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은 1927년 2월 16일 1시를 기해서 전파를 발사한 JODK 경성방송국이다. 출력은 1Kw로 전국을 시청권으로 했지만 경기도 일원에서만 그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일본말과 우리말을 동일 채널로 방송할 때 우리방송은 곁방살이 신세를 하면서 차별을 받아 조선인들의 청취자는 극소소수에 불과해서 청취료로 운영하던 경성방송국의 경영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일제 강점기 방송망확장과 지방방송국 건설의 역사적 고찰
라디오 수상기를 늘리려 해도 한계가 있었다. 출력을 늘리고 방송망을 확장 할 계획이 수립되어 그 첫째계획 실현이 연희에 10Kw송신소를 세우고 조선말 채널을 독립시켜 따로 방송하는 것이었고 지역에 방송국을 짓는 것이었다. 연희에 10Kw 전파가 발사된 것은 1933년 4월 26일이고 이로부터 조선말 방송이 새로운 채널로 독립되면서 곁방살이를 면하고 방송시간도 대폭 증가되어 조선인들이 방송에 관심이 높아졌다. 그리고 곧이어 1935년 9월 21일 부산, 1936년 4월 10일 평양, 1937년 6월 5일 청진, 1938년 10월 1일 이리, 같은 해 10월 30일 함흥 다섯 군데의 지방방송국에서 전파가 발사 되었다. 이것이 제 1차 지방방송국 확장계회 실현이었다.
1차방송망 확3장계획으로 설치된 방송국은 250W에서 500W까지의 출력으로 방송했고 우리말 방송과 일본말 방송을 따로 방송하도록 한 것이지만 처음에는 일본말 방송만으로 방송된 곳도 있었고 청진방송국 같이 10Kw 대 출력으로 특수목적수행을 병행하는 방송국도 있었다. 전파방해가 없던 시절 250W나 500W 출력의 방송으로도 가청권은 꾀 넓어서 이리방송의 500W 출경의 방송이 서울에서도 들 을 수 있었다. 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청진방송국과 비슷한 시기 1937년 4월 17일부터 방송된 조선어방송 50Kw 대 출력 송신소우리나라 전체를 청취권으로 넣어 출력이 낮은 지방방송국의 방송이 들리지 않는 곳까지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한다는 큰 뜻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대륙 침략을 꿈꾸던 일본이 그 방송기지로 삼고 또 특수목적방송을 한다는 뜻도 있었다.
중. 소 국경 바다를 끼고 건설된 청진방송국과 일본 NHK보다도 더 먼저 건설된 50Kw 대 출력은 그때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고 실재로 우리말 방송이 끝난 심야시간에는 소련어나, 중국어로 특수방송을 한 적도 있다는 얘기가 있다. 연희의 50Kw송신소를 건설하는 데는 일본 유학길에서 돌아온 천재기술자 황태영의 공로가 커서 이 공사가 끝난 후 이리방송국의 기술과장으로 있다가 1943년 단파방송 수신 사건으로 물러나 사업을 하던 중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국 HLKZ를 건설한 황태영이다.
1차 방송망 확장 기간 중 1935년 7월 1일에 문을 연 부산의 동래 수신소는 일본의 방송을 서울에서 직접 중계방송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부산에서 일본방송을 수신해서 서울로 유선으로 보낼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 1차 방송망 확장계획의 실현으로 라디오 수상기가 대폭 늘어나 방송국의 경영상태가 좋아지면서 조선방송협회의 새로운 청사를 세워 1940년 9월 20일 준공됨에 따라 여기 저기 있던 사무실을 한곳으로 모으고 연주소 내에 있던 사무실도 이곳으로 옮겨 연주실의 스튜디오를 확장 하는 등 방송시설의 개선이 있었다.
2차 지방방송국 확장계획은 1937년부터 벌어진 중일전쟁, 곧이어 터진 세계 제2차 대전 등으로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1940년 10월 30일 대구, 1941년 3월 21일 광주, 1941년 12월 1일 강능, 1942년 2월 20일 마산, 같은 해 11월 21일 목포, 1943년 4월 10일 원산, 1943년 7월 15일 대전, 1943년 8월 1일 신의주와 해주, 같은 해 11월 1일 성진, 1944년 12월 20일 춘천, 1945년 6월 15일 청주방송국이 문을 열어서 해방될 때까지 남한에 10개의 방송국에서 방송을 했고 북한에 7개의 방송국이 건설되었다.
한국방송 70년사에서/한국방송협회 / 내용이 다소 다른 부분이 있는것 같습니다. 계속 확인하겠씁니다.
해방될 때 17개의 방송국이 있었지만 10Kw 청진방송국은 해방 이틀 전인 8월 13일 소련군과 일본군의 격전지가 되면서 폭파되었다. 2차 계획으로 설립된 방송국은 도시 규모가 작은 방송국들이 있어서 출력도 1차에 비해서는 낮아 대구방송국의 250W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50W나 30W로 건설되었다. 이 밖에 2차 대전 중 전파관재로 단일주파수로 방송을 하면서 출력이 낮아져 방송사각지대가 발생하자 개성, 서산, 장전에 방송소를 개설했고 진남포에도 방송소를 짓다가 해방되어 폐쇄되었다. 한편 개성방송소는 개소된지 얼마 안도어 1943년 오늘날 항일 단파방송연락운동이라고 불리는 단파방송 수신사건이 일어나면서 근무자들이 모두 채포되고 방송소는 폐쇄되었다.
1926년에 지어져, 197년 2월 16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경성방송국 연주소는 6.25때 폭파되어 잿더미가 된 후 지금은 덕수 초등학교와 조선일보의 부지로 변했고 일부는 민간인 땅으로 변했다. 조선방송협회 건물은 6.25후 임시방송 연주소로 개조해서 활용하다가 지금은 민간인의 빌딩이 들어서 있다. 2차 대전 중 경성방송국 언덕에 땅굴을 파고 비상방송국을 설치한 일이 있는데 지금은 덕수초등하교 부지가 되어 계단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부근에 사단법인 한국방송인 동우회가(약칭 방우회) 세운 첫 방송 터 기념비가 있어서 해마다 원ㄹ방송인들이 이곳에서 만나 그때의 추억을 기리며 방송의 발전을 기원한다.
2차대전 중의 비상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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