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방송

1945년 광복의 날을 맞은 경성방송국, 그 최후의 날

이장춘 2011. 7. 24. 07:05

 

 

- 우리말 방송 책임자.
제2보도과장 이혜구선생님 회고담-

 

1945년 광복의 날을 맞은 경성방송국, 그 최후의 날

 

끝부문에 일본 히로히도의 항복 동영상과

항복문서 전문을 올렸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던 날!

경성방송국 최후의 날이기도 했던 그날!

경성방송국의 방송인들은 한국인이나 일본인 모두

숨죽이며 정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은 그 방송내용이

무엇인 줄을 알았고 감격적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일본인들은

알았어도 모른체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 방송하는 채널은

달랐지만 제1보도과와 제2보도과가 한방에 있어서서로 엇갈리는 마음으로

중대방송 그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때 우리 방송의 책임자였고 해방정국의

중앙방송국장이 된 당시의 제2보도과장 이혜구님의 글을 올려 드립니다.

이 글은 1970년 6월에 발행된 문채록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1932년에 방송국에 들어 오셔서 우리우리 문화를 지키고

우리말을 지키는데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102세로

2010년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지금 들려오는 욱성은 히로히도 일본천왕의

1945년 8월 15일의 항복방송내용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동맹통신에 출입하는 문제안
아나운서에게서 내일(15일) 중대 방송은
종전에 관한 것일 것이라는 소문을 미리 들었지만
그래도 그 방송이 기다려졌다. 12시까지 두 시간이 지루했다.
중대방송이 무엇인가. 라는 일본인 직원들의대답은 대개 “ 사아 ” 하고

고개를 갸우둥 거리고 말을끊는 것이었으나 그 중에는 일본인 양면작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일. 로 휴전조약을 하는 것이라고 헛소리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오정각 ! 일본천황의 방송이라는 아나운서

멘트에 한. 일 직원일동은 기립 하였다.

 

수신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나직하고
또 중계상태도 좋지 못하여 방안사람은 더 귀를
기울였고 방안은 더 조용하였다. 과연 일본군 항복이었다.
일본 여자 아나운서는 훌쩍, 훌쩍 울었다. 한국인은 일시에

암운이 걷히고 광명이 솟은 듯 의자에앉았을 때 일본인

직원들의 정신 나간 얼굴이 처다 보였다.

 

그러나 일본인은 관동군 해산이 문제일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한국인은 뉴스준비로
활동을 재개 하였다. 아까 방송을 못 들은 듯이 통신을
탐독하였고 그 한 장 한 장이 다시 새로웠다. 이 뉴스는 밤 9시 반

뉴스에도 반복 되었다. 해방 다음날 8월 16일 아침 내가 방송국 문앞에

닿았을때 나는 거기에 어제까지도 보지 못한 한국청년의 목총을 든

씩씩한 모습을 보았다. 알고보니 어제로 우리것이 된

기관을 한국인 손으로 지킨다는 것이었다.

 

 

서대문 형무소의 문이 활짝 열리고
같혔던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런데 12시인지 12시반의 뉴스시간이
박두하였다. 청취자들은 뉴스를 고대하고 있을터인데
들어온 연합통신의 내용이라곤

 

해 방 만 세 !
자 유 만 세 !
독 립 만 세 !

 

석줄밖에 없었다.
일본어 방송은 일본방송 뉴스를
중계만 하면 그만이지만 우리말 뉴스방송은
통신과 당국의 발표문에 의존하였고 또 그때만 해도
방송기자란 제도가 없었다. 이래선 앞의 4시방송의 뉴스가
큰일이라고 큰일이라고 계동 소위 건국준비위원회로
방송원을 파견하였으나 나간체 돌아오지 않았다.
재차 사람을 보냈다. 빈손으로 돌아온

 

방송원의 "건준은 지금 심방(尋訪)하는 손으로
어수선 하기만 하고 아무 발표가 없다는 보고에 나는
맥이 풀렸다. 때마침 조선일보사 앞을 해방을 맞이한
군중들이 행진하면서 만세부르는 소리가 창으로
들려와 나는 3.1운동시의 만세소리를 회상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17일에는 미군진주까지 한국내의 치안은
일본군에 있다하여 성난 독사같은일본군이 방송국을
지켰다. 무장한 일본군인은 2시경 녹음하러 온 한재홍씨를
딱 막고 안 들였다.체신부 감리과가 아니라 정무총감과의
전화통화가 있은후에 두루마기를 입은 안재홍씨는

 

방송실로 올라가 녹음을 마쳤다.
"우리민족의 앞날에는 희망이 올 따름이니
냉정하고 침착하라" 는 요지의 녹음은 그날 온종일 반복되어
뉴스해갈과 치안유지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으로 가려고 16일
부산까지 내려갔던 일본인 여자 아나운서는 배편이
없기도 아였겠지만 치안이 회복되는것을
보고 되돌아 올라왔다.

 

 

9월 9일 미군 인천상륙전일,
제2방송과는 인천까지 가서 역사적 사건을
녹음방송하려고 서둘러 나는 부평통을통과하는
완장을 청구하러 용산 군 사령부로 갔다.

 

그때 성난 독사같은 일본인 장교는
자기는 신문기자에게 완장을 준다는 명령만 받았지
방송국 녹음반까지 주라는 명령은 없어서 자기는 일에
모른다고 딱 거절하였다. 아나운서들은 이말을 듣고 군 허가가
없더라도 가볼 때까지 가서 되돌아 오는 한이 있더라도 녹음반이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총무부장 권태웅씨는 녹음에 드는 비용은 염려말라고

성원하였고 민 운전수는 자기가 녹음 자동차를 운전하겠다고 자원하였다.

그때는 벌써 5시가 넘었다. 내 기억이 옳다면 이렇게 녹음을

강행하려고 하였을때 미군에서 방송기자를 인천으로

파견하라는 편지가 와서 미군 인천 상륙

보도를 무사히 마쳤다.

 

1932년 경성방송국이 재2방송을 준비하면서

채용한 이혜구선생님은 우리문화와 우리 말을 지키면서

해방을 맞으셨고 해방후 두번에 걸친 중앙방송국장을 하신 분이

었습니다. 향년 102세로 2010년에 세상을 뜨신분입니다.

 

 

 

 

 

동영상 보기

 

동영상을 보시려면 음향을 먼저 끄셔요.

 

 

 

 

 

 

히로히도 천왕의 항복문서 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히로히도 항복방송-1.w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