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임택근 아나운서와 최세훈 아나운서

이장춘 2011. 6. 12. 16:42

 

 

 

임택근 아나운서와 최세훈 아나운서

 

 

1960년대 전후, 라디오께임, 재치문답을

 즐겨 들으시던 분들은 최세훈 아나운서를 기억하십니다.

 최세훈 아나운서가 KBS에서 재능을 한참 발휘하면서 인기를

모아가던 1964년, KBS 아나운서 실장이던 임택근 아나운서가

 MBC 방송부장으로 옮길 그 무렵 최세훈 아나운서도 

MBC로 옮겨 최계환 아나운서에 이어 두 번째의

 아나운서실장이 되었습니다.

 

KBS난산연주소 정원에서 장기범, 임택근, 강찬선, 이광재아나운서와 함께한 사진입니다.

 

KBS에서 아나운서실장과 선임 아나운서로

 한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두 분 동시에 MBC의 방송얼굴이

 되었습니다. 임택근 아나운서가 상무, 전무로 MBC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동안 아나운서실장을 하던 최세훈 아나운서는 1977년

 전주 MBC상무, 1981년 대전 MBC상무, 1983년 마산 MBC이사를 지네

시다가 세상을 뜨셨습니다.  두 분은 KBS와 MBC에서 오랜 기간 함께

일하면서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지금 미국에 사시는 최세훈 아나운서

 딸 최철미님은 아버지가 세상을 뜨시던 때 먼 길까지 오셔서 조문해

주신 일에 대해서 잊지 않고 늘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임택근 아나운서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말씀드려서 오늘은 최세훈 아나운서의

 얘기를 하겠습니다.

 

 

관련 글을 보기 영문자 클릭

 


아나운서 임택근

http://blog.daum.net/jc21th/17783161


멜번 올림픽과 임택근 아나운서 방송추억 

http://blog.daum.net/jc21th/17780286



국제방송국이 남산으로 옮기던때 남산 국제방송국

현관에서 방송국 간부와 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입니다.   

1.송한규, 11.김주환, 12.이병열, 14.장기범, 15.김영호, 16.노정팔,

18.강찬선, 19.유병은, 20.전영우, 22.김인권, 25.최세훈

아나운서입니다.

 

  

최세훈 아나운서는 1955년

 아나운서 공개 채용 때 들어와 방송을 했습

니다. 어느 일자리보다도 아나운서의 인기가 높던

시절이라 많은 경쟁자가 있었지만 타고난

재능과 목소리 덕분에 경쟁의 벽을 넘어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감사원장을 지내신 법조계의 원로 한승헌님은

 지금도 그때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다가 최세훈 아나운서에게

 고배를 마셔 인생의 진로가 바뀌었다는 얘기를 기회 있을 때마다 합니다.

필기시험에서는 앞섰으나 목소리가 허스키여서 맑은 목소리를 지닌

 최세훈 아나운서에게 고배를 마셨다는 얘기입니다.

 

이토록 최세훈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재능은 타고났습니다. 이리방송국에서 잠시

 아나운서 생활을 했던 최세훈 아나운서는 중앙방송국으로

옮기면서 뉴스나 공개방송에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공개방송,

재치문답과 라디오 께임은 최세훈 아나운서에게 잘 어울리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지금 듣고 계시는 육성은 1962년

최고의 인기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던 재치문답을

 진행하는 최세훈 아나운서의 목소리입니다.

 

 

 

 

아래사진은 야외 공개방송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최세훈 아나운서와

 박종민 담당프로듀서의 모습입니다.

 

 

 

1945년이래 일생을 방송과 함께 하셨던

노정팔님은 자서전 한국방송과 50년에서 쓰기를

“라디오 께임” 하면 최세훈씨를 연상하게 된다. 프로그램과

아나운서는 서로 밀착하여 함께 웃고 함께 고민하여야 그

프로그램이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라디오 께임"

 최세훈과 동반자 관계에 있었다. 라고 썼습니다.

 

 

 

주변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면서

 분위기를 잘 이끌어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재치와 유머 등으로 거침없이 잘 진행 해

나갔습니다. 최세훈 아나운서는 MBC 재직중이던

1968년 그시대에 방송인으로는 최고 영예의 상

방송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최세훈 아나운서는 현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료를 모으고 글을 쓰는데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침착하고 중후한 인품에 남다른 문장력을

지녀 아나운서실에서 글을 써야 할 때는 스스로 맡아서

쓰기도 하고 본인이 진행하는 공개방송의 원고를

비롯해서  희망의 속삭임 등의  방송

원고를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한국 방송사가 처음 나온 것은

 1977년 방송 50주년을 맞이해서 이지만 그보다

훨씬 전 1967년에 앵무새의 증언이라는 자서전 초판이

 나왔을 때, 그때까지 수집한 다료를 바탕으로 글을 써서

 그 책에 수록, 후세에 전하기도 했습니다. 앵무새의

증언 증보판은 1982년에 발행되었습니다.

 

1954년, KBS아나운실에 들어와

오랜세월 최세훈 아나운서와 함께 근무했던

전영우 아나운서는 최세훈 아나운서가 방송도 잘 하고

성격도 원만 할 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소질이 있어서

시와 수필에 능하고 자유문학의 시인으로 등단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최세훈

 아나운서와 함께한 전영우

아나운서입니다.   

 

 

 

딸 최철미님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판에 실린 한국일보 글과

 1959년 초의 국제신보 장기범 아나운서와의 대담

내용을 보내 오셨기에 참고가 될까. 해서

 전문을 올렸습니다.  

 

 

   

 

 

앞줄 오른쪽부터 한경희, 최세훈, 임택근, 강찬선, 장기범, 이광재, 박종세,

배덕환, 최두헌, 홍종전, 김주환, 이규영, 길종휘, 유영옥, 이정희, 최승일, 김인권,

박노설, 최정현, 김인권, 송한규, 이병열, 송영규, 이규항, 인주희 아나운서입니다.

 

 

1961년 1월 16일자 TV방송을 처음 시작 하던 때 동아일보에 난 기사 한편을 참고가 되실까 해서 옮겼습니다.

 

실내 체육관이 없던시절 서울(동대문)운동장에서 주요경기를 했습니다.

그시대의 최고의 인기절정이던 임택근, 이광재, 강찬선, 최세훈 아나운서가

모두 참여한 중계방송이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재치문답 최세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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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