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방송

6.25발발시 춘천방송국 아나운서 전성병의 방송 회상기

이장춘 2011. 6. 2. 05:01

 

 
6.25발발시 춘천방송국 아나운서 전성병의 방송 회상기
 
 
춘천방송국은  1950년 6월 25일 아침
평소에도 있었던 북한공산군의 산발적인 침공으로

알고 아침 9시를 전후해서 10여명의직원 전원이 출근했다. 

 정확한 사태를 파악하기  어려워 문국장 (문돈식 춘천방송국장 )은

서울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사태를 파악하려했으나 이렇다 할

정보는 물론 아무런 대응책을 지시받지 못했다.

 

 

 

 

그 무렵 춘천방송국에는 6사단
정훈장교였던 전두열 대위가 수시로 방송국에

들려 홍보자료를 전하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직원들과 함께

상황을 살피다가혹시 직원들을 만나면 전황를 알 수 있을 것 같아

 부대를  찾아 갔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오후가 되자 일부는

 귀가하고  나를 비롯한몇 사람은 방송국을 지키고 있었다.

업무와 관련된서류를 창고에 넣고 일단 집으로

갔으나 가족들은 피난을 떠나고 없었다.

 
다시 방송국으로 와 보니 아직도
몇 사람이 방송국을 지키고 있었다. 기사로

근무하던 김경철씨를 비롯한 몇 명의 직원들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오후 2시쯤 되었을 때 전 두열

대위가찾아왔다. 시민들에게 홍보 방송을 하라는 것이

었다. 내용은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38선에서 아군과

교전중이며 머지않아 적군은 퇴각 할 것이니 시민들은

안심하고생업에 종사 할 것이며 휴가로 외출중인

국군 장병은 속히 귀대하라는 요지였다.
 
문돈식 국장에게 즉각 보고 한 다음
국군의 건투를 반복 방송하는 한편 국군장병의
 귀대를 계속 호소했다. 춘천방송국의 승전보도는 후일

 사실로입증되고 있다. 춘천방면으로 공격 해 온북한군은

제2사단 병력으로 포 406문과 자동포 32문을

동원하여 일제히 쳐들어 왔다.
 
당시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후퇴작전을 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춘천지역에 주둔 중이던 제6사단

제7연대(임부택중령) 는 병력과군 장비에서 압도적으로

 앞서는 북한군을격파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6사단은 27일에 이르기까지 춘천지역을

 사수 했을 뿐만아니라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중앙방송은 객관성을 잃고 있었으나
춘천방송국의 보도는 사실에 입각한 정확한
보도를 하였다. 25일 저녁 무렵까지 방송국을 지키면서

전황보도를 했다.급박한 전세 속에서 춘천방송국 직원들은

 25일 정오 무렵부터 뿔뿔이 흩어져 개인적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자동차등의 교통수단이 없어방송장비는 그대로 두고 떠났다. 서울

에서의 지시가 전혀 없어개별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피난 중 충주부근에서 뜻밖에 전두여열 대위를 만나

군 트럭으로 충주까지 갈 수 있었다.

 

 

그 때 중앙방송국은 대구에서 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대구에 내려온 즉시 방송국을

찾았다. 중앙방송국에는 남자아나운서들의 대부분이 피난을

오지 못하여 방송요원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나는 즉각

 방송임무를 부여 받았고 춘천방송국에서 함께

근무했던 김유선 아나운서가 먼저

와 있어 크게 위로가 되었다.  

 

 
 
춘천여고를 나온 김유선 아나운서는
 여자 아나운서가 거의 없던 중앙방송국에서
화려하게 각광을 받고 있었다. -  중략- -- 전세는

날이 갈수록 불리하게 되어 국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중앙방송국도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겨갔다.

 
9월 중순에 이르면서 전세는 호전되어
 북한군은 밀려나고 국군은 북으로 진격하여 서울

탈환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9월 22일 중앙방송국장이 

나를 불러 서울이 탈환되면 서울에서도 방송을 내 보내야
시민들과 국군의 사기를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기사들과 함께 선발대로 가라고 지시했다.  

 

이종훈 선발대장

 

아직도 살벌하고 어수선한 서울의
싸움터에 간다는 것이 두렵기는 하였지만
선발대장이 이종훈씨여서 힘이 되었다. 이종훈과장은

춘천 동향인이고 친분이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선발대는

부산항에서 군의 수송선인 LST에 기자재를 싫고 출발 했는데

공보처장 김활란 박사와 방송국장을 비롯한 몇 사람이

부두까지 나와 환송 해 주었다.

  

 
 
 
9월 25일 인천앞바다 멀리에
정박하였는데 방송요원이탄 선박 가까이에 있는
 군함들이 북한군에게 수시로 함포사격을 하고 있었다.
특히 한밤중의 포격은 번적이는 섬광이 바다를 작열하게
비추어 함포사격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함포사격과 인천 상륙작전을

직접 목격한 방송요원은 9월 28일 인천

상륙작전의 뒤를 쫒아 서울에 입성, 9.28서울수복의

선발대로 서울 땅을  밟은 영광을 얻었다.  선발대 요원은

인원도 적을 뿐 아니라 아나운서도 나 하나뿐이어서

방송기능은 한계가 있었다.  간단한 보도와

음악이 방송활동의 전부였다.

 
 중앙방송국이 서울에 복귀 했다는
 상징성을 담고 있어 선발대의 방송활동은
 서울시민에게 큰 위안을 준 것으로 일컬어 졌다.
나는 춘천방송국이 궁금하여 시간을 내어 춘천으로

돌아왔다. 방송국은 거의 반파되고 기자재는 훼손 되었다. 

9.28수복이후 얼마 안 되어 중앙방속국 요원이 서울로 

돌아왔다. KBS는 전시 중 중앙방송국이나 지역

방송국이나 묻지 않고 방송국에 출두한

직원은 전원 방송요원으로 활용했다.

 
-----중략-----
 
 중앙방송국의 기능이 점차 정상화됨에 따라
 지역방송국 요원은 원직복귀 조치를 받았다. 그러나

춘천방송국은 반 폐허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복귀한 사람이 없어 사실상 아나운서 생활에

휴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은 춘천방송 60년사를 참조

했습니다.  전 성병 아나운서는  6.25가

일어났을 때 3.8선과  근접한 춘천방송국에

근무 하다가 대구 피난시절, 방송에 합류해서 

 방송하던 중 부산피난시절 서울복구 선발대로 

방송에 참여 했습니다. 전쟁후 강원도

교육계로 가셨습니다.

 

 춘천방송국은 이후 오랫동안

방송이 중단 되어 1953년에야 방송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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