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어야 했습니다. 36,000여 미국 군인도 목숨을
잃었고 미국을 제외한 UN군의 사망자도
16,500 여명에 이르렀습니다.
6.25때 납북된 방송인들
1950년 6월 28일부터 서울방송국은
평양방송의 지방방송으로 되어 일방적인
전황 보도와 사실왜곡의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미쳐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직원들은 대부분 숨어 살고
몇 사람은 자기직장을 잊지 못해서 방송에 참여했지만
이것은 잠시고 극소수를 제외 하고는 모두
도중에 도망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7월 초순 북한군이 방송국 직원들을 의용군으로
동원하기 위해 방송국에 근무한 직원들을 소집한 일이 있어
그 내용을 잘 모른 방송국직원 40여명이 연주소에 나왔다가 그때
마침 비가많이 와 일단 해어진 후 다시 나타나지 않고 숨어 지낸 일이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3개월간 적에게 붙들려 사망
했거나, 북으로 끌려가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사상이 달라서
북으로 가신분들도 간혹 계셨겠지만 대부분은 강압적으로
끌려 가셨거나 학살 당했습니다. 제가 이 불로그에
글을 쓰면서 모은 자료를 토대로 끌려가신
방송인에 관해서 올려 봅니다.
프로그램 제작과 기획과장등을 하다가 해방후
처음이자 마지막 조선 방송협회장이셨던 이정섭님,
조선 방송협회시절 마지막 중앙 방송국장 홍양명님은
위 사진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방송국이 국유화 되면서
방송국을 떠나셨고 6.25때 납북당하셨습니다.
방송기술의 핵심인사 3분이 이때 남북되었습니다.
하셨고 기감으로 방송기술인의 선봉이었던 한덕봉님은 6.25
당시 6월 27일 피난을 대비하기위해 야간 근무자의 봉급을
손수 서무과에서 수령해서 나누어 주는등 최후까지 직원들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김성배님 말씀) 본인은 방송국을
지키다가 결국 납북당하고 말있습니다.
해방전부터 방송기술에 몸담았고
기술부 조정과장을 하던 민병설님, 역시
오랜기간 방송기술을 이끌어 오다가 6.25때
연희송신소장으로 있었던 김도연님도 이때 납북
당했습니다. (김도연님은 한강백사장에서
학살 당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엄상선 해방후 초대 광주방송국장
원래 방송기술인으로 광주방송국
건립에 참여했고 해방되면서 광주방송국장,
대구방송국장을 거쳐 중앙방송국 기술과장을
하시던 엄상선님도 이때 납북
당하셨습니다.
1930년대 인기 아나운서였지만 1943년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옥살이를 하다가
방송국을 떠난 송진근, 손정봉님아나운서와, 해방
되면서 그 명성이 더욱 높아진 인기 아나운서 전인국,
윤용노님도 이때 납북 당하셨습니다.
젊은 아나운서 김광필님,
조준옥님, 음악담당 기필기님,
1930년대 제2방송초기에 방송 제작자로,
아나운서로 근무해고 소설가로도 활동하신 이석훈님,
해방 후 초대 편성과장을 지내고 시단의중진이었던
안서 김억님, 편성과장이며 수필가로 이름이 있던
청천 김진섭님도연출계장 이백수님도
이때 납북 당하신 분입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중진 방송인으로
활약하셨던 김진섭, 김억님은 문단에서도
널리 알려진 분들이고 이백수님은 1920년대부터
연극계에서 이름있던 분으로 젊은 이덕근님이
연출과장이 되면서 삼고초려해서 계장으로
모셔온 분이 이백수님이었습니다.
연출자 유이송님, 유종역님, 인기 어린이 방송극 똘똘이 모험
연출로 명성을 날리던 현재덕, 문학준, 김생려, 이강열등 네분이 현악
4중주단을 구성해서 활동하는 등 해방후의 악단을 주름잡던 안성교님 등이
납북 당하셨고 제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분도 계실줄 압니다. 앞으로
계속 확인을 거치면서 글을 수정 보완코저 합니다.
선배님들께서 적극 도와 주셨으면 합니다.
방우회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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