전단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전단에는 혁명공약이 적혀 있었다.
박종세 아나운서는 극도의 긴장 속에 난감했다.
그래서 "기계조작을 하는 엔지니어가 필요합니다. 저 혼자서는
방송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니 엔지니어 색출명령이 떨어지면서
분위기는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등 뒤에서는 철커덕 하고 권총에
탄알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송을 거부하면 죽이겠다는 위협
같았다. 박종세 아나운서는 현기증이 나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데 4시 55분 쯤 도망쳤던 엔지니어 2명이 돌아왔다.
애국가가 나가고 5시 시보(時報)와 함께 행진곡이
울리면서 박종세 아나운서는 거사(擧事)를
알리는 첫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隱忍自重)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
(今朝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 대한민국만세! 궐기군 만세!"
혁명공약을 읽는 박종세 아나운서 앞에서 박정희 소장이 방송장면을
바라보고 있었고 장교 2명은 박 아나운서의 뒤에 앉아 권총을
빼 든채 감시하고 있었다. 박종세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역사궤도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그 방송은 대한민국 전체를 격렬하게 뒤 흔들었다.
5.16 주체세력은 환호했고 장면(張勉)정권엔 좌절과 절망을
주는 쿠데타였다.그 자리에는 공약문을 썼던 JP도 있었다. 검은색 양복,
넥타이를 매지 않은 흰 와이셔츠 차림에 한쪽 머리칼이 축 처졌고 오른쪽 팔에
카빈 소총을 걸치고 군인들을 지휘하는 모습이 마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부대장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박종세 아나운서는 당시의 그를 본 인상을 회고했다.
JP는 5.16 50주년을 맞아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냥
거사군(擧事軍) 쪽에서 혁명공약문을 직접 발표하지 않고
왜 박종세 아나운서에게 발표하도록 했느냐는 질문에
"처음엔 박정희 소장이 읽으면 어떻겠느냐
생각도 했는데... 그가 목소리가 좀 떡딱하지 않아?
그래서 아나운서에게 시키는 게 듣는 사람이 안심할 수 있겠다
생각한 거지. 애청자들이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나 알 정도로 박종세가
유명했잖아, 국민들이 편안하게 듣고 안심을 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본 거지.
본래 전날 밤부터 어디 못 가게 하려 했는데 마침 당번이라 방송국에서 자드만...
박종세 아나운서 요즘 뭐 하나... 궁금하네. 처음엔 조심스럽더니
읽어 내려가면서 점차 흥분을 하는 거 같더라고. 허허."
참고로 5.16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인들이 반공과 부패,
부정의 일소와 국가재건을내세우며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혁명이다. 5.16 군사혁명의 근본원인은 이승만정권의
장기집권과 독재, 자유당 정권의 부정 부패 그리고 제2공화국의 무능에 있었다.
이에 박정희 육군 소장 등 군인들이 국가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부정과 부패를
추방한다는 명분 아래 1961년 5월 16일 새벽을 기해 행동을 개시했다.
육군 소위에서 아나운서로
1965년 2월 어느 날 남산기슭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 공개채용 면접시험장.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단 군복차림의 내가 들어서니 면접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험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수험번호 000번
최평웅입니다” 라고 거수경례로 인사를 했더니 장기범 방송과장을 비롯한
이광재 아나운서실장, 최두헌 방송관보 등 5분의 면접관들이 뜻밖이면서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대해주셨다.. 첫 질문은 어떻게 장교
신분으로 응시를 하게 됐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ROTC 1기생으로 5월 말 전역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나는 강원도 인제에 있는
육군 제3군단 소속 야전공병단의 수송관 직책
이었는데 전역을 3개월 앞두고 부대장의 특별 배려로
음성테스트와 필기시험 등 모든 시험과정을 서울에 와 어려움
없이 치를 수 있게 해주었다. 수 차에 걸친 음성테스트와 필기
시험을 통과하고 면접시험은 부대에 비상이 걸려 전날 떠나지
못하고 그날 새벽 군용차로 6시간을 달려 방송국에
도착하니 시험 시작 30분 전이었다.
시험에 늦을세라 허둥지둥 달려온 터라
민간 복장으로 갈아 입기는 커녕 비포장 도로를
달려오느라 뒤집어 쓴 흙먼지 조차 제대로 털어낼 시간도
없었다. 나의 설명을 들은 선배 시험관들은 그 용기가 가상했던지
너그러움의 미소로 면접을 끝마쳐 주었다. 이렇게 나는 1965년 3월,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KBS의 아나운서가 됐다.직급은 문화
공보부 소속의 “조건부 방송원보(放送員補)” (지금의
9급 공무원)로 6개월 근무성적을 참작해서
정식 공무원으로 발령을 내는 것이었다.
입사 동기는 10명. 우리는 곧 발성으로부터
발음, 낭독기법 등 기초적인 교육 훈련과 아나운서가
갖추어야 할 기본소양 그리고 방송인으로서의 자세 등 3개월여에
걸친 연수와 훈련 끝에 드디어 방송 일선에 나서게 됐다. 공교롭게도
내가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날짜는 5월 31일, 아나운서로 발령받은
날짜는 그 다음날인 6월 1일이었다. 군복을 벗고 하루의 여유도
없이 발령지로 향해야 했으니 내 친구들은 나에게
억세게 운 좋은 놈이라고 부러워했다.
방송국 배치는 지역방송국 우선 발령원칙에 따라
서울에 남는 사람은 없었다. 지역국 배치도 연수성적에 따라
서울로부터 가까운 지역으로 발령이 났다.(당시에는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이고 철도교통도 원활하지 못했으므로) 연수성적이
가장 우수한 사람은 대전으로, 다음은 춘천, 그 다음은 청주로.
그리고 대구로 부산으로. 그래서 내가 아나운서로서 첫
고고(呱呱))의 성(聲)을 낸 곳이 청주방송국이었다.
도청소재지 방송국이었지만 청주시내
한복판 중앙공원 안에 있는 초라한 일본식 2층
목조건물과 앞 마당에 세워진 출력 1KW짜리 송신타워가
전부였지만 청사에 들어서는 순간 나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대학생활 4년 동안 그리고 군 생활 2년 동안 오직 아나운서의 꿈을 안고
매진한 결과가 여기서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구나 하고 생각하니
그저 감회에 젖을 뿐이었다. 선임 이종서 아나운서 선배는
나에게 콜 사인(Call Sign)부터 시켰다.
“여기는 KBS 청주방송국입니다.
HLKQ" 이 네 마디 방송에 어찌 그리 떨리던지.
군에서 40명의 부하를 지휘하던 소대장이었고 60대의 덤프트럭
운전병들을 통솔하던 장교였는데 그 용기와 대담함은 어디로 가고.....
나의 첫 방송인 콜 사인이 나가자 즉각 반응이 왔다. 새 아나운서가
왔느냐는 청취자들의 문의 전화였다. 그때는 TV방송도
안 나오고 민영방송도 없고 오로지 라디오에서
KBS 청주방송만 들렸을 때였으니까.
방송의 위력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처음 실감한
순간이었다. 청주국의 아나운서는 방송계장인 이종서 아나운서와
정기채, 조민자 그리고 신임인 나까지 모두 4명이었다. 처음 시작하는
지역방송국 생활은 군대의 신병 훈련소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아나운서가
몇 명 안 되니 뉴스는 물론이고 디스크자키, 공개방송 MC, 좌담프로의
사회 등 모든 로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아 하면서 방송의 경험과
능력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지역방송국 근무가
지금처럼 기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발령받고 내려가면 불러 올릴 때까지
해바라기처럼 서울에서 좋은 소식이 올 때만을 목을 빼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고 “어느 국(局) 아무개의 방송이 쓸 만하다더라”하는
소문이 중앙국에 알려지고 뉴스 녹음 테잎을 올려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얼마
안 있어 그는 지역방송국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행 기차를 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나 중앙국으로 올라갈 날만 고대하며 사법고시 준비생
들처럼 나름대로 방송실력 연마에 매진하게 되니
나도 그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무꾼, 천사를 만나다
방송국 생활에 얼마간 적응해 갈 무렵
이종서 방송계장(선임 아나운서)이 나를 낚시가게로
데려가더니 낚시도구를 주섬주섬 챙겨 사주는 것이었다. 낚시라고는
어릴 적 동네 개울에서 철사를 꼬부려 밥풀을 달아 송사리를 잡던 일 밖에
없는데.이종서 선배는 호탕한 성격에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주선(酒仙)이면서
낚시광(狂)이었다. 그날부터 그는 숙직근무만 끝나면 나를 근처 저수지로 데려갔다.
혼자 다니기 심심하니 나를 낚시친구로 만들 생각이었나 보다. 청주 근방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가 많아 낚시를 즐기기에는 참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청주에는 낚시에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우리 방송국에도 낚시 도사(道士)라
불리는 이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별 기술 없는 나도 몇 시간만
앉아 있으면 붕어를 어망 가득히 채울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간
경험이 붙으니 나의 낚시실력도 씨알 굵은 대어도 가끔 끌어내는
조사(釣士)의 수준에 이를 정도가 됐다. 하루는 전속 성우 이영숙씨가
나에게 참한 규수감이 있는데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했다.
그때까지 이성에 관해선 별 관심 없게 지냈지만 30이 가까워
오는 나이 이니 은근히 마음이 내켜 만나보기로 했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KBS 아나운서라면
인물이 잘났건 못났건 명성(?)만으로도 그 바닥에서는
빠지는 신랑감은 아니었다. 그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폴 모리아
악단의 연주가 감미롭게 울리는 본정통(번화가의 일본식 이름) 어느 다방에서
만난 그녀는 요조숙녀(窈窕淑女)의 감이 드는 참한 미모에 한눈에 호감이 갔다.
나이는 21살이란다. 그녀도 내가 과히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 이후 우리의 만남은
잦아졌고 그러면서 사랑을 키워가게 됐다. 가끔 그녀를 내가 즐겨 찾는 낚시터로
데려갔는데 처음에는 망설이더니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손맛에 재미를
느끼면서 우리의 데이트 장소는 자연스럽게 낚시터가 돼버렸다.
그러는 사이 양가 간 혼담으로 까지 이어졌고 우리의
사랑은 결실을 약속하게 됐다.
해바라기 해를 보다
1968년 7월의 무더운 어느 날.
근무교대를 하러 출근하니 김호영 방송과장이
나를 불렀다.“최 아나(지역방송국에선 아나운서를 ”아나“로
불렀다) 서울로 발령 났어.” 갑작스런 발령소식에 나는 귀를 의심했고
정신이 멍해졌다. 아니 뉴스 녹음테이프를 올리라는 지시도 없었는데....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몰려옴을 느꼈다. 이곳 청주에서는 겨우
3만 여의 청취자를 대상으로 한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는데 이제 서울로
가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 방송을 한다고 생각하니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
됐다. 이렇게 해서 나의 지역방송국 생활은 만 3년 만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그런데 내 후임으로는 나보다 1년 선배인 K아나운서라고
한다. 선배가 내 대신 내려온다니, 좀 마음에는 걸렸지만
거기까지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서울 남산 서울중앙방송국
3년의 지방방송국 근무기간 동안
얼마나 동경해왔던 곳인가. 수 차례의 시험과 수개월의
연수기간에 익숙해지리만큼 드나들던 방송국 건물인데 왠지
처음 오는 것처럼 낯설고 위엄 있게 보였다.아나운서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드넓은 방에서 근무 중이던 남녀 선배 아나운서들의 눈길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나는 먼저 이광재 실장에게로 가서 “청주에서
올라온 최평웅입니다”하고 인사를 드렸다. 실장은 “응 축하해. 앞으로
열심히 해” 하며 다소 근엄하면서도 사무적인 표정으로 나의
첫인사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각 선배들의
책상을 돌며 인사를 했다.
나의 전입신고를 받는 선배들의 표정은
그리 따뜻해 보이지 않았다. 내심 중앙에 있는 선배들은
다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좀 의기소침해 했지만 그런 눈치에
신경을 쓸 만큼 여유로운 처지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40명아나운서 중에서
내가 새내기에 막내가 되니 선배들의 어떻게 대해주더라도 감당해 낼 각오가
돼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나는 아나운서실 맨 끝 쪽 말석에 앉아 보도과
(지금의 뉴스센터)에서 지난 뉴스원고를 가져다 원고지가 닳도록
읽고 또 읽어 독력(讀力)을 키우는 한편 선배들이 하는 방송
스튜디오를 쫓아다니며 방송요령을
파악하는 것이 일과였다.
며칠 후 나에게 주어진 첫 방송은 콜사인
(Call Sign)이었다. “잠시후 4시가 되겠습니다.
KBS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HLKA" 지금은 모든 콜사인은
다 녹음으로 자동 처리되지만 그 당시에는 매시 콜사인은 생(生)으로
넣게 돼있었고 실장이 일일이 배당을 했다. 아침에 배당된 4시 콜사인,
단 두 마디의 방송이지만 여간 긴장되고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행여 실수라도 할까봐 종이에 써서 읽어보고 또 외우고.....
이렇게 해서 나의 중앙에서의 첫 방송은
실수 없이 마칠 수 있었다.
그 다음부터의 방송은 그날의 방송순서예고와
공지사항, 기상통보, “북어 한 쾌에 얼마 달걀 한 꾸러미에
얼마” 하는 5분짜리 물가시세, 이러한 순서를 밟으며 어느 정도
마이크 공포증을 없앤 다음에야 청취율이 가장 낮은 시간대의 뉴스를
배당받게 된다. 이 과정이 보통 2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지역국에서
방송을 제아무리 날고 기었다 해도 여기에 와서는 걸음마부터 시작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돼있었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서 선배들의
책상을 닦고 하루 종일 선배들의 눈치나 보며 원고지와
씨름하기를 계속한 끝에 드디어 현업에 들어가
근무조(勤務組)에 편성됐다.
이 당시의 현업은 1개조 5명의 남자 아나운서가
3교대로 근무를 했는데 저녁 7시에 야근조가 들어오면 통상
중앙방송국(지금의 제1라디오)채널의 매시간 뉴스와 대공방송채널의
대공뉴스, 해외로 방송되는 국제방송채널의 국제뉴스를 소화하는 바쁜 근무다.
게다가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시각고지와 매시간 콜사인, 그리고 새벽 2시에
하는 방송 종료 멘트는 말번(末番)인 막내의 몫이어서 자정뉴스가
끝날 때까지는 긴장의 연속이며 제대로 앉아
쉴 틈이 없으니 고달픈 신세이다.
내가 서울로 오게 된 사연
어느 날 가까운 선배와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 선배는 나에게 “자네가 서울로
오게 된 데는 사연이 좀 있네”하고 말했다.“아니 무슨 사연입니까?”
하고 나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선배의 얘기 내용은 이러했다. K아나운서는
야근하는 날 자정뉴스 담당자였다. 뉴스시간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그는 멍하니
잡념에 잡혀 있다가 뉴스시간 5분 전에야 아차! 하고 보도국으로 달려갔다.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와 뉴스 부스에 앉았으니 예독(豫讀)
해 볼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정뉴스는 시보와 함께 날짜가 바뀌기 때문에
원고 중의 시제(時制)를 다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편집
데스크에서 나온 기사는 자정 이전에 작성된 것이어서 “오늘”은
“어제”로, “내일”은 “오늘”로 고쳐주어야 하는데 원고를 미리 읽어보지
못 했으니 읽어 나가면서 시제를 바꿔야 하므로 뉴스가 매끄러울 수 없었다.
더구나 성격이 소심한 그 였으니 진땀께나 흘렸을 것이다. 그는 뉴스를 마치고
나오면서 “아이 뉴스 죽을 쑤었네.”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날 터지고 말았다. 홍종철 문공부 장관이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대통령으로부터 어젯밤 12시뉴스를 들었는데 아나운서가
뉴스에 성의가 없고 힘없는 방송을 하더라는
지적을 받았다는 것이다.
장관은 곧바로 방송국장을 불렀다.
어제 밤 자정뉴스 담당자가 누구인지 경위를
조사하고 당장 인사조치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홍종철
장관은 불도저 같은 우직함과 불 같은 성격의 소유자로 그의
명령에 토를 달거나 변명을 할 용기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당시 아나운서에 대한 가장 무거운 징계는 지방국으로의 전출이었다.
아나운서실장 이하 동료들의 간절한 구명운동도 소용없이 결국
K아나운서는 지방국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됐다.
아나운서실에서는 그에게 근무를 원하는
지역방송국을 선택하도록 배려해주었고 그는 서울서도
가깝고 또 고향이기도 한 청주로 가고 싶어 해 결국 청주국으로
내려가게 됐고 거기에 있던 나는 엉겁결에 서울로 오게 된 것이다.
내가 서울로 올라오게 된 데에는 이러한 비화가 숨어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내 마음은 참으로 착잡했다.
뛰어난 방송을 인정받고 떳떳하게 올라온 게 아니라
한 사건으로 인해 반사이익을 얻은 결과라고 생각하니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래서 내가 아나운서실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를 대하는 선배들의 눈길이 싸늘했던 일이 떠올랐다.
화가 복이 되다(轉禍爲福)
그 사건이 있고 난 얼마 후 이광재 실장이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독대를 가질 기회가 생겼다.
이 자리에서 이 실장은 지난 번 있었던 K아나운서의 자정뉴스
사건에 관해 상세히 설명했다. 감히 대통령 영부인을 만나 자유롭게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이광재 실장의 위상과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실장은 “저희 아나운서들은
생활이 궁핍해 매우 힘든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날 뉴스를 담당
했던 K아나운서도 영양실조 상태에서 허기진 몸으로 방송을 하다가 실수를
좀 했는데 그날 따라 대통령께서 들으시고 지적을 하신 모양입니다.
영부인께서도 저희 아나운서들을 너그럽게 보살펴 주십시오”
이렇게 말씀 드리니 육 여사는 새삼 놀란 눈빛으로
“ KBS아나운서들의 생활이 그렇게 어려운가요?”하며 동정 어린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알겠습니다. 돌아가 기다려 주세요.”하며
이 실장을 돌려보냈다.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중앙방송국장이 아나운서실장을
불렀다. 국장은 이 실장에게 영부인이 홍 장관을 통해 아나운서들에게 하사금을 보내면서
아나운서들의 생계에 보탬이 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며 돈이 든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 봉투 속에는 거액의 수표가 들어있었다. 실장은 뜻밖의 하사금을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국장은 이 돈을 아나운서 전원에게 직급에
관계없이 매월 골고루 나누어주되 절대 비밀로 하고 만일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그날로 지급은
중지될 것이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실장은 하사금을 은행에 예금해두고 그 달부터
40명의 방식구들에게 매월 3,000원씩 비밀리에 지급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의 월급이 6,800원이었으니까 급여 중간에 주는 3,000원이란 돈은
그야말로 천사의 손길 같은 것이었다. 이광재 실장이니까 그러한 임기응변이 나올 수
있었고 또 그와 마주 앉아 대화하면 상대가 자기도 모르게 빠져버리고 마는 호소력이
있었다. 그는 육 여사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K아나운서에
대한 변명을 하다 보니 아나운서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설명하게 됐을 것이다.
여하튼 아나운서들의 생활에는 갑자기 생기가 돌았고
얼굴에는 활기가 넘쳤다.
서울로 올라오고 1년 좀 지나 결혼식을 올리고
석관동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신혼살림이라야 부엌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단칸방이었으나 그 당시에는 대개가 그러한 생활수준이었으니까
고생이라 생각되지도 않았다. 다만 청주에서 비교적 부유한 집에서 자란 22살의 어린 신부를
데려다 낯선 서울 변두리에서 셋방살이를 시킨다는 것에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신혼 셋방에
찾아오신 장인어른이 애지중지하며 키운 딸을 아나운서라는 허울만 좋은 놈에게 줬더니 이 고생을
시키는구나 하고 생각하셨는지 청주로 내려가시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어쨌든 나는 자력이 아닌 K선배의 희생 덕에 서울로 올라오게 됐고
결혼과 함께 생계도 나아졌으니 그 선배에게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했다. 그
런데 다행인 것은 문책성 인사로 청주로 내려가 나와 교체됐던 그 아나운서는
6개월 후 다시 서울로 복귀해서 그 선배에 대한 나의 심적
부담을 덜 수 있게 돼 다행스러웠다.
고달픈 막내 아나운서들
아나운서 세계의 위계질서(位階秩序)는 대단하다.
실장은 바로 하늘같은 존재이고 조장급 이하 층층이 있는
선배들의 지시는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만큼이나 엄중한 것이다.
조장이 뉴스를 할 때에는 30분 전에 보도과(지금의 뉴스센터)에 가서
원고를 가져다가 바쳐야 하고 뉴스가 끝나면 원고를 받아 다시 보도과에
갖다 줘야 한다. 아침에는 선배의 뉴스시간에 맞춰 숙직실로 달려가
깨워줘야 하는데 바빠 우왕좌왕하다 미처 늦게 깨워줘 뉴스진행에
차질이 빚어지기라도 하면 날벼락을 맞기 일쑤이다. 그런 고달픔
속에서도 아나운서실 근무환경에 대해서는 후배가 해야 할
당연한 임무로 받아 들였고 어떠한 불평불만도
있을 수 없었다. 당시도 KBS아나운서 하면
젊은이면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화려한 직업이었다.
그러나 실속은 그렇지 않았다.
쥐꼬리만한 공무원 봉급에 먹고 살기도 힘든데
아나운서로서의 인기관리나 품위유지란 사치스런 것이었다.
3 교대 근무를 하며 1년의 3분의 1을 방송국 숙직실에서 지내는
아나운서들.우리말의 수호자라는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피 말리는
생방송의 긴장감의 연속과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 속에서 생활하는
아나운서들에게 청취자들의 사랑과 격려가 없다면 그것은
황량한 가시밭 길을 걷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낮 근무를 마치고 퇴근길에 조장의 뒤를 따라
5명의 조원(組員)이 일사불란하게 향하는 곳은 명동 사보이
호텔 뒷골목에 있는 “송도”라는 대폿집. 언제부터인가 송도는 우리
아나운서들에게 마음의 고향이고 고달픈 몸을 잠시 쉬었다 가는 안식처가
돼있었다. 살 두터운 개성식 빈대떡에 걸쭉한 막걸리 몇 잔으로 하루의 긴장을 푸는 곳.
언제 들러도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는 주인 아주머니는 내 이모님처럼 푸근하다. 술값은 늘
외상이다. 매월 봉급날 한 달 외상값을 조원들이 모아 갚는데 몇 달을 밀려도 주인아주머니는
재촉 한 번 하는 일이 없다. 아나운서들의 가난한 주머니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터이니
형편 나아지면 갚겠지 하며 언제 가도 넉넉한 인심은 변하지 않는다.
사실 술을 좋아하는 조장을 만나면
얄팍한 월급봉투에서 지출되는 술값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조장을 따라나서는
것이다.남자아나운서들 중 결혼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여자아나운서는
결혼과 동시에 아나운서실을 떠나는 것이 불문율처럼 돼 있었다. 총각들이 많다 보니
저녁에 술을 마시다 늦어 통행금지시간에 걸리면 으레 찾아 드는 곳이 "남산호텔"이라 부르는
방송국 숙직실이다. 심야근무를 마치고 막 자려고 누우면 아래층부터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몰려오는 술 취한 아나운서들이 숙직실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기 일쑤이다. 다음날
새벽근무자는 이를 견디지 못 하고 쫓겨나와 아나운서실 소파에서 잠을 청하려니
시간은 벌써 새벽 3시다. 잘 못 깊은 잠에 들었다간 5시 개시 멘트와
뉴스를 펑크 내기 십상이니 그대로 옹크리고 앉아
밤을 새우는 수밖에 없다.
사실 말단 아나운서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방송이 새벽 방송 개시 멘트와 5시 뉴스다. 사흘에 한번
야근 때마다 6개월간을 계속해야 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새벽
2시에 방송 종료멘트를 생으로 넣고 4시30분에 기상, 5시 첫 뉴스를
해야 하므로 잠은 커녕 밤을 거의 새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날은 깜빡 잠이 들었나 본데 아래층에서 엔지니어가
“아나운서!”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내의 입은 채로 뛰어
스튜디오로 들어서니 애국가의 마지막
소절이 나가고 있었다.
이미 방송 개시 멘트는 놓쳤고 5시 시보가 울리며
ON AIR에 불이 켜지며 큐가 들어왔다. 그러나 100미터 달리기로
뛰어 들어왔으니 숨이 턱에 차 뉴스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몇 마디 읽고는 끊고, 잇다가 또 끊고... 음성은 거의 우는 소리에
누가 들어도 이건 뉴스가 아니다. 5분 뉴스가 50분처럼 느껴졌다. 뉴스를
마치고 나니 온 몸에 힘이 쭉 빠진다. 실장님이 출근하면 어떻게
보고를 드려야 하나 걱정이 태산 같다. “그래도 뉴스를 죽을
쑤긴 했어도 통째로 빼먹진 않았으니까 큰 처벌은
안 받을 거야” 하며 선배가 위로를 해주지만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다행히 시말서 제출로 처벌은 면했지만
이러한 야간근무환경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방송사고이다.노력만이 나의 살 길이었다. 어쨌든 개운치 않은
사연과 함께 아나운서실의 일원이 된 나는 나의 방송을 인정받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쏟아 부었다. 항상 내 손에는 뉴스원고지가 쥐어져 있었고 옆에
누가 있든 없든 원고를 소리 내 읽었다. 독력(讀力)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또 내가 한 방송은 반드시 녹음해서 스스로 평가하는 훈련을 거듭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일까.
TV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동물의 왕국”과 대공방송(對共放送)의 “자유통신”이
나에게 전담으로 주어졌다. 지금까지도 계속 방송되고 있는 KBS의
최 장수 프로그램인 “동물의 왕국”은 당시는 흑백화면으로 방송됐지만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를 다룬 유일한 다큐멘터리로 어린이는 물론 일반
시청자들에게도 꽤 인기가 많았던 프로였다. 지금처럼 미리 더빙을 했다가
방송하는 것이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영화필름을 보면서 생(生)으로 방송을
했기 때문에 아직도 초년병인 나에게는 꽤 어려운 방송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
8월15일 TV가 컬러 방송이 시작되면서부터 동물의 왕국은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칙칙하고 어둡게만 보이던 숲이 우거진 정글과 호랑이며
기린 얼룩말, 각종 뱀들의 색깔이 선명하게 나타나니 이건 전혀
새로운 동물의 왕국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6. 70년대에는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돼있을 때이니만큼
남북 간 심리전이 치열했고 KBS에는 대공방송채널이 따로 운용되고
있었다. 당시 내가 담당했던 “자유통신”은 대북 심리전방송 중에서도 북의
김일성 족벌의 행적이나 인신공격, 또는 체제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의
5분짜리 낭독프로였다. 원고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흥분돼서 목청이 높아지고
온 몸이 땀에 젖을 정도이니 그들이 이 프로를 듣는다면 얼마나 이를 갈겠는가.
나 말고도 성우 K양이 이러한 프로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시작
으로 나는 대공방송을 많이 했다. 남과 북이 서로 목청을 높이며
상대방을 헐뜯고 공격하는 격렬한 심리전에 내 음성이
선동적이고 박력이 있어 제격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1975년 4월 어느 날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우리 대공방송요원들을 초청해서 만찬을 베풀었다. 대북방송에
수고하는 우리들을 위로해주는 자리려니 하고 참석했는데 알고 보니 며칠 전
성우 K양 등 집에 대공방송을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그녀는 물론 가족까지도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편지와 전화가 걸려와 방송국에 더 이상 방송을 할 없다고 했고 이 소식은
즉각 중앙정보부에 보고됐다. 이에 중앙정보부에서는 대북방송요원들의 신변안전을 철저히
보호해 줄 터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방송에 전념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금일봉을 나누어
주며 격려해 주었다. 그 이튿날 우리 아파트 현관 인근에는 무장경찰관이 배치되어
아파트를 들고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경찰에 알아보니 대공방송요원인
나와 내 가족의 신변을 보호하라는 당국의 지시에 따라 24시간 경비근무에
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가장의 신변보호는 안 해줘도 좋으니
주민들의 사생활보호나 불편을 고려해서 즉시 철수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고 며칠 후 경찰은 철수하고 우리 집
현관에 순잘함을 설치하는 것으로 끝냈다.
이광재 아나운서 전성시대
5. 60년대 라디오시대에 KBS에는
황우겸 장기범 임택근 강찬선 최계환 전영우 박종세
이광재 등 아나운서 선배들이 가히 전설적인 명성과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60년대 초 MBC, 동아방송 RSB(후의 동양방송) 등 민영방송이 잇따라
출현하면서 명성을 날리던 몇 분의 선배 아나운서들은 중역이나 아나운서 책임자로
자리를 옮겼고 내가 입사할 당시에는 장기범, 강찬선, 이광재 아나운서 등 세 분이 KBS를
지키고 있었다. 장기범 선배는 당시 방송과장으로 계셨는데 학(鶴)처럼 고결한
인품에 음성이 벨벳처럼 부드러워 후배들은 물론 방송을 듣는 청취자들도
매혹시켰다. 품이 포근하면서도 아버지처럼 위엄이 있어 후배들은
우러러 존경했고 방송에서 그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청취자들은 그에 대한 동경과 행복한 상상력
속에서 라디오 곁을 떠나지 못했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썰물처럼 신생
민방(民放)으로 떠난 KBS의 빈자리는 컸으나
그 충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이광재 아나운서가
선배들이 있던 자리를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나운서실장을
맡고 나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40명 아나운서들을 이끌어 나아가면서 12시
정오뉴스로부터 시작해서 퀴즈열차 등 공개방송은 물론 축구 농구 복싱 레슬링 등
각종 스포츠 중계방송 중 중요한 방송은 본인이 담당했다. -나는 이광재 실장에 대해
언급함에 있어 행여나 그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을까 염려되며 내가 입사 하기 전에
그가 동료나 선배들과 어떤 인간관계를 가졌었는지에 대해서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방송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를 상사로 모시게 된 이후 내가 그에 대해
느끼고 겪은 일들을 주관적이지만 솔직한한 마음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그 당시 방송계를 누비던 모두가 현업을 떠난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마음에 담아 뒀던 모든 일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회상되기를 비는 마음 뿐이다-
방송에서 1인이 5역에서 10역가지 한다는 것은
지금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때는 충분히 먹혀
들어갔다. 오늘날은 아나운서들도 자기 특기별로 방송이 분업화
돼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프로그램 배당의 전권은 아나운서실장이
가지고 있었고 실장이 방송을 독점한다 해도 이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
사람도 없었다. 또 그의 방송을 능가할만한 인재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선 목소리부터 타고났다. 폭 넓은 볼륨에 폐부부터 터져 나오는 맑고
우렁찬 목소리는 마이크를 거치지 않고 들어도 상대방이 압도되고
만다. 정오뉴스는 전통적으로 아나운서실장이 맡는 것
이 불문율로 돼 있었으므로 그의 뉴스는 그만큼
권위와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가장 인기 있었던 공개방송 “퀴즈열차”,
어느 농촌의 70을 넘은 노인이 출연했다. 사회를 맡은
이광재 아나운서 “ 할아버지, 오늘 퀴즈 왕이 되시면 텔레비전을
타시게 되는데 사시는 동네엔 전기가 들어옵니까?” “ 안 들어옵니다”
“그럼 텔레비전을 타 가셔도 전기가 안 들어오면 볼 수가 없을 텐데요”
“촛불 켜놓고 보죠” “촛불로는 볼 수가 없는데 어떡하죠?”
“ 촛불을 여러 개 켜 놓으면 환해서 잘 보일테니 타게만
해 주슈” 방청객들은 배를 잡고 웃는다.
“퀴즈열차, 프로듀서 하동광 엔지니어
김순구 아나운서 이광재였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 끝 멘트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의 진면목(眞面目)은
스포츠 중계방송에 있었다. 경기장이 어디든 그가 중계석에 앉으면
그 경기는 활력이 넘친다. 쩌렁쩌렁한 그의 음성은 관중석까지도 울려
퍼지고 경기가 접전이 될수록 경기장이나 전국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간다.
스포츠 중계방송은 경기의 흐름을 시 청취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히 라디오 중계의 경우 경기의 상황을 청취자에게 얼마나
리드미컬하고 맛있게 전해주느냐가 더 중요하다.실제 경기장에서는 별로
익사이트 하지 않은 경기라도 그의 입만 거치면 흥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되어 버린다. 그것이 그의 카리스마였다.
특히 축구와 농구경기 중계에서 “슈우웃- 골인”
(지금은 “골”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골인이라고 했음)을
외칠 때면 시청취자들은 열광했다. 해외중계도 그의 독판이었다.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여기는 이태리 로마입니다.”하고 시작되는
축구중계방송은 온 국민을 라디오 앞에 모아 놓고 가슴 조리며 그의 신들린
듯한 중계방송에 빠져들게 했다. 그러다가 우리의 골이 터지면 으레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 우리 한국 팀이 한 골을 넣었습니다. ” 하며 목청을
높여 외쳐댔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는 이 시대에는
신파조 같은 표현이라 아무도 쓰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해외에 파견된
아나운서라면 누구나 외쳐대고 싶은 멘트였고 청취자의
귀에 멋지게 와 닿는 표현방법의 하나였다.
또 놀라운 것은 방송에 대한 의욕과 열정이었다.
이를 두고 그의 방송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후배들에게는
마이크를 넘겨주지 않고 스포츠 중계방송을 독식한다는 불만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시 청취자들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어느 날은 춘천에서 오후 4시에 농구중계방송을 끝내고 저녁
7시에 장충체육관에서 레슬링 중계방송을 한 적도 있었다. 교통수단이 발달한
요즈음은 그것이 가능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육로로 춘천에서 3시간 만에
서울에 와 방송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그날 군부대의 도움을 받아 군 헬기를 타고 와
임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경기는 바로 5,60대 연령층이라면
다 기억하겠지만 70년대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평정하며 한국 국민들에게
짜릿한 기쁨을 안겨주었던 박치기 왕 김일 선수와 안토니오 이노키 선수와의 경기였다.
그의 선동적인 음성과 특유한 억양으로 “이노키의 반칙으로 쓰러졌던 김일 선수 일어나 박치기!
다시 한 번 박치기!”하며 소리칠 때 흑백TV 앞에 앉은 시청자들을 흥분의 절정으로 몰아넣었다.
이 경기를 시청하다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거나 목숨을
잃는 일도 생겼다.그의 스포츠 중계방송이 현재의 흐름이나 수준에 비교한다면
신파조(新派調)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 이상의 능력은 없다고
평가 받았으며 그를 대신할만한 아나운서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듯 서울과
지방을 누비는 겹치기 중계방송이 본인으로서는 방송에 대한
끝 없는 열정과, 아직은 나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자만에서 온 것일
수도 있겠으나 일부 후배들로부터는 인기있는 방송은 후배들을 키울 생
각은 안 하고 실장 혼자 독식(獨食)한다는 불만을 쌓이게 했고
얼마 안 가 "파발마 사건"이라는 불행한 사
건의 빌미를 가져오개 했다.
국군의 날 행사와 나
1973년 8월 어느 날 나는
실장으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받았다.
그것은 국군의 날 행사 현장중계방송 아나운서 역할이다.
당시 국군의 날 행사는 70년대 초부터 매년 10월 1일 여의도 5.16광장
(지금은 여의도공원으로 조성되었음)에서 성대하게 거행됐다. 사열대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과 주한 외교사절, 각 군 참모총장, 16개국 한국전 참전용사 등
1,000명이 참석해있고 23만㎡의 광장 주변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행사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국군의 날 행사는 육해공군과 해병대 도보부대와, 탱크를
비롯한 자주포, 어네스트존 미사일 등 최신예 기계화 부대의 퍼레이드,
특수전 용사들의 고공침투, 그리고 공군 전투기들의 공중분열 등으로
약 2시간에 걸쳐 다채로우면서도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는 국가적인 큰 행사였다.
특히 이 행사의 하일라이트는
특전용사들의 고공침투 시범과 공군 주력기인 F-4
팬텀과 F-5 전투기의 공중분열이었는데 여의도 상공에서
펼쳐지는 에어 쇼 였다.이 행사에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열대에서
행사를 참관하는 귀빈들에게 행사의 장면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현장중계방송 아나운서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사열대 정면을 지나가는 도보부대의
명칭이나 기계화 부대의 무기이름은 물론 성능, 제원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설명해야 하며 하늘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목표한 지점에 착지하는
고공침투요원들의 이름, 계급까지도 착오 없이 설명해야 한다.
행사 중에 제일 어려운 것이 특전부대의 고공침투와
공군 F-5A 독수리 편대의 공중분열이다. 그날의 기상조건에 따라
변수가 생기기 쉽고 모든 기동이 초를 다투며 순간적으로 바뀌기 때문에
원고에 의지하지 않고 하늘을 쳐다보며 애드립으로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현장중계방송은 전반적으로 완벽한 시나리오에 의해 진행된다. 그러나 이런 큰
행사에는 항상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기계화 부대의
분열 중 대열 속에 있는 탱크가 갑자기 고장을 일으켜 멈춰 선다거나
고공침투 시범 중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보조낙하산으로
위험하게 착지한다거나 하는 돌발상황이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아나운서는 몇 가지의
예비 시나리오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즉 만일 대열 속의
탱크가 멈춰 섰다 하자. 이런 상황을 대비해 행사장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견인용 탱크가 쏜살같이 나타나 고장난 탱크를 2.3분 내에 견인해 대열 밖으로
끌어낸다. 아나운서는 이런 상황을 사고가 아닌 행사의 일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임기응변으로 처리해야 한다. 이러한 큰 행사의 현장중계는 아직 초년생인 나에게는
엄청 부담스러운 일이었다.국군의 날 행사는 보통 D-30일에 리허설에 들어간다.
남녀 아나운서들은 그날부터 제병지휘부라는 행사본부에 파견돼서 매일
두 차례씩 도보부대와 기계화 부대의 훈련장과 공중기동연습을 하는
공군기지를 오가며 훈련과정을 익혀 나간다.
이런 연습을 마스터하면 D-9부터는
여의도 행사장에 총 집합해서 실제 행사와 똑 같은 총
리허설에 돌입하여 각 부대 간 진행상의 오차범위를 좁혀 나아간다.
행사 D-3일부터는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식욕도 떨어진다. 머릿속은 온통 이날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을까 하는 중압감으로 꽉 차있다. 드디어 D-Day, 결전의 날이
돌아왔다. 행사는 10시 정각 대통령의 도착과 함께 시작된다. 사열대 좌측 하단에
마련된 방송실에는 남녀 아나운서와 외국귀빈들을 위한 영어아나운서 등이
나란히 앉아 행사 시작 10분 전인 9시 50분부터 방송을 시작한다.
방송이 시작됨과 동시에 수 만 장병과
관계자들이 100여 일 동안 뙤약볕 아래 훈련한 결과들이
1초의 오차도 없이 차근차근 진행돼 나간다.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도착하면 대통령에 대한 경례로부터 시작해서 대통령이 사열차를 타고 각
군 부대를 도는 열병에 이어 국군의 날 기념식과 분열의 순서로 약 2시간 동안
진행되는 것이다.이 행사는 KBS, MBC, SBS 등 TV방송이 합동으로
실황을 중계방송 하는데 오디오(Audio)는 현장중계방송을
그대로 받아 전국으로 송출하게 된다.
극단의 긴장 속에서도 방송이 시작되니
한 달 동안 땀흘려 준비한 시나리오 문장이 기관총의
탄알이 튀어나가듯 거의 무의식적으로 정신 없이 입에서 쏟아져 나온다.
이런 상태를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고 하는 걸까. 꿈속을 헤매듯 1시간 50분이
흐르고 맨 마지막 순서인 최신예 F-4 팬텀기 편대가 폭음을 내며 사열대 상공을 가르고
통과한다. 행사가 끝나고 정훈참모가 다가와 상기된 표정으로 거수경례를 하며 “대성공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각하께서 아주 만족해하시며 행사장을 떠나셨습니다” 하며 기뻐했다.
나도 온 몸에 힘이 쫙 빠지며 허탈감이라 할까. 큰일을 해 냈다는
안도감이라고 할까. 복잡한 감정이 교차한다.
이 현장방송을 계기로 나는 매년 국군의 날 행사중계의
단골아나운서로 자리를 굳히면서 10여 년을 계속하게 됐다. 군 행사에
익숙해지다 보니 엔진 소리만 들어도 탱크인지 자주포인지 알 수 있게 됐고
하늘을 나는 전투기의 제트엔진 소리만으로 기종을 구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그뿐 아니라 내가 처음 현장아나운서를 시작하던 해에 중대장이었던 장교가
연대장으로, 대대장이었던 중령이 장군이 되어 나를 찾아와 그 당시 자기가
지휘하는 부대 소개를 잘 해준 덕택으로 장군으로 진급하게
됐다며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천사들의 남산 나들이
1971년 어느 봄날 오후남산에도 개나리와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아직 신부 티를 벗어나지 못한 아내가
처제와 함께 방송국을 찾아왔다. 처제는 미스코리아 충북 진에 당선되고
서울대회 본선 준비 중 형부 가 근무하고 있는 방송국도 구경할 겸 찾아온 것이었다.
남산연주소 건물에는 오른편에 정문과 왼쪽에는 스튜디오와 공개홀로 들어가는 현관문이
있었는데 외부 손님들은 보통 왼쪽 문으로 드나들었다. 경비실로부터 아내가 찾아왔다는
전화를 받고 청사 앞 등나무 파고라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만나려 현관을 나가는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하더니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형 유리 현관문이
깨져있었고 나는 오른쪽 무릎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이마가 몹시 아파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다행히 피는 흐르지 않았다. 서향(西向)건물에 서녘으로 기운
햇빛이 눈부셔서 닫혀있는 문을 열려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대로 들이
받은 것이다. 유리문 부서지는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방송과장 장기범 선배님이
사무실에서 뛰어 나오셨다. 피가 나는 무릎을 들여다 보시더니 나를 당신의 ?차 까지
안고 가서 차에 태우고 운전기사를 불러 병원으로 빨리 가도록 재촉하셨다. 유리가 깨지면서
파편이 무릎을 찢었으나 다행히 얼굴에는 상처가 없었던 것이 큰 다행이었다. 그 때 장 선배님도
마른 체구였는데 마치 차력사(借力士)처럼 나를 번쩍 안을 수 있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아마 그 분의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힘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내 상처를 보시고 깜짝 놀라며 병원행을 재촉하시던
장 선배님의 얼굴에서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때 병원까지 후송한 분이 안용민 선배였다. 아직도 두 분 께 감사한 마음은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나에게는 “유리문을 뚫고 나간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으면서
“신혼의 아내와 미스코리아 처제가 온 것이 얼마나 반가웠으면 현관문을 부수고
나갔겠느냐‘는 놀림을 받았으나 그 농담이 과히 싫지는 않았다.
명패(名牌)와 TV뉴스
KBS는 TV방송이 개국하면서 청사가 둘로 갈라지게 됐다.
라디오는 본관청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길 건너편에 건물을 새로 건립해서
TV방송을 개시했다. 뉴스를 담당하는 보도기능은 본 청사에서 TV청사로 옮겼으므로
매 시간 하는 라디오 뉴스는 방송국 청사 사이에 있는 4차선 도로를 건너 다니며 해야하니
아나운서들에게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뉴스시간에 쫓길 때에는 질주하는 차들 사이로
뉴스원고를 들고 곡예하듯 건너 다녀야 한다. TV뉴스의 경우는 TV청사에 보도과가
있으므로 뉴스원고를 가지고 다닐 번거로움은 없었으나 대신 데스크 앞에 놓을
자기의 명패(名牌)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지금은 컴퓨터로 이름을
쳐 넣으면 뉴스캐스터의 이름이 뜨지만 그 당시에는 페인트로
이름을 쓴 길이 50cm, 높이 10cm의 삼각형의 나무 토막
명패를 가지고 다녀야 했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흑백TV 시대에 내가 사용한 명패
TV뉴스 명패는 길 건너편 아나운서실에
보관돼 있었는데 깜박 잊고 명패를 안 가져 갔다가 다시
돌아오거나 남의 명패를 잘 못 가져갔다가 헐레벌떡 다시 뛰어 와
바꿔 가는 등 코메디 같은 해프닝도 빈번했다. 어느 날 나는 TV뉴스를
마치고 다음에 할 라디오 뉴스 원고와 명패를 양 손에 들고 본관으로 길을
건너다가 잘 못해서 뉴스원고를 놓치고 말았다. 차들이 휙휙 지나가니 원고는
바람에 차도 위에 이리 저리 흩어져 날아다니니 나는 들고 있던 명패를
집어 던지고 원고부터 쓸어 모으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황해 허둥지둥하는 나의 모습을 본 운전자들이
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흩어진 원고들을
집어줘 가까스로 수습할 수 있었으나 뒤죽박죽된 원고의 순서를 맞추는 것이 큰
일이었다. 잠시의 방심으로 일어난 사고(?)로 이 일대는 잠시 차량들의 정체현상이
빚어졌고 이 사정을 모르는 뒤쪽에서는 빵빵 경적을 울리며 난리가 났다. 황망히 원고와
평패를 주어들고 라디오 뉴스 부스에 들어와 앉았을 때는 뉴스 4분 전, 다행히 뉴스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나 십년 감수한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얼굴에 식은땀이
난다. 나중에 가까스로 주어 들고 온 나의 명패를 들여다 보니 차 바퀴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엉망이 돼있어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언잖았다.
그래도 명패를 들고 다니며 TV뉴스를 하던 그 때가 그립다.
배구캐스터 입문(入門)
하루는 임문택 선배가 부르더니
배구중계방송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운동신경이 무뎌서인지 스포츠에는 큰 관심이 없는 나는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배구중계 캐스터인 임문택 선배는
나의 등을 떠밀어 배구경기장으로 데려가 배구경기의 규칙과 중계방송
요령 등을 가르쳐주며 매일 녹음기를 들고 나가 중계방송을 녹음해오라고 지시했다.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 내레이션을 나에게 넘겨 준 임 선배이니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그의 강력한 권유에 거역할 수는 없었다. 매사에 빈틈이 없이 꼼꼼하면서도 일 처리에
있어서는 공사(公私)가 분명하고 윗사람이라도 사리에 맞지 않는 언행을
했을 때는 거침없이 입바른 소리를 해 “임독사”라는 별명을 가진 그
는 때로 성품은 까칠한 면이 있지만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다.
스포츠 중계방송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이광재 실장도 배구와 야구 종목만큼은 후배에게
양보했다. 특히 임문택 아나운서는 배구중계를 하면서
심판자격증 까지 획득할 정도로 통달해 있었으니 그의 영역을
넘볼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약 6개월 후 나는 그 선배의 뒤를 이어 배구
중계캐스터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 당시는 가히 한국배구의 전성기라
할 때였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나(飛)는 작은 새 조혜정 선수를 비롯한
한국 낭자군이 동메달을 획득했고 강만수 강두태 장윤창 등 거포들과 컴퓨터 세터
김호철이 78년 세계선수권 4강에 진출하며 세계무대를 주름잡던 시기이다.
KBS와 대한배구협회가 “백구의 대제전” 대통령배배구대회가
창설된 것도 한국배구의 황금기인 이 시기이다.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
KBS, 공영방송으로의 변신(變身)
1973년 3월 3일한국방송공사 창립일이다.
KBS가 정부기관의 국영방송에서 공영방송체제로
전환되는 동시에 명칭도 서울중앙방송국에서 한국방송공사로
변경된 날이다. 우리들의 신분이 공무원에서 회사원으로 바뀌면서 대우도
민영방송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상당히 달라졌다. 이제는 가난에 짓눌렸던
어깨를 활짝 펴고 남산 오르막길을 오르내릴 수 있게 됐다. 사원들의 얼굴에는
새 방송체제에 대한 기대와 함께 활기가 넘쳤다. TV수상기의 급격한 보급과 함께
텔레비전방송의 본격적인 확장으로 방송은 라디오시대에서 텔레비전시대로
넘어가면서 아나운서실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라디오 위주의
단조로운 근무형태는 방송채널 확장에 따라 복잡해졌고 아나운서들의
TV출연이 잦아지면서 자연히 스타 아나운서들도 속속 등장했다.
국기강하식과 민방위 훈련
1970년대 중반부터 오후 5시만 되면
라디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이에 맞추어
전국의 모든 관공서와 공공기간 학교 등에서는 국기강하식이
실시됐다. 이 때 길 가던 시민들이나 공무원 학생 등 전 국민은 하던 일을
멈추고 게양대에서 내려지는 국기를 향해 오른 손을 가슴에 얹고 국기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에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맹세 멘트가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그 국기에 대한 맹세는 내가 녹음한 것이었다. 매년
10월 1일 여의도광장 국군의 날 행사 현장중계방송도 나의 전매특허가 됐다.
1970년대 중반에는 슬라이드 영상화면을 이용한 홍보가 크게 유행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든 공식석상에서의 보고에
괘도(掛圖)를 걸어놓고 하는 군대식 브리핑 형식이 정부나 공공기관 등에도
도입됐고 나중에는 차트가 아닌 슬라이드 화면을 상영하면서 아나운서들의 음성으로
녹음해 브리핑하는 형태로까지 이르렀다. 어떤 계기로 이런 슬라이드 영상 식 브리핑에
기용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정부부처나 공공기관, 대기업 등의 홍보물 해설의
상당량을 담당하게 됐다. 어느 정부기관에서 현황보고회를 다 듣고 난 박 대통령이
“방금 해설을 한 사람이 국군의 날 행사 하는 그 아나운서 아냐?”하며 반가워
했다는 얘기가 돌면서 내 목소리의 인기가 갑자기 높아졌다.
과대 포장됐는지는 모르지만
“대통령이 좋아하는 목소리”라는 별칭이
붙으면서 브리핑용이나 교육용 영상물의 해설 의뢰가
쇄도했다. 이 당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을 부르짖으며
경제개발계획 5개년계획에 따른 국가기간산업 건설이 한창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비롯해서 포항종합제철, 남해화학, 고리원자력1호기
건설. 광양제철 등 굵직굵직한 공장들과 안동댐 장성댐 의암댐 등 수리시설의 기공식과
준공식이 박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박 대통령은 거국적인 행사나 건설공사 관련
행사에는 어디이건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고 TV와 라디오 중계방송도 늘 따라다녔다. 아나운서
PD 기술요원 등 중계방송요원은 대통령에 근접해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관계로 철저한
신원조회를 거쳐 신분이 검증된 사람들만 지정돼 있었는데 내가 그 중에 포함돼 있었다.
그 덕에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는 늘 중계방송이 따라갔으니 연간 30여 회 이상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다녔다. 박대통령이 살아생전의 마지막 공식행사는
1979년 10월 26일 충청남도 삽교호 준공식과 출력 1,500kw의
KBS 당진송신소 준공식이었다.
푸른 국토 기름진 강토를 만들어 잘 사는 나라를
가꾸기에 신명을 다 바친 박 대통령은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드는
거대한 민족의 대역사(大役事)인 삽교호 준공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장 10리에 걸쳐 쌓아올린 방조제 위를 걸어 준공식장에 참석한 박대통령은
치사에서 이 우람한 방조제는 우리가 지난 2년6개월 동안 불철주야 산을 깎고
바다를 막아 쌓아올린 땀의 결정이며 국토개발에 있어 또 하나의 우렁찬
개가라고 하면서 머지 않아 우리나라의 모든 농촌이 가뭄과 홍수의
걱정을 모르는 전천후 농토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그가 참석했던 어느 행사 때보다도
표정이 밝았으며 시종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흔히 10.26이라 불리던 그날 저녁 궁전동의 총소리와 함께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날 대통령을 수행했던 한 기자의 얘기로는 11시 삽교호 준공식에 이어 12시에 KBS
당진송신소 개소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통령 일행이 도고온천에 점심식사를 위해
잠시 들렀다고 한다. 이 때 착륙하는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 소리에 놀라 근처 목장에 있던
사슴이 갑자기 죽었는데 이를 두고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 하고 수행원들이 언짢아했다는
후문도 있었다. 어쨌든 이날 삽교호준공식이 내가 그를 가까이에서
본 마지막 중계방송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민방공훈련 방송 전담
1975년 6월부터 매월15일 적의 화생방공격으로부터
방호하기 위한 민방위의 날 훈련이 실시됐다. 내무부 민방위본부에서
주관하는 이 훈련은 KBS가 주방송사가 되어 전 방송채널이 참여하는데 내가
그 방송의 전담아나운서가 되어 민방위본부 관계자와 함께 훈련방송을 진행했다.
당일 오후 2시 경보사이렌이 울리면 전 국민은 하던 일을 멈추고 방공호로 대피하는
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 방송은 내가 전담으로 맡은 후 15년 간 거의 거르지 않고
진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대통령표창, 87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훈했다.
그런데 1983년 8월 초 나는 가족과 함께 강원도 낙산해수욕장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오후 3시 쯤 갑자기 해수욕장 확성기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더니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서울 경기일원에 적기의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즉시 가까운 대피소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실제상황 공습경보입니다.”하고 민방위본부로부터 다급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훈련 상황이든 실제상황이든 언제든지 민방위본부 통제소에서
방송스위치만 올리면 자동적으로 전 방송채널로 송출되도록 돼있다. 조금 있더니
K 아나운서가 나와 이 방송이 실제 상황임을 설명하면서 국민여러분은 당황하지 말고
가까운 방공호나 대피소로 빨리 대피하도록 유도방송을 했다. 해수욕장에서 한창
물놀이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런 방송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 했다. 약 20분 후 경보는 해제됐고 상황은 종료됐다.
나중에 밝혀진 진실은 이날 오후 3시경 중국 공군의
손천근이라는 조종사가 미그21기를
몰고 귀순한 것이었다.
빠지지 않고 매달 훈련 상황 방송을 하던 내가
실제상황방송에는 참여하지 않고 휴가지에서 듣고 있자니 왠지
소외된 생각이 들었다. 하긴 국민에게 훈련 상황 방송에 익숙해진 내 목소리가
실제상황에서는 다른 아나운서의 음성으로 바뀌었으니 더 실감이 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1957년 정동연주소로부터 옮겨온 남산연주소는 기구가 확장되고
방송시설의 증설 등에 따라 협소해져서 20년의 남산시대를 마감하고 1976년
12월 1일 여의도 종합청사를 준공함으로써 여의도시대를 열게 됐다. KBS는
이날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테이프를 끊고 우리나라
방송사의 큰 획을 그으며 새로운 출발을 했다.
KBS,여의도 시대의 막을 올리다.
여의도 방송센터에서의 첫 방송은 새벽 5시뉴스였다.
전날 야근이 우리 팀이었기 때문에 나는 남산연주소에서의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심야에 여의도로 건너와서 이곳에서 첫 뉴스인 5시 뉴스를
해야 했다. KBS 여의도시대를 여는 첫 방송을 내가 담당한다는 설렘과 흥분에 잠이
오지 않았다. 라디오 방송이지만 나는 용모를 단정히 하고 정장차림으로 뉴스센터 스튜디오
마이크 앞에 원고를 놓고 앉았다. 어느 때 뉴스보다도 긴장되고 떨렸다. 뉴스를 마치고 나오니
김경식 보도본부장 등 보도국 간부들이 뉴스센터에 나와 첫 뉴스를 하고 나오는 나에게 의미 있는
인사를 건넸다. 내 자신도 5분짜리 뉴스였지만 무슨 큰일을 치룬 것처럼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낡은 남산연주소를 떠나 여의도 새 청사로 오니 모든 것이 새롭고 옹색한 초가삼간을 벗어나
아흔 아홉 칸 고대광실로 옮긴 것처럼 여유로웠다. 그러나 가난한 시절 아나운서들의
애환이 서렸던 곳이라 그곳을 떠나오면서도 서운함이 가득했다.
아나운서들에게 남산은 바로 마음의 고향이었다.
1960년대까지도 아나운서는 방송국의 얼굴이었다. 1927년
2월 16일 방송이 시작되던 날부터 아나운서는 청취자들의 가장 사랑받는
친구였다. 농촌인구가 전 국민의 70%였던 그 시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뉴스가
유일한 소식통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농어촌에서는 라디오를 가진 집이 한 마을에
몇 집 되지 않았고 대부분이 벽에 매달린 유선방송 스피커 통에서
울려나오는 방송을 듣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 시절 국민들은 방송국에는 아나운서들만
있는 줄 알 정도로 아나운서들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방송의 전면에 선 아나운서의 존재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장기범 임택근 이광재 최계환 전영우 박종세 강영숙
아나운서라면 남녀노소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아나운서의 얼굴은 몰라도 목소리로만....그러다가 텔레비전방송이 등장하고
민영방송들이 등장하면서 우리 방송에도 서서히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목소리의 주인공”으로만 청취자들에게 다가갔던 아나운서들의
얼굴이 TV에 공개되면서 신비감도 차차 걷히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KBS에서 명성을 날리던 아나운서들이
새로 개국한 MBC, 동아방송, 라디오서울(TBC의 전신) 등 각 방송사의
얼굴이 되고 방송국 간의 불꽃 튀는 경쟁과 함께 라디오 전성시대인 60년대를
장식했다. 옹색한 근무여건 속에서도 선후배 간에 풋풋하고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었던 때는 남산시절이었다. 또 숱한 얘깃거리와 간직하고
싶은 추억을 남긴 곳도 남산이었다.
비 오는 날 심야에 귀신이?
내가 정주방송국에서 근무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방송국 청사는 일제시대 때 지은 낡은 목조 2층 건물로 스튜디오와
송신기는 1층에 그리고 사무실은 2층에 있었다.부슬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밤.자정에 저녁근무를 끝내고 2층 사무실에서 잔무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창 밖의
낙숫물 소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스산함을 느끼게 했다. 근무자는 아래층에 엔지니어
한 사람 2층에 나 둘 뿐이었다.갑자기 누가 계단 오르는 소리가 났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몇 초에 한 발짝씩 옮길 때마다 낡은 나무계단에선 삐거덕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한참을 쉬었다가 또 삐거덕 삐거덕-.
엔지니어의 걸음걸이는 분명 아닌데...
이 깊은 밤에 누굴까?
그 순간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옛날엔 이 건물이 병원이었었는데 사람이
죽어나가기도 했었다는 얘기가 더욱 기분 나쁘게 떠올랐다.
그렇다면 혹시 귀신이란 말인가? 그는 어느새 층계를 다 올라왔는지
조용해졌다.조용하니 마음은 더 불안하다.나는 잔뜩 긴장해서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더 못 참고 의자에서 일어나 나가려는 순간 나는 악! 하며
주저앉고 말았다. 눈앞에는 한발이나 되는 머리를 풀어 헤쳤고 너덜거리는 옷은 비에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나를 보더니 “히히히” 하며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어느 공포영화에
나오는 귀신 바로 그 모습이었다. 어찌나 놀랬는지, 한참을 혼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그 귀신(?)은 평소 방송국 앞 중앙공원을 배회하며 지내는
여자걸인이었다.그 당시만 해도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들이 흔한 때였으니까.
내가 방송국을 드나들 때마다 서로 얼굴을 익혀온 터라 그 여인은 비를 피해
방송국으로 들어왔다가 나를 보자 반가워서 웃어 보였던 것이다.
나도 그제서야 허탈감에 쓴웃음으로 인사해주었다.
이 에피소드는 내가 청주국에 근무하면서 잊혀
지지 않는 추억의 한 토막이다.
국제국장(國際局長)과 국제극장(國際劇場)
저녁 10시면 야근 근무조가 한창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대다. 중파방송(지금의 제1라디오)의
콜사인과 10시 뉴스, 국제방송의 해외로 보내는 단파뉴스 등
조원들이 각기 배당표에 따라 스튜디오를 드나드는 시간이다. 아나운서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방금 10시 뉴스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던 K 아나운서가
“네 아나운서실입니다” 하고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에서는 대뜸
“나 국제극장인데”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뜩이나 뉴스를 많이 더듬어 심난한데 건방지게
극장에서 반말로 전화를 걸어오다니 K아나운서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 당시에는 가끔 아침 생활정보시간에 극장프로를 안내해 달라는 부탁전화가 자주
걸려왔었는데 오늘처럼 거만스런 전화는 처음이었다. K아나운서는 “여보 국제극장인데
왜 반말이야!” 하고 대꾸했다.그랬더니 상대방은 “당신 누구야?” 하고 소리 질렀다.
“나 아무개다, 왜”.“내일 내 방으로 와!” 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목소리로 외치더니
전화를 끊었다.K 아나운서도 씩씩거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문제는 다음날 일어났다. 실장이 출근하자마자
국제방송국장실로 불려 올라갔다. 그 당시에는 KBS의 직제가
중앙방송국과 국제방송국 텔레비전방송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참
만에 돌아온 실장이 심각한 얼굴로 K아나운서를 불렀다. 영문을 모르고 불려간
K아나운서에게 “어제 국제국장님의 전화를 당신이 받았나?” “아니요. 국제극장에서
걸려온 전화 밖에 안 받았는데요.” “이 사람아 그게 국제극장이 아니라 국제국장이야!
어제 밤 국장님의 전화를 불경(不敬)스럽게 받았다면서? 빨리 올라가 사죄드려.”K아나운서는
아차! 그제서 어제 밤 “국제극장” 전화사건이 떠올랐다. 그 사건은 한마디로 소통(疏通)의 차이에서
벌어진 불상사였던 것이다. 당시의 L국제방송국장은 경상도 분으로 평소 발음이 명확하지 않았는데
이날따라 국장과 극장의 발음을 혼동한 K아나운서가 그만 “국제극장”(당시 광화문에 있었음)에서
걸려온 전화로 오인한데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의 불명확한 발음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신중하지 못하고 불친절하게 전화를 받은 쪽도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는 대중가요가 있듯이 "극"자와
"국"자의 점 하나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또 우리 속담에 “어”와
“아”가 다르다는 말이 있다. 글자의 혹 하나 차이이지만 때로는
엉뚱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으니 우리 언어생활에
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겠다.
뉴스원고 실종사건
1971년 5월 어느 날 새벽 L아나운서는
6시 뉴스를 준비 중이었다. 원고 예독(豫讀)을 마치고
스튜디오로 향하던 중 갑자기 변의(便意)를 느껴 화장실엘 들러야만 했다.
뉴스원고는 화장실 세면대 위에 가지런히 놓고 용변 칸에 들어가 일을 보고 나와 보니
원고가 온데간데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하긴 용변을 보고 있는 동안 누가 들어왔다 나가는
인기척이 있긴 했는데... ‘누가 날 골탕 먹이려고 장난치는 걸까?’ 그러나 뉴스시간이
3분밖에 안 남았으니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보도과에 가서 원고를 다시 가져올 여유가 없다.
L아나운서는 아나운서실로 뛰어가 갓 배달된
조간신문을 들고 뉴스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뉴스 1분 전,
노련하고 침착한 아나운서라 해도 깨알 같은 신문글을 예독(豫讀)도 없이
유창하게 읽어 나가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신문의 머릿 기사부터
살얼음판 걷듯 읽어 내려갔는데 5분 뉴스가 마치 50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뉴스를 끝낸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얼굴은 술 취한 사람처럼
상기돼 있었다.정신을 겨우 가다듬은 L아나운서는 감쪽같이 사라진
뉴스원고를 찾아 나섰다. 그는 불현듯 ‘아, 그렇다 범인(?)은 바로
청소원일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그를 찾아 나섰다.
청사 안을 뒤지던 그는 어느 사무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청소원을 발견하고 끌고 다니던 대형
쓰레기통에 눈길을 돌렸다. 신문지와 폐지로 가득 찬 쓰레기통을 뒤지던
그는 그 속에서 몇 분 전에 정성껏 읽었던 뉴스원고 뭉치를 발견하고 한편으론
화가 치밀었고 한편으론 허탈감에 빠졌다. 다짜고짜 그 청소원에게 “당신 때문에
뉴스를 망쳤다”고 따지자 오히려 청소원이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자기는 화장실에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세면대에 폐지뭉치(?)가 놓여있기에 쓰레기통에 주워 놓고
나왔는데 무슨 잘못이냐는 것이다. 하긴 그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 중요한
뉴스원고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사람의 잘 못인 것이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간신문이라도 들고 들어갈 기지를
발휘해서 “펑크”의 위기를 넘긴 것이다.
새벽 5시의 방송 종료멘트
1970년 8월 어느 날 남녘의 지역방송국에서
일어난 일이다.그 당시 지방방송국 근무란 단조로워서 저녁 9시
로컬뉴스를 끝내면 12시 종료멘트 시 까지 별로 할 일이 없으니 근무자들 중
바둑에 심취한 사람들끼리 만나면 숙직실에서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예사였다.
이날은 바둑을 유난히 좋아하는 M아나운서가 야근이었는데 역시 당직인 K기자도 바둑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바둑광(狂)이었다. 두 사람의 맞수가 만났으니 한 판 벌일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날 마침 비번(非番)인 B아나운서가 저녁을 먹고 방송국에 놀러 왔는데
두 사람의 대국을 구경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면서“선배님 종료멘트는
제가 넣고 갈게요.”하니까 M아나운서는“응, 고마워 부탁해”하며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바둑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조정실로부터 “아나운서!”하며 소리치는 엔지니어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바둑에 빠져 판을
거듭하는 동안 어느새 날이 새 버린 것이다.
M아나운서는 본능적으로 바둑알을 내 던지고
스튜디오로 뛰어갔다. 스피커에서는 새벽 5시 방송개시를 알리는
애국가가 울려 나오고 있었다. 급하게 뛰어가 마이크 앞에 앉은 아나운서는
ON AIR의 큐가 들어오자“지금까지 여러분께서는 대한민국 ○○에서 보내드린
KBS ○○방송을 들으셨습니다 ” 하니까, 조정실의 엔지니어가 깜짝 놀라
마이크를 끄고 손을 내 저으며 그게 아니라는 제스처를 했다.
방송 개시멘트를 넣으라고 큐를 줬더니
끝 멘트를 넣으니 엔지니어는 놀랄 수 밖에... 그
아나운서는 엔지니어의 제스처를 방송이 안 나갔으니
다시 하라는 신호인줄 알고“지금까지 여러분께서는... 오늘
방송을 마치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고 끝 멘트를
다시 힘주어 반복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실소를 금치 못할
사고였다.그 멘트가 나가자마자 청취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아니 그 아나운서 정신 나간 사람 아냐? 새벽에 일어난
사람한테 다시 자라니!”
아나운서는 방송 종료멘트를 넣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종료멘트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전날 밤 놀러 왔던 후배 아나운서가 종료멘트를 넣고 간다고
했는데도 바둑에 몰두하는 바람에 그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밤을 새는 줄 몰랐으니 사고는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넌 마, 왜 여태 안 자?
60년대 말 여름 어느 날 남산연주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나운서실에 총각들이 많으니 퇴근 후 대폿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늦으면 통금시간에 걸려 집에 갈 시간이 없으면 으레 남산으로 올라오는 것이
습관처럼 돼있었다. 하루는 C 아나운서가 밤 11시 경 거나하게 취한 채 술병을 사 들고
올라와 근무 중인 B 아나운서 등과 청사 앞 등나무 밑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잔을
나누었다. 11시가 지났으니 방송은 콜사인과 대북뉴스인 “새소식”만 끝내면 오늘의 근무는
대충 끝나는 것이다. B 아나운서가 자정 콜사인을 넣으러 간다고 일어서니까 동기생인
C아나운서가 자기가 대신 넣고 오겠다며 나섰다. B 아나운서는 근무자인 자기가
넣어야 한다며 C아나운서를 뿌리쳤으나 취기(醉氣)가 오른 C는
막무가내로 단숨에 부조정실로 달려갔다.
술이 좀 취했다고 해도 콜사인 한 마디 정도를
실수하리라고는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스튜디오에
들어간 C아나운서는 강한 조명 속에서 취기가 갑자기 올라 자기가 콜사인을 넣으러
들어간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고 말았다. 몽롱한 정신으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엔지니어를
보자 “야, 넌 마 왜 여태까지 뭐 하느라고 자지 않고 앉아있어”하고 소리 질렀다. 아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 말을 하기 전에 엔지니어는 이미 콜사인 on AIR 불은 켜준 상태였던 것이다. 그가
엔지니어에게 한 말이 콜사인 대신 그대로 공중으로 흩어져버린 것이다. 엔지니어는 분명
그가 콜사인을 넣을 줄 알고 큐를 줬는데 아나운서의 입에서는 그만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런데 청취자들 입장에서 보면 느닷없이 “뭐 하느라고
자지 않고 앉아 있느냐”고 호통을 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젊은 아나운서의 객기가 빚어낸 방송사고였다. 그 사건 다음날
일어난 결과에 대해선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하늘도 노(怒)하고, 땅도 노(怒)하고"
밤 11시 뉴스가 끝나면 “남산의 메아리”라는
5분짜리 생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날의 이슈를 다루는
논설형식의 비중 있는 낭독프로이므로 고참 아나운서가 주로 담당했다.
지금처럼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친 원고가 아니라 원고지에 펜으로 쓴 원고인데
이날 담당인 L아나운서는 원고의 길이가 짧았는지 낭독속도가 빨랐는지 11시 10분에
끝내야 하는데 40초가량 일찍 끝냈다. 이럴 때 다음 프로가 시작될 때까지 짧은 스파트
(Spot)로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 애드 립(Add Lip)을 쓴다는 것이 “여러분
밤에 창문을 열어 놓고 자다가는 참변(慘變)을 당하기 쉽습니다.”
그의 의도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임기응변으로 하다보니까
엉뚱한 내용이 되고 말았다.
그 때는 국민의 대다수가 가난한 생활을 할 때였다.
지금처럼 강도가 횡행하거나 살인사건이 자주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생활이 어렵다보니 좀도둑이 극성을 부릴 때였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좀 산다하는 집이라야 선풍기 바람에 더위를
식힐 정도였고 창문은 대개 열어 놀고 잠들을 잤다. 입을 옷도 귀한
이 당시에는 빨랫줄에 널어놓은 옷도 걷어가는 시절이었으니 그 때
우리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넝마주이라는 부랑인들이 많았는데
요즈음의 폐품수집인 들에 해당할까. 등에는 커다란
바구니를 짊어지고 한 손에 든 쇠갈고리로 넝마든 폐지든 돈이 되는
것이라면 갈고리로 찍어 등 뒤 바구니로 집어넣고 다녔다.캄캄한 밤에는
이들이 골목길을 다니며 열린 창문을 통해 벽에 걸어놓은 옷가지들을 낚아채
달아나는 일들이 흔했다. 아침에 일어나 외출하기 위해 벽에 걸어놓은
옷을 입으려고 보면 옷이 감쪽같이 없어져 황당했는데
바로 그들의 짓이었다.
L아나운서가 의도했던 멘트가 이런 옷 절도를
예방하자는 것이었는데 “참변(뜻밖에 당하는 끔찍하고 비참한
재앙이나 사고)”이란 섬뜩한 어휘가 튀어 나왔으니 이를 어찌 할꼬?
이 시절은 생활은 가난했어도 강력범죄는 요즘처럼 흔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좀도둑들이고 그나마 주인에게 들키면 해코지 하지 않고 도망쳤다. 잘 못 선택한
말 한 마디를 수습해 보려고 애 쓰다가 오히려 제한된 시간을 초과해 버리고 말았다.
개인 간의 대화에서도 어휘 하나가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화이다
이 일이 있은 후 방송과에서는 각 스튜디오에 20초, 30초, 40초짜리 등 상황별로
남는 시간을 메울 수 있는 공익 스팟트 멘트를 비치해 놓았다.
1972년 8월 서울에는 기록적인 강우로 대홍수가
일어났다. 중부지방에는 하천이 범람해서 수 많은 농경지가
물에 잠기고 서울의 한강변 저지대에서는 수천 채의 가옥이 물에 잠겨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는 전재(天災)였다. 홍수경보가 발령되자 방송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홍수피해상황을 수시로 방송했다. 텔레비전방송은
시내 피해지역에 중계차를 내 보내 피해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방송했다.
제1한강교는 상판 턱 밑까지 물이 차 올라 금세라도 다리를 집어 삼킬듯이
세차게 흐르고 용산쪽 강둑은 범람 직전의 위기상황이었다. 제1
한강교 상황을 중계방송하기 위해 L아나운서가 나갔다.
"여기는 제1한강교입니다.
이곳 한강은 지금 엄청나게 불어난 강물이
망망대해를 연상시키듯 노도와 같이 흘러 내리고 있습니다.....
<중략> 하늘도 노(怒)하고 땅도 노했나 봅니다.....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있습니다." 이 멘트에서 어법 상 잘 못된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당시의 시대상황이나 사회적인 분위기에 비춰 본다면
그리 적절한 표현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당시 제3공화국은 1969년 박대통령의
3선 개헌에 이어 1972년 10월에 유신헌법을 통과시킬
계획이어서 민심이 뒤숭숭한, 저항세력들이 흔히 표현하는 "공안정국"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나운서는 문화공보부 소속의 공무원 신분이었다.
각 언론들도 몸을 사리고 방송인들도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살얼음판 걷듯이
조심할 때였다. 이러헌 민감한 시기에 홍수상황을 중계방송허러 나간
아나운서가 시국에 대한 저항이 담긴 듯한 표현을 뱉어내니
무사할 리가 없었다.
"뭐? 한강이 망망대해를 연상시켜?
하늘도 노하고, 땅도 노하고? 이게 무슨 뜻이야!
당신 무슨 의도로 한 멘트야!" 서슬이 시퍼렇던 공안기관은
아나운서를 불러다 놓고 이렇게 다그쳐 물었고 아나운서는 아무 의도도 없이
그저 보이는 대로 설명했을 뿐이라며 변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어쨋든
이 중계방송 이후 그는 한 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앞의 두 프로그램에서 보듯 방송에서 아나운서가
임기응변이나 즉흥적으로 현장상황을 묘사할 때 자기의 표현이
적절한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신중하게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군색한 자랑거리어느 사회단체에서 주최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주요
참석인사들을 소개하는 순서에서 내가 방송계 대표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게 됐다. 사회자가 나를 KBS 아나운서라고 소개했지만 나는 라디오에서만
활동하는 연고로 해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뉴스 외에는 별로 내세울만한 고정프로그램도 없었으니 난감했다.
“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청취율이 높고
중요한 두 개의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제 목소리만 나오면 국민 모두가 꼭 들어야 하고 동시에
그 자리에서 행동을 멈추게 됩니다.” 이렇게 말문을 열었더니
좌중은 조용해졌고 저 친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나 하고 시선을
나에게 집중했다.“그 중 한 프로는 오후 5시에 제1 라디오를
통해 전국으로 퍼지는 국기강하식입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할 것을 굳게 다짐 합니다-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었더니 그제야 귀에 익은 내 목소리를 알아 챈 좌석에선 웃음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내친김에 “또 한 프로는 매달 한 번씩 하는
민방위의 날 훈련방송입니다. -국민 여러분 방금 민방위본부에서는
훈련공습경보를 발령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던 일을 멈추시고...”
그랬더니 다시 웃음이 나왔다.
“이 두 프로는 제가 10여 년간 전담으로
맡고 있는 중요한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를 열심히
진행해 온 공로로 정부에서는 저에게 국민훈장을 주었습니다.
이 만하면 별로 재미는 없지만 제가 여러분께 자랑할 만 한 프
로 아닙니까?” 하마터면 썰렁할 뻔 했던 나의
자기소개는 뜻밖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철가방의 스튜디오 침입사건
지방의 어느 방송국 K아나운서는 야근교대를 하고
밤 근무에 들어갔다. 저녁식사를 위해 방송국 근처에 있는
중국집에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켰다. 저녁 8시경 시켰는데 9시가
가까워지도록 감감무소식이다. 9시 5분에는 중앙의 메인뉴스에 이어
로칼 뉴스를 해야 하는데 그 안에 먹기는 그른 것 같다. 결국 뉴스를 끝내고
먹기로 하고 원고를 가지고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한편 철가방을 들고
중국집을 나선 배달원은 오늘 처음 들어온 새내기였다
.
그에겐 처음 들어온 방송국 건물이
사방이 육중한 문으로 막혀있고 조정실과 스튜디오들로
통하는 길이 미로처럼 돼 있어 어디로 가야할지 이리저리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자그마한 유리창너머 방에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걸
발견한 이 배달원은 반가운 나머지 “아 여기구나”하며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안에서는 이미 K아나운서가 한참 뉴스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스튜디오 문이 열리더니 철가방을 든 배달원이 저벅거리며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아나운서는 원고를읽으면서 한 손을
내 저으면서 나가라는 시늉을 했으나 이를 알아채지 못한
배달원은 오히려“자장면 가져 왔시요” 하고 지껄이면서
자장면 그릇을 뉴스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스튜디오는 일순간 철가방 여는 소리 그릇 꺼내는
소리로 시끄러워지며 뉴스고 뭐고 엉망이 돼 버렸다.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조정실에 있던 엔지니어도 어떻게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이 시간 집에서 뉴스를 들은 직원의 말에 의하면
뉴스가 듣고 있는데 갑자기 덜커덕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자장면 가져 왔시요”
하는 남자의 음성과 함께 물건 부딪히는 잡음이 시끄럽게 들리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밀고 들어온 자장면 배달원만 나무랄 일이 아니다.
방송국이란 데를 난생 처음 들어와 본 시골 청년이니 문 위에
켜진 on AIR가 무언지 “방송중”이 무언지 알 턱이
없으니 일반 사무실 들어가듯 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방송국 건물에 경비가 완벽하고
보안시스템이 철통 같지만 그 당시엔 경비원도
없고 저녁에는 당직기자와 아나운서, 엔지니어 3사람이
야근을 하며 방송국을 지키니 이런 웃 못할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아나운서들의 신나는 나들이
1969년 어느 늦은 봄날 남산을 오르는
상춘객들의 행렬이 방송국 앞 도로를 메웠다. 그 당시에는
시민들의 봄나들이 장소로 창경원 아니면 벚꽃이 만발하는 남산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모처럼 아나운서실에도 봄기운이 가득했다. 늘 방송으로
바쁜 이광재 실장도 이날만은 자기 자리에서 방식구들과 함께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여자아나운서들이“실장님, 우리도
야유회 한 번 가죠”하고 시동을 걸었다. 이에 실장이
“그러지 어디로 갈까?” 한 사람이
“바다구경 좀 했으면 좋겠어요”
“와, 좋겠다” 하고 거들고 나섰다.
이윽고 실장은 의자를 뒤 벽 쪽으로 돌리더니
전화 수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그는
중요한 전화를 걸 때면 회전의자를 뒤로 돌리고 전화를
거는 습관이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참 통화를 하더니 “
다음 주 일요일 인천 앞 팔미도로 가기로 했어.” 즉석에서
아나운서들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고 하니까
모두들 가슴 설레 했다. 그날이 왔다. 현업근무자들을
남겨두고 우리는 인천으로 향했다. 어떤 행사든 업무특성상
아나운서실 전원이 함께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천항 부두에는
해운국장이 순시선 한 척을 대기시켜 놓고 우리를 맞이했다. 실장은 해운국장에게
감사를 표하고 아나운서실 일행에게 그를 소개하며 큰 박수로 감사를 표하게 했다.
해운국장은 무척 황송해 했다. 이광재 아나운서를 직접 만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KBS 아나운서들로부터 박수를 받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우리의 허장성세(虛張聲勢)를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광재 실장을
비롯한 KBS아나운서들의 인기와 위상이 얼마나 컸었나를
표현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커다란 순시선을 타고
1시간 거리인 팔미도로 향했다. 그 당시 팔미도는
군사보호지역이었기 때문에 민간인의 접근이 금지돼 있었지만
당국의 특별배려로 그곳에 들어가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이광재 실장은
방송의 욕심이 많다고 비난하는 선배들도 더러 있었지만 적어도 자기 부하들의
복지(福祉)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한 분이라고 생각한다.자기가 대외적으로
얼마나 권위가 있고 인기가 있나를 부하들에게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가 봐도 진심을 다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번 같은 야유회를
간다 하면 집에서 부인과 함께 40명 식구들이 먹을 음식이며
간식 등을 밤새 만들어 그의 퍼블릭카(지금의 경차
급의 소형차)에 잔뜩 싣고 나오곤 했다.
전 해에는 여자아나운서들의 성화로 제주도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요즈음처럼 항공편이 보편화 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유층의
신혼여행이 아니면 일반인들이 비행기로 제주도를 여행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때였다. 실장은 공군의 협조로 군 수송기를 타고 꿈같은 제주도를 다녀온
것이다. 이것도 이광재 실장의 외교적 수완 덕분이었다.누구의 수완 덕분이건
바다와 하늘을 누비며 야유회를 다닌 아나운서들의 사기는 상당히 살아
있었다. 이제는 기차를 타고 대지를 누비는 일만 남아있다.
뜻 밖에 터진 파발마 사건
1969년 2월 우리나라에도 “관광호”열차가 개통됐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대전 동대구에만 정차하고 부산에 도착하는
특급열차로 시속 110km로 달려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 50분대에 주파한다.
(오늘날 2시간여의 운행시간을 과시하는 KTX 열차에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있지만)
“관광호”는 한창 불 붙었던 새마을운동을 상징해서 1974년 “새마을호”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0년 어느 봄날 이광재 실장은 야유회 갈 것을 제안했다. 장소는 대전 근처 계룡산의 동학사,
교통편은 “관광호 열차”였다.아나운서실에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말로만 듣던
특급열차 관광호를 타 보는 것은 아나운서들에게 꿈이나 다름없었다.
실장은 이미 관광호 1칸을 예약해 놓았다.
40여 명 아나운서들의 열차표는 자비로 구입했는지 교통부
고위층에게 청탁해서 확보했는지 그 당시 말단(末端)인 나로서는 알 수도 또
알 필요도 없었다. 오직 말로만 듣던 관광호를 타 보는 것만 좋기만 했다. 특히 실장은
결혼한 사람은 아내까지 동반할 것을 권유했다. 첫 아이를 임신 중인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무척 좋아했다. 사실 아내는 결혼 이후 서울 시내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실장은 관광호 여행을 발표해 놓고 며칠 동안 꽤 분주해 보였다.
며칠 전부터 실(室) 게시판에는 “당일 오진 7시까지
서울역 파발마(역사 정면 시계탑) 앞에 전원 집합(集合)하라”는
광고가 붙어 있었다. 야유회 전 날의 근무표를 들여다보던 실장은 나를 불렀다.
“미스터 최가 그날 야근이지?” “예” “당일 새벽 4시 반에 우리 집에 전화해서 나를 깨워줘.”
“예 알겠습니다.”실장은 야유회 에는 으레 그렇듯이 당일 방 식구들이 먹을 도시락 등 간식
거리를 준비하느라 그의 자가용인 “퍼블릭 카”에 식자재를 잔뜩 싣고 퇴근했다.
드디어 대망의 야유회 D-1. 근무표 대로 나는 그날 저녁 7시 야근을 위해
출근했다. 출근하면서 집사람에게는 내일 아침 7시 까지 서울역
시계탑 앞으로 나오라고 단단히 일러뒀다.
그런데 아나운서실에 들어서니 교대자 들의 분위기가
여느 때와는 좀 다른 걸 느꼈다. 교대하는 한 선배가 나에게
다가오더니“내일 서울역에는 나가지 말아” 깜짝 놀란 내가 “왜요?”하고
물었더니“ 그건 나도 몰라. 하여튼 나가지 말래” 하며 자기도 불만 섞인 표정으로
퇴근해 버렸다.야근하러 들어온 우리 팀은 각자 그 통보를 받고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자 내일 근무를 마치면 홀가분하게 야유회를 가려고 단단히 준비하고 나온 우리들에게
나가지 말라니. 도대체 그 이유가 뭐야? 하고 투덜댔지만 이유를 설명할 사람은 없었다.
다만 조장급(組長級) 선배들 중 몇 사람이 이 일을 벌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일종의 사보타주(Savotage)이다. 그러나 팀의 막내인 나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장에게 무슨 불만이 있기에 집단행위를 한단 말인가.
전혀 예기치 않은 일에 맞닥뜨리고 나니 크게 걱정스러운 일이
두 가지가 생겼다. 하나는 아내에게 내일 서울역에 나가지 말라는 것인데
당시에는 전화가 없으니 이문동(里門洞)에 있는 집엘 가서 전하고 통행금지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올 것을 생각하니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걱정은 이 사실을
사전에 실장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는 지시였다. 그런데 나는 내일 새벽 4시
30분에 실장댁에 전화를 걸어 깨워줘야 할 지시를 받아 놓은 상태이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근무 중 나는 집으로 향했다.
요즈음처럼 교통사정이 좋지 않을 때였으므로
허둥지둥 집에 도착하니 아내가 깜짝 놀랬다. 아내는
내일 입고 갈 한복을 매만지고 있는 중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내일 야유회는 취소됐으니 나오지 말라하니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냐는
표정으로 무척 실망해 했다. 그런 아내를 달랠 틈도 없이 나는 다시 방송국으로
달렸다. 이날 나는 밤을 꼬박 새웠다. 실장 댁에 전화 할 걱정이 태산 같다.
밤은 왜 이리 긴가.새벽 4시 30분이 되자 나는 실장 댁에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4시 반입니다.” “응, 수고했어. 준비들은 다 됐나?” 이미 잠에서
깨 있는 듯 실장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네” 하고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실장님 사실은 이러저러해서 내일 야유회는
안 간다고 들 합니다. 실장님 야유회 취소하시지요”
하고 보고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나에게는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은 더 심란해졌다. 실장은 일찌감치
방 식구들이 먹을 음식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파발마(시계탑)아래로 나갔다.
약속시간인 7시가 다 되도록 아나운서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TV아나운서로 새로 뽑은 N양과 H양 두 사람에 이어 B 아나운서가
나타났다. 그는 조장 급(組長級)) 아나운서들 중 최 고참으로
아나운서실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성격이나 방송이 여성적이고
다정다감해서 동료들이나 후배들이 “B 언니”라고
부르면서 무척 따랐다. 그는 출발시간이 다가오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들 봐라 일을 일으킨
것 아냐? 나까지 속이고’ B는 배신감과 절망감에 머리가 멍해졌다. 평소
대범한 실장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짙어져 갔다.
서울역 (중앙 시계탑의 이름이 파발마다)
파발마 아래에는 두 신인 아나운서와
B 아나운서, 그리고 실장 내외분, 이렇게 5사람이
열차 출발시간 까지 시계탑 아래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한참을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들 앞에는 실장 내외가 밤을 새며
만든 40명분의 샌드위치며 음료수며 음식물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왜 N과
H 두 신인여자아나운서와 “B언니”만 현장에 나가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무겁게
싸온 보따리를 돌아갈 때 거들어드리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잔인한 장난 끼가 숨어 있는 것이었을까.“B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넋을 잃고 있던 부인에게“사모님 죄송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한동안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멍하니 서있던 실장 내외는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처절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철석같이 믿었던 부하들로부터 참을 수 없는
배신과 모욕을 당한 실장 내외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겠거니와 나
에게도 정말 힘든 24시간이었다. 나 뿐 만 아니라 선의의 아나운서 모두는
불편하고 불안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용의주도하게 거사를 꾸미고 의도대로
일을 성공시킨 당사자들은 쾌재를 부르고 그들만의 축배를 들었을지 모른다.
나의 고민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실장을 만날 터인데
무슨 용기로 그를 뵌단 말인가. 새벽 4시 반 그를 깨울 때 사실을 얘기했으면
그의 자존심과 명예에 치명적인 상처는 미리 막을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자책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낮 근무인 나는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했다.
전날 밤을 샌 야근(夜勤)조와 일근(日勤)조, 상근(常勤) 등
여느 때처럼 아나운서실은 이때가 가장 인원이 많이 있는 시간이다.
모두들 어제 일을 생각하며 초조하고 무거운 표정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실장이 출근하면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부터 할까. “당신들 나에게 그렇게
배신할 수가 있어? 도대체 그 이유가 뭐야? 주동자는 누구야?” 하며 진노할
실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실장이 들어오기를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실장이 방엘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수고들 했어” 하고 인사하는 그의 말투도
여느 때처럼 밝았다. 책상에 앉으면서 하는 뉴스와
콜사인 배당 등 일상 업무도 전과 똑 같았다.
즉 어제 실장과 우리들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일깨워주려는 것 같았다. 그날뿐이 아니었다.
그 이후 “파발마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건은 “우리들의 사건으로 그쳤고 외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물러가는 아나운서실의 신화(神話)
그 일이 있은 몇 달 후 실장이 미국 VOA
(미국의소리)방송으로 떠나게 됐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당시에는 KBS에서 VOA(Voice Of America)에 2년간씩 미국정부의
초청으로 파견근무를 했는데 장기범, 강찬선 아나운서가 다녀왔고 송한규
아나운서에 이어 이번에 이 실장이 파견근무를 떠나게 된 것이었다.
지난 번 파발마사건에 이은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인기절정에 있던 그가 돌연 미국행을
택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미국행을 결심했을까? 그가 돌연 VOA행에
대해 자신이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실원(室員)들은 지난번 파발마사건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후배들에게
비수(匕首)와 같은 배신을 당하고 나서 더 이상 아나운서실장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섰을 것이다. 미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종로3가 세운상가에 있는 아서원(雅?苑)이란
중국음식점에서 이광재 실장의 송별연이 열렸다. 그 자리에는 실장 내외와 근무자를
제외한 아나운서들이 대부분 참석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며칠 후 그는 그를 아끼던 많은 애청자들과 후배들을
뒤로 하고 미국 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로써 이광재 아나운서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와 함께 남산에 메아리 치던 우리 아나운서들의
전성시대도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 즈음 방송계는 3개 민영방송의
성장과 함께 라디오 시대에서 TV시대로 변화하면서 아나운서들의
설 자리가 서서히 좁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난 후 새 실장이 부임하고 새 면모를 갖추었지만
개운치 않은 사건 후에 실장이 미국파견이라는 명분으로 자리를
떠난 것은 그를 따르던 후배들의 마음을 오래도록 아프게 했다. 파발마
사건은 그 후 누구에 의해 주도된 것인지 나는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사건이
있은 후 사석에서도 누구 하나 그 사건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 사건은 자연히 물 밑으로 가라앉게 됐다. 다만 이 실장의 지나친 방송욕심으로
인기 있는 프로를 독점하고 불공평한 프로그램 배당에 대한 몇몇 조장급
간부들의 불만이 누적됐다가 폭발한 것이라는 뒷 얘기들이 후배
아나운서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은 있었다. 새내기에 불과한
나로서는 실장이 무슨 스포츠 중계를 맡든, 어떤 프로를
배당하든 조그만 불만도 가질 위치가 아니었으니
나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