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해방공간의 진주탑으로 명성 떨치던 만능 연예인 이백수님

이장춘 2011. 9. 26. 01:10

 

 

 

해방공간의 방송을 들으셨던 분은 지금 들리는

시그널음악과 함께 김내성(金來成) 선생님이 쓴 연속낭독

진주 탑을 기억하시고 그 프로그램을 낭독했던 이백수(李白水)님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이백수라는 이름 외에 韓山民, 梁山伯등이 모두 

이백수님의 또 다른 예명니다. 수원농업학교(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전신)를 나와 일찍이 연극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이백수님은 이 땅에서

시험전파가 발사되던 1925년 첫 방송극 새벽종에 출연하면서 부터

 조선극회 회원으로, 또 라디오 극 연구회나 토월회 회원으로

오랜 기간 방송과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해방공간의 진주탑으로 명성 떨치던 만능 연예인 이백수님

 

 

 

 

해방되면서 님의 활동은 더 활발해져

1950년 6.25가 일어나기 까지 방송극에 출연하고 연출을

맡았으며 다정 다감 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다양한 목소리로 때로는

어린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는 여러 목소리를 내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1948년 해방공간에서 연출과장이 된 이덕근님은 그 분야의

 최고 반열에 있던 이백수님을 삼고초려해서 연출계장으로 함께 일하게

된 것을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꼽을 만큼 그 위상이 확고했습니다.

 

 

 

 

1901년 서울 서대문에서 테어난 이승직(李昇稙)이

 연극계에서 활동하면서 이백수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때로는

李泉이라고도 불렀습니다.  泉 자를 둘로 나누면 白자와 水자로 되어

이백수(李 白水) 가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출현하기 전

 연극계에서 부터 출발한 이백수님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를 길러낸 그의

오빠 최승일님이 1925년 경성방송국직원이 되어 작품도 쓰고 연출을 하면서

조선 극회를 구성할 때 그 회원이 되어 시험방송의 방송극에 참여했고

최승일의 친구이자 문학가로 아나운서를 했던 김영팔님, 신학박사로

이름을 떨치던 이경손님등과 더불어 구성된 라디오 극 연구회에

참여하면서 방송출연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 시절에는 연극이나 영화, 방송극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연극무대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 실황을

 중계하면 그것이 방송극이고 또 연극을 하던 분들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출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벽이 거의 없었던 것이지요. 조선말기 박정양

대감의 아들 박승희님이 구성한 단체가 토월회이고 방송인과 연극인들이

구성한 단체가 조선 극우회, 라디오 극 연구회 등으로 불리면서 서로의

연계 하에 운영 되던 시절이어서 이백수님 역시 연극과 영화,

 방송계에서 그 재능을 발휘 해 오신 분입니다.

 

1930년 중반 이후로도 이백수님은

 방송국 직원이었던 이서구님을 비롯해서 김건,

박진, 유치진, 조일제, 함세덕, 이익, 김영춘. 김성진님과

더불어 방송극을 위해서 활약했습니다. 해방될 무렵 4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그의 역량은 최대한으로 발휘되었습니다. 최무룡, 장민호,

윤일봉, 민구, 조남사 등 해방 1세대가 아직 자리 잡기 전 이백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습니다. 방송국 직책이 연출계장이라 계장이라

불렸을 뿐 연예계에서는 최고의 반열에 올라 있던 분이었고

 서월영님 등과 함께 한국 신극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던 이백수님이 6.25때 납북되어

 소식을 모른체 세월이 흘렀습니다. 6.25때 어린 아이들이

 놀던 부근에 폭탄이 떨어져 피가 낭자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병원을 찾다가 붙들러 갔고 그때 피투성이가 된 어린 아들은 세상을

떴으며 여섯 살 된 어린 이만규님은 올해 65세가 되어 저에게

 아버님의 예기와 사진 등의 자료를 보내주셔서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젊은 시절 남편을 잃은 고재순 여사는

90이 되도록 일생동안  만규, 영규 두 남매를

기르며 어려운 삶을 이오 오셨고 지금도 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연출계장시절 님을 도와 일했던 연출가 윤준섭

님과 곱슬머리 유이송 (柳里頌)님은 6.25때 납북당했고

이상만님은 효과, 연출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1948년 3월 정동방송국 옥상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만규님이 보내주신 사진으로 제가 본 정동방송국 옥상에서

촬영한 사진 두 편중 한편이고 주번 건물도 함께 촬영되어서 소중한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KBS가 최초로 기성작가들을 포함한

희곡작품을 모집해서 심사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입니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백수님이고 유호, 김희창,

 노정팔님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앞줄은 왼쪽부터 연출과장 송영호님,

 심사위원 김진섭님과 윤백남님, 방송과장 이계원님과 백빈님입니다. 이때

선발된 희곡은 1등 김희창 작 꿈의 공덕, 2등 최요안 작 세뱃돈, 3등 조남사 작

큰 아버지의 스승, 3등 박창오(반야월) 허생원, 3등 원신연 아 ! 이청춘이 입선

되었고 이 희곡이 방송 되면서 드라마가 활기를 띄었습니다.

 

 

 

 

 

이백수님의 손녀 이진희님이

 보내오신 메일 원문을 올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6.25당시

 납북되신 이백수 (당시 연출과장)님의 손녀

 이진희라고 합니다. 저의 아버지(이만규)께서 이장춘

이사님의 블로그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글을 보고 무척 반가워

하셨습니다. 저 역시 직접 뵙지 못한 할아버지에 대한 아련함,,,을

느꼈습니다. 여기 아버지께서 이사님께 전하는 글과 할아버지 사진,

할머니와 아버지의 사진 몇 장을 올립니다. 하시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문의드릴 사항 등이

 생기면 종종 연락드리겠습니다.

 

일교차 심한 요즘, 건강 유의하시고 내내

평안하십시오. P.S 아울러 하루아침에 한 가정의

가장이신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난 뒤, 갖은 고생을

다 하신 할머니와 아버지께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2011.9.23 - 이백수님의 손녀,

 

이진희 올림 -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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