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방송

대한민국의 첫 방송기자(문제안)가 탄생한던 날 1945년 8월 16일

이장춘 2011. 7. 28. 05:27

 
 
 대한민국의 첫 방송기자가 턴생한던 날 1945년 8월 16일 
 
이혜구, 문제안 선생님 회고담  
 
 
세상이 바뀌어 사람들은 새로운소식을

목마르게 기다릴 때였지만 그 소식을 제대로 전달할

미디어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일제가 전쟁을 치르면서 그런

소식을 제대로 전할 만한 신문은 모두 폐간 해 버렸고 벙송국에는

당장 새로운 소식을 접할 수가 없었고 방송기자도 없을때 였습니다.

해방을 맞던 그 다음날 8월 16일 비로소 한사람의 방송기자가 임명되었

습니다. 그때 그 기자를 임명한 우리말 전담방송 제2보도과장

이혜구선생님과 그날부터 방송기자가 된 문제안선생님의 

 회고담을 올립니다. 자금 들으시는 육성은

문제안선생님의 얘기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이혜구 선생님의 그때 그 얘기  

 

 
우리말 뉴스방송은 통신과 당국의 발표문에
의존하였고 또 그때만 해도 방송기자란 제도가 없었다.
서대문 형무소의 문이 활짝 열리고, 갇혔던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 왔지만 당장 취재가 어려웠다.
이래선 4시 뉴스가 큰일이라고, 계동 소위 건국준비위원회로
방송원을 파견하였으나 나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재차 사람을 보냈다. 빈손으로 돌아온

방송원이 지금 건준은 찾아오는 손님으로 어수선

 하기만하고 아무런 발표가 없다는 보고에 나는 맥이 풀렸다.

때마침 조선일보사 앞을 해방을 맞은 군중들이 행진하면서 만세 

부르는 소리가 창으로 들려와 나는 3 . 1 운동 시의 만세소리를
회상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이혜구선생님은

소식원을 얻기위해 처음으로 방송기자를

임명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문제안 선생님이었습

니다, 아래 문제안선생님 글을 올립니다.  

 
 

 
 

 

문제안 선생님의 그때 그 얘기

 

 
어제까지 일본 도메이쪼우싱(同盟通信)만을
의지해왔던 우리 보도과는 그 통신사가 통신을 끊어버리자
뉴스 방송을 할 수 없게 된 반면, 국내의 소용돌이는 뉴스거리로

넘쳐나, 어제까지의 그 조직으로는 수습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이에 당황한 이혜구 제2보도과장은 나를 불러, 구두로 "당신을

오늘부터 경성중앙방송국우리말 방송기자로 임명합니다.

 열심히 뛰어, 좋은뉴스 시간을 마련해주기

 바랍니다. " 하였다.

 
처음에는 나는 이 과장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조차도 얼른 짐작하지 못했다.
이계원, 민재호 두 계장과 이익녕, 이원구 선배,
이덕근, 윤길구, 홍 준, 장운표 동기 아나운서들,
그리고 전인국, 윤용로 후배 아나운서들… 감청
일을 보던 안서 김 억선 선생까지 모두들
박수까지 쳐주면서 "잘하라"고
격려해주는 것이었다.
 
그때가 1945년 8월 16일 아침 9시 10분쯤(?).
그러나 나는 과연 박수를 받아야 할 일인지, 정말 감격을
해야 할 것인지, 그것조차도 느끼지 못한 채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들끓는 서울의 거리로 우선 뛰어나갔다.이것이 기자생활

20년이라는 내 인생을결정하는 순간이라는 것도 까맣게 모르는 채,

역사적인 '한국의 초대 방송기자의 탄생'이라는 감격도 전혀

느껴보지도 못한 채, 나는 한국의 첫 방송기자의 첫 취재

활동을 위해서 힘차게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해방 후 소용돌이는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거세었다. 그 이튿날(17일)에는 일본군대가 방송국을

점령하고,9월 9일 아침에는 미군이 방송국을 접수하고,

 모스크바에서 3상회의(12월 27일)가 열리고….시간으로는

 4개월에 지나지 않았으나,  나는  첫 방송기자로서 여러

가지를 보았고, 겪었고, 또 썼다.그것들은 '본 방송국

 문제안 기자의 보도'라는 머리말로시작되어서,

 나는 단번에 유명해지고 말았다.

 
 

 

 

 11월 1일부터는 그동안 쉬고 있던

조동훈기자가 다시 출근하기 시작해서, 조기자는
좌익 정당, 나는 우익 정당을 맡았다. 외부에서는
도쿄 외국어대학 노어과 출신인 조기자를 급진사상을
가진 좌익으로 잘못알고, 일본 메이지대학 문예과에서
문화영화를 전공한 연파(軟派)인 나는 우익사상을
가진 보수주의자로 잘못 알게까지 되었다.

 

 

 

 

일본항복 문제안-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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