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아침 9시를 전후해서 10여명의
직원 전원이 출근했다.정확한 사태를 파악하기 어려워 문국장 (문돈식 춘천방송국장 )은
서울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사태를 파악하려했으나 이렇다 할
정보는 물론 아무런 대응책을 지시받지 못했다.
들려 홍보자료를 전하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직원들과 함께상황을 살피다가혹시 직원들을 만나면 전황를 알 수 있을 것 같아
귀가하고 나를 비롯한
몇 사람은 방송국을 지키고 있었다.업무와 관련된서류를 창고에 넣고 일단 집으로
갔으나 가족들은 피난을 떠나고 없었다.
근무하던 김경철씨를 비롯한 몇 명의
직원들이반가이 맞아 주었다. 오후 2시쯤 되었을 때 전 두열
대위가찾아왔다. 시민들에게 홍보 방송을 하라는 것이
었다. 내용은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38선에서 아군과
교전중이며 머지않아 적군은 퇴각 할 것이니 시민들은
안심하고생업에 종사 할 것이며 휴가로 외출중인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춘천방면으로 공격 해 온북한군은제2사단 병력으로 포 406문과 자동포 32문을
제7연대(임부택중령) 는 병력과
군 장비에서 압도적으로앞서는 북한군을격파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6사단은 27일에 이르기까지 춘천지역을
사수 했을 뿐만아니라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전황보도를 했다.
급박한 전세 속에서 춘천방송국 직원들은자동차등의 교통수단이 없어
방송장비는 그대로 두고 떠났다. 서울에서의 지시가 전혀 없어개별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피난 중 충주부근에서 뜻밖에 전두여열 대위를 만나
군 트럭으로 충주까지 갈 수 있었다.
찾았다.
중앙방송국에는 남자아나운서들의 대부분이 피난을오지 못하여 방송요원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나는 즉각
방송임무를 부여 받았고 춘천방송국에서 함께
근무했던 김유선 아나운서가 먼저
와 있어 크게 위로가 되었다.
날이 갈수록 불리하게 되어
국군은 후퇴를 거듭했고중앙방송국도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겨갔다.
탈환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9월 22일 중앙방송국장이기사들과 함께 선발대로
가라고 지시했다.
이종훈 선발대장
춘천 동향인이고
친분이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선발대는부산항에서 군의 수송선인 LST에 기자재를 싫고 출발 했는데
공보처장 김활란 박사와 방송국장을 비롯한 몇 사람이
상륙작전의 뒤를 쫒아 서울에 입성, 9.28서울수복의
선발대로 서울 땅을 밟은 영광을 얻었다. 선발대 요원은
인원도 적을 뿐 아니라 아나운서도 나 하나뿐이어서
방송기능은 한계가 있었다. 간단한 보도와
음악이 방송활동의 전부였다.
돌아왔다.
방송국은 거의 반파되고 기자재는 훼손 되었다.9.28수복이후 얼마 안 되어 중앙방속국 요원이 서울로
돌아왔다. KBS는 전시 중 중앙방송국이나 지역
방송국이나 묻지 않고 방송국에 출두한
직원은 전원 방송요원으로 활용했다.
춘천방송국은 반 폐허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복귀한 사람이 없어 사실상 아나운서 생활에
휴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은 춘천방송 60년사를 참조
했습니다.
전 성병 아나운서는 6.25가일어났을 때 3.8선과 근접한 춘천방송국에
근무 하다가 대구 피난시절, 방송에 합류해서
방송하던 중 부산피난시절 서울복구 선발대로
방송에 참여 했습니다. 전쟁후 강원도
교육계로 가셨습니다.
방송이 중단 되어 1953년에야 방송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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