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땡’ 하고 도쿄에서 오는 오후 5시 시보가
들어오기 시작해요. ‘꺼버려!’ 하고 제가 외쳤습
니다. 누군가 달려들어 스위치를 끊고, 윤용로 아나운서가 스튜디오에 들어가 ‘한국말 방송은 이제부터 제1방송으로
방송 합니다’ 하고 마이크에 대고 알렸습니다.”
방송기자 1호 문제안 선생님 말씀입니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이 일본총독으로부터
항복 조인을 받던 그날! 오후 5시! 1927년 2월 16일
한. 일어 혼용방송에서 곁방살이 설음을 받던 우리말 방송이 1933년 4월 26일을 기해서 새로운 집을 지어 곁방살이를 벗어났고 8월 15일 그 채널을 통해서 일본천왕의 항복방송을 했습니다. 1945년 9월 9일 5시 뉴스부터 방송국의 주 채널 제1방송에서 방송되어 우리나라가 그 주인이 되어 KBS라는 콜사인을 사용했습니다. 1973년 KBS공사창립 이전의 KBS를 말할 때 전 KBS 또는 KBS 전신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호출부호 HL은 1947년 9월 3일 우리나라 방송이 국제적 인정을 받아 1947년 10월 1일부터 사용했지만 "KBS" 라는 호출부호는 1945년 9월 9일 제1방송이 우리 손으로 돌아 올 때부터 사용되었습니다. 그때 그 얘기입니다.
KBS 호출부호 (콜사인)가 처음 방송되던 날 1945년 9월 9일 해방이 바로 나라를 찾는것은 아니었습니다.
해방을 맞고도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세월속에 방송의 주 체널은 여전히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무장을 한 일본군이 우리 방송인들을 오히려 포로 취급 하면서 압박했습니다. 그들이 전쟁에서 젔어도 연합군에게 젔지 한국인에게 진것은 아니었다면서 한국인에게 대해서는 위세 당당하게 굴던 일본 군부였습니다. 미군이 진주하면서 9월 8일 저녁 10시쯤 미군 선발대 “헤이워드” 중령이 방송국에 들려 주둔하던 일본군을 철수 시키고 9월 9일 4시 아배 총독의 항복서명이 있었어도 일본인들은 여러 이유를 대면서 방송채널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어서 또 한차례의 실랑이 끝에 이날 5시를 기해서 제1방송에서 우리말이 방송되었습니다.
그때의 아나운서 이덕근님의 기록 -중앙일보 1971 6월 남기고 싶은 얘기들 방송 50년-
이날이 방송국으로서는 가장 뜻깊은 날이 되었다. 하오 4시에 한국인 직원들이 일본인 직원들에게 제1방송과 제2방송의 지휘를 바꾸자고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인 직원들은 그런 명령은 미군만이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려 약간의 말성이 있었다.
높은 언성이 오갔는데 여기에 화가 난 내가 "기미라 이쓰마에 간바루 쓰모리까" (“자네들 언제까지
버틸 것이냐?") 고 한마디 하자 그때서야 고개를 푹 숙였다.이때가 5사로 뉴스시간이었다. 제1방송은 동경에서 오는 시보와 뉴스를 받고 있었는데 일본인 직원들이 아무말 못하는 사이에 한국인 직원이 제1방송실로 뛰어 올라가 시보가 울리는것과 동시에 뉴스를 끊고 우리말 방송을 해냈다.
사진제공 : 윤길구 아나운서 손주 윤병주님
때를 놓치지 않고 이혜구씨가 제1방송과 제2방송을 바꾸는 절차를 서식으로 확인하자고 요구하여 즉석에서 미농지에 대고 문안을 만들고 일본인 직원이 서무과에서 도장函을 갖고 와서 찍었다. 이혜구 과장이 먼저 부른 사람이 문제안 씨였다. 이서류를 체신국에 제출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1927년 2월 16일 일본말로 시작되었던 경성방송국이 우리방송으로 되어 방송된 것이다.
9월 9일에 지금까지 쓰던 "JODK" 콜싸인은 물론 "서울 라디오 스테이션"의 명칭도 없애고 새로 "KBS" 콜사인을 채택했다.
방송국이 한국인의 손에 넘어오자 방송국장 겸 기술부장이던 일본인 시노하라는 전국 각 지방방송국을 향해 "여러분 이제 한국은 독립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설을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한국사람에게 넘겨 주어야 합니다."고 과학자다운 말을 했다.
방송국을 인수받은 이혜구씨는 "우리는 일제를 위해 방송을 했다. 단죄를 받아야 한다." 면서 "정말 주인이 나타날때까지 이 시설을 잘 보호해야 한다." 직원들을 격려하여 좌익에서 여러번 기도한 방송국 접수 책동을 막아냈다. 8.15직후 귀국한다고 부산으로 갔던 일부 일본인이 다시 서울로 와 아직 많은 일본 사람이 있으니 방송으로 편의를 봐 달라고 하여 한국어 방송 뒤에 일본말 방송을 끼워주기도 했다.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이 문을 연지 18년 만에 방송국 주 채널을 통해서 우리말 방송을 하는
모름지기 우리방송이 되었고 KBS 콜사인 그때부터 사용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제 1방송이나 제2방송 모두 우리 방송이 된 것이지만 50Kw대출력은
2차대전중 전파관제로 사용하지 않다가 해방되어 방송을 송출하려고 하자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로 되어 4개월 여에 걸친 보수공사로 그해 12월 25일부터 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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