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말 방송 책임자. 제2보도과장 이혜구선생님 회고담-
끝부문에 일본 히로히도의 항복 동영상과
항복문서 전문을 올렸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던 날!
경성방송국 최후의 날이기도 했던 그날!
알았어도 모른체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 방송하는 채널은달랐지만 제1보도과와 제2보도과가 한방에 있어서서로 엇갈리는 마음으로
중대방송 그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때 우리 방송의 책임자였고 해방정국의
중앙방송국장이 된 당시의 제2보도과장 이혜구님의 글을 올려 드립니다.
이 글은 1970년 6월에 발행된 문채록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님은
1932년에 방송국에 들어 오셔서 우리우리 문화를 지키고
우리말을 지키는데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102세로
2010년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지금 들려오는 욱성은 히로히도 일본천왕의
1945년 8월 15일의 항복방송내용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동맹통신에 출입하는 문제안
고개를 갸우둥 거리고 말을
끊는 것이었으나 그 중에는 일본인 양면작전을회피하기 위하여 일. 로 휴전조약을 하는 것이라고 헛소리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오정각 ! 일본천황의 방송이라는 아나운서
멘트에 한. 일 직원일동은 기립 하였다.
암운이 걷히고 광명이 솟은 듯 의자에
앉았을 때 일본인직원들의 정신 나간 얼굴이 처다 보였다.
뉴스에도 반복 되었다.
해방 다음날 8월 16일 아침 내가 방송국 문앞에닿았을때 나는 거기에 어제까지도 보지 못한 한국청년의 목총을 든
씩씩한 모습을 보았다. 알고보니 어제로 우리것이 된
기관을 한국인 손으로 지킨다는 것이었다.
9월 9일 미군 인천상륙전일,
한다고 주장하였고 총무부장 권태웅씨는 녹음에 드는 비용은
염려말라고성원하였고 민 운전수는 자기가 녹음 자동차를 운전하겠다고 자원하였다.
그때는 벌써 5시가 넘었다. 내 기억이 옳다면 이렇게 녹음을
강행하려고 하였을때 미군에서 방송기자를 인천으로
파견하라는 편지가 와서 미군 인천 상륙
보도를 무사히 마쳤다.
채용한 이혜구선생님은 우리문화와 우리 말을 지키면서
해방을 맞으셨고 해방후 두번에 걸친 중앙방송국장을 하신 분이
었습니다. 향년 102세로 2010년에 세상을 뜨신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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