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일제강점기 단파방송 독립운동 6명의 옥사자(獄死者) 그 실상

이장춘 2011. 8. 29. 03:45

 

 

 

“미국의 소리방송과 광복군의 활동을 알리고

동포들을 격려하는 우리말 중경방송은 국내에서 외국인

선교사 경성방송국의 한국인 기술자들에 의해 청취되고 또 그

내용이 비밀연락을 통하여 전달되기도 했다.  그런데 1943년 봄에는

이러한 해외 단파방송 청취사실이 일제 경찰에 감지되어 성기석, 염준모,

송진근, 박용신 등 방송관계자와 송남헌, 홍익범, 허헌 등 150여명에

달하는 인사들이 검속되어 학형(學刑)을 당하게 되고 홍익범,

문석준 등 6명이 옥사자를 내고 20 여명이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 등의 죄명으로 2년이상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국가 보훈처에서 1972년에 발행한

독립운동사 제 4권, 4편, 3장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 책이 발행된 뒤 새로운 내용들이 많이 알려져서 지금은

 350여명이 끌려가 고초를 받았고 징역이상의 실형을 받은 확인된

 사람이 26명에 달하며 벌금형을 받았거나 형량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까지

 70여명이 형을 받은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이 가운데 성기석, 홍익범,

이근창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조종국, 박용신, 김동하,

세분이 건국포장 혹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단파방송 독립운동 6명의 옥사자(獄死者) 그 실상

 

 

과연 어찌 했 길래 6명이나 되는 옥사자가

 나왔는가?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끌려가면 사상범으로

 취급되어 가장 심한 취조를 받았다. 그 취조를 담당했던 고등계

경찰부라면 독립 운동가들이 치를 떨었던 곳이다. 사찰과 형사에

잡혀가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진 고문으로 초죽음을 당했고 차라리

 죽는것이 낳았다고 했다. 박용신 선생님이 2007년 생전에 말씀

하시기를 감옥은 호텔이라고 했다. 유치장의 취조가 그토록

가혹했음을 단적으로 비유하는 말씀이었다.

 

 

 

 

그 총책임자 미와(三輪)는 악질중의 악질로

소문나 있었고 그 밑에 있는 사이카 시치로((齊賀七郞)

 그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자였다. 이 운동의 핵심인사

 송남헌 선생님은 2,000년에 발행된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여러 고문 중에서도 비행기고문과 물고문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비행기고문이란 한밤중에

 불러내다가 양손을 뒤로 묶어서 포승줄로 천정에 메달아 공중에

 띄워 놓는 것으로 몸이 공중으로 들리는 순간 소스라치게 까무러져

 정신을 잃고 만다, 얼굴이 시퍼렇게 되어 초죽음이 되면

 끌어다가 던지다시피 유치장 안에 처넣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면 다시 끌어다

물고문을 했다. 기진맥진한 사람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수건을 물에 축여 얼굴을 덮고 양동이의

물을 코에 집어넣었다. 폭포수처럼 내려오는 물이 코로

들어오면 뒷골이 깨지는 것처럼 아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이 정도 되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수십 번씩 들어 저들이 원하는 데로 말을 하지

 않을 수 었다. 당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단파방송 연락운동을 하다가 잡혀 끌려간

 핵심인사들은 8개월 이상씩 이런 취조를 당해야 했다.

밑도 끝도 없이 퍼져나가는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 일망타진해야

 된다는 급박한 생각에다 차라리 이런 독립 운동가들이 세상에서 없어

 져버려야 된다는 속셈으로 완전히 할 수 있는 고문을 다 해대는 것이었다.

성기석, 이이덕, 홍익범, 허 헌, 송남헌, 조종국, 양제현, 박용신, 문석준, 

경기현, 이근창, 김중웅 형제 등 핵심인사들이 모두 겪은 고초였다.

그리고 8개월에 달하는 유치장 취조기간은  형기

(刑期)에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8개월 이상의 유치장 생활을 겪는 동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사실상의 죽음에 이른다.

죽는 상황에 이르면 변호사도 방청객도 없는 비밀재판을 거쳐

 감옥에 보내고 정말 살아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가(假)출옥을 시킨다.

감옥 안에서 옥사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는 술책이다. 그러나 하루 만에

죽는 경우도 있고 길게는 몇 개월을 버티다가 죽는 경우도 있었다. 호적의

재적 등본 상에 사망지가 서대문 형무소로 기록된 분도 있다.

 

 

 

 

 이렇게 해서 옥사자로 분류된 인사는 6명이다.

 전 동아일보 정치부기자 홍익범, 경성방송국 기술부

엔지니어 이이덕, 전 조선일보 영업국장  문석준, 의사 경기현,

 경성방송국 보수과 기술자이근창과 김중웅 형제 중 동생(이름 미상) 이

6명은 그렇게 해서 세상을 떴다.  이이덕, 홍익범, 문석준, 이근창에

 관한 얘기는개별적으로 살펴본적이 있으므로 의사 경기현과

 김중웅 형제얘기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의사 경기현

 

 

 

 

경성부 종로 2정목에서 민중의원을

개설하고 있던 의사 경기현은 홍익범과 막연한

사이로 둘이 자주 만나 시국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환자가 자유로이 출입 할 수 있는 병원에 홍익범은 환자로

 가장해서 자주 들렸고 또 기회되는 데로 만났다. 1년 6개월의

형을 받아 상소를 하지 않았다. 항일단파방송 핵심인사 송남헌

선생님이 옥사자로 분류한 경기현은 1943년 채포당시

 36세여서 젊음을 뒤로하고 세상을 뜬것이다.

 

 

김중웅 형제와 옥사한 동생 (성명미상)

 

경성방송국 보수과에 걑이 근무하던

김중웅 형제는 같이 채포되어 형 김중웅은 6개월의

징역을 살고 출옥했지만 동생은 1년의 징역형을 받고

옥중에서 세상을 떴다.  형으로부터 또 그 어머니나 성기석,

그리고 보수과에서 같이 근무했고 8개월의 금고형을 받은 이창득 등

 김중웅의 동생이 옥사했다는 사실을 얘기 해 주셨던 분은 많지만 정작

그 이름은 기억 하시는 분이 없다. 뒷날 건국훈장을 받았고 방송국에

근무할 때 보수과에서 같이 근무했던 조종국님은

생전에 다음과 같이 말해 왔다.

 

<나와 김씨는 신당동 인근에 살면서 방송국

출퇴근 길에서도 더러 만날기회가 있었는데 단파방송

밀청에 관한 밀담을 주고 받은 사이였다. 김씨도 나와 같은 징역

1년을 살았다고 하며 김씨는 미결수로 유치장에 같혀있는동안

 경찰관으로부터 취재를 받는 과정에서 남달리 심한 고문을

당해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옥사하게

되어 몹시 애처럽고 비참하다">

 

 

 

옥사자 중 전 동아일보 기자 홍익범은

1990년 광복절을 맞아성기석, 조종국과 함께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지만 다른 5분은 아직 포상 등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다만 원로방송인의

 모임인 사단법인 한국방송인 동우회 (방우회)에서 여의도

KBS안에 물망비(勿忘碑)를 세우고 넋을 기리고는 있지만

나라에서도 또 세상 사람들도 이것을 잘 모른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도의 선두에 섰고

건국정부의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이인 선생님이 쓴

고문에 관한 글 햔편을 인용합니다.

 

 

고문.....그래도 나는 약과였다고

당시를 말하는 송남헌씨

 

「경성방송국 단파사건」에 연좌했든

한 사람으로 반백의 머리가 된 송남헌씨는

딩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한밤중이면 꼭 불려나가 그 지긋 지긋한

물ㄹ고문이며 비행기 타기 등의 악형을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다.  그러나

나 보다도 더 혹독한 고문으로 산송장이 되어 업혀서 감방으로

오곤하던 건배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나는 약과였다고나 할까....

그 중에서도 끝내 자기 이외의 일에는 입을 열지 않은채 순사를 하고만

홍익범씨를 생각하면 살아남아 이렇다 할 일도 못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

기만 하다. 또한 경성, 청주, 대전 형무소 등을 전전하면서추위와 주림에

신음하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모습이며, 형기를 마쳤음에도 출옥을

 못하고 소위 사상범 보호 구금령에 묶여 그대로 감옥살이를

하고있던 선배, 동지들을 생각 할 때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지금 생각하면 방송국에 근무했던

우리 기술인들은 실로 애국자였다고 여겨진다.

평소에 이렇다 할 민족적 교양을 받을 기회도 없었고 또한

뜻있는 사람과의 접촉도 아니 했는데 있을지도 모를 무서운 일을

예기하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매일같이 「라디오」를 청취해서는

전해주곤 했다는것이 그리 쉬운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꼭 정기적으로 있는 방송을

제때에 듣기 위해서 일인들을 속이는 修理명목의 연극도

꾸몄으며 숙직도 아닌데 열성을 부리는 척 밤에 남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때의 뜻 있는 분들이 지금은 거의 유명을 달리하는 고인이 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도 외국에, 혹은 북에, 혹은 행방조차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그때의 동지였던 민족진영 인사들을 등지고 공산주의 자들과

합작 해 버린 허 모의 경우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없다.

 

하루빨리 모두가 태극기 아래 옛날의 동지애로

되 돌아가서 보다 나은 조국을 건설하는데 함심 했으면 하는

염원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한마디로 경성방송국

단파사건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지방방송국에도 단파수신기가 있었고

혹은 비밀히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던 터라 이 밖에도

단파사건으로 해서 희생된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닌줄 안다.

마지막으로 고인이 된 선배, 동지의 명복을

충심으로 빌어마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이 나라 독립을 위해 힘을

기울인 모든 분들에게 응분의 처우가 있어야

 할 것임을 기원하면서 가신님의 명복을 빈다.

 나머지 얘기는 다른 곳에서 쓸 것이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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