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방송

남. 북 분단 비극의 싹 8.26 북한의 남한방송 일방적 중단

이장춘 2011. 7. 31.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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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북 분단 비극의 싹 8.26 북한의 남한방송 일방적 중단
 
 
국민들은 그때까지 3.8선이 무었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던 1945년 8월 26일 남북방송국간에 연결된 방송회선이

끊겼습니다. 남북방송국간에 중계방송도 하고 방송이 나가지 않은 시간에는

소식도 주고받던 그 방송회선이었습니다. 8월 22일 평양에 들어온 소련군이 의도적으로

 한 행위였지만 우리는 방송회선 사고인줄 알고 그 회선을복구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려

했지만 복구 될 수 없는 회선이었습니다. 아무 예고도 없이 일어난 이 일은 3.8선을

기점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키로 한 이래 3.8선을 실감케하는 최초의

 일이었고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6.25 때 북한을 수복해서 방송한

 잠시기간을 제외하고는 남북간의 방송회선은 단절되었습니다.  

 

 

 

 

카이로 회담이나 포츠담회담 결과가
 남북분단의 씨앗이라면 북한방송 전용회선 절단은

남북 분단의 싹이 터 오르는 것이었다고 볼 수있습니다.   

8월 25일까지는 중앙방송국과 북한을 포함한 전국

지방방송국이  전화회전으로 링크를 구성해서

 전국방송을  했습니다.
 
소련군 원산 상륙은 8월  20일이고
평양에 도착 한 것은 8월 22일이었습니다. 
북한방송의 송. 수신이 끊어진 것은 8월 26일부터
였습니다. 남과 북에 전쟁목적 달성을 위해 편의상  미군과

소련 군대가 나누어들어온다고 해도 국민들은 남과 북이 갈라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고 방송이 끊어질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을 때여서 8월 26일부터 남. 북간에 연결된 유선 선로가 

 끊어지고  북한에서 서울방송이 중계되지  않았을 때

단순한 선로 고장으로만 알았습니다.

 
회선 중단 상태가 지속 되면서 북한방송을
 모니터도 하고 검토도 해 보았으나 몇일이 지나도
북한방송에서는 여전히 서울방송이 중계되지 않았고
소련군의 진주소식과 환영방송을 되풀이 하는 등 몇 일간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서 북한에서 서울방송을 일부러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는 남한에
 아직 미군이 들어오기도 전 이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시일이 지나다가 9월 말부터
북한에 임시정부가 선다는 방송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북한의 추이를 평양방송을 통해서 알게 되는 그야말로 민족비극  

남. 북 분단의 싹이 트고 있음을 알았고 그로부터 소련은 계획된 시나리오를

실천 해 가고  있었으며 방송은 이미 정통성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스타린과

그  앞잡이  김일성을 우상화 시키는 도구로 전락되어 가면서 방송인들은

 기회를 보다가 남한으로 온 분들이 많았습니다.  인기아나운서 홍양보를

비롯해서 장세균, 김광국 등 방송을 하던 아나운서들과 김원용등

많은 기술자들이 사선을 넘어 월남했습니다. 

 
회선이 단절되기전 까지 북한에는 평양을

비롯해서 청진, 함흥. 원산, 신의주, 해주, 성진등

7개의 방송국이 있었습니다.  해방 후 폐쇄 되었습니다.

해방될 때 북한을 포함한전국의 방송국은

 다음과 같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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