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방송

배준호님의 기록으로 본 6.25 부산 피난 중앙방송 3년

이장춘 2011. 6. 4. 02:15

 

 

 

정부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온 방송국은

1951년 서울이 수복되면서 서울에서도 방송을 할

준비는했지만 경국 휴전협정이 마무리 될 무렵에야 서울

에서 방송을 할 수 있었고 그동안은 비좁은 부산방송국에서

 전국 네트워크를 갖추면서방송을 실시 했습니다. 그때의

 얘기를 배준호님과 노정팔님의 기록을통해서 알아

 봅니다. 두분은 부산 피난방송시절 방송편성과

제작활동을 하신분으로 그때의 얘기를

잘 알 수 있는 분들입니다.

 

 

배준호님의 기록으로 본 6.25 부산 피난 중앙방송 3년

 

 

부산 피난시절에는 어려운 방송사정을

알았음인지 도움을 주는 곳이 여러곳 있어서 자체 제작하는

 기본 프로그램 외에 많은 색다른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다. 먼저

미국공보원에서 제공하는 방송극이다. 매주 1회씩 삶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방송극을 제작했다.다음으로는 반공통일연맹 협조로 국민의 소리라는

 국민이나갈 길을 제시하는 내용의 방송을 주2회 일요일과 수요일

아침에 낼 수 있었고 대북방송으로 방송극과 강연을

주 1 회씩 방송할 수 있었다.

 

 

1952년 1월 부산에서 우문현답 프로그램 녹음을 마치고 담소하고

있는모습, 노천명, 조풍연님이 출연하고 강익수아나운서가 사회를 보았습니다.

서 있는 분은 윤길구님과 문시형님입니다.

 

 

다음은 UN군 사령부 방송반의 도움이다.

레코드를 비롯해서 방송기재의 도움도 받았지만

미군 텔레타이프로 들어오는 뉴스도 신속하게 방송할 수

있었고 그들이 만들어주는 뉴스 해설을 하루에 두 번씩

 방송하기도 했다.또한 어린이를 위해서 할머니

 얘기라는 동화프로그램을영여로 쓴 것을

번역해서 방송하도록 했었다.

 

 

전란시의 노천교육 KBS는 1951년

 6월부터 학교방송을 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때쯤 학교방송이 시작되기도 했었다.

당시 자체 제작한 것을 녹음 구성한 프로인 결전의 모습은

전선에 있는 군인들의 사기를 앙양시키기 위해 노래와 위문편지,

시낭송 등으로 엮은 라디오 꽃다발, 많은 국악인이 용두산 밑 국악원에

사는 것을 이용하여 1951년에 시작한 라디오창극, 피난생활을 같이 하면서

 매일 써준 노천명씨의 가정메모그 밖에 어린이 상식, 봉선화 동요 또한

최요한 씨가집필한 입체낭독, 자유의 등불 등이 생각난다.    

입체낭독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

것도 이때가 처음 이었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1940년대 중반 최고의 자랑하던방송편성의 귀재 배준호

http://blog.daum.net/jc21th/17780786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전우가.mp3

 

 

전우가.mp3
1.7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