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발발 3일간의 중앙방송국 (1)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
KBS전파를 타고 6.25발발 소식이 처음 전해졌다. 그러나 처음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없었고 일요일의 오전은
조용하기만 했다.그저 지금까지 흔히 있었던것 처럼 북한의 일시적인
도발이고 또 설사 남침을 한다해도순식간에 격퇴할 국군이 있다고
믿었기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방송국에서도 25일은 간간히
공지방송이나 뉴스시간을 늘려 방송하기는 했지만
프로그램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6월 25일 방송편성시간은
아침방송 5:30-8:30,
낮방송 11:30-13:30,
저녁방송 17:00-22:00
저녁부터는 사정이 달라져
방송은 군의 검열을 받도록 되었고
26일첫 방송부터는 군관리하에 비상방송이
편성되어 종일방송을 하게되었다.
방송이 군관리하에 들어간 것은
이철원 당시 공보처장이 국방부 정훈국장에게
요청했다고도 하고 이선근 정훈국장이 이철원공보처장에게
통고 했다고도 하지만 어쨋던 이때부터
방송국은 군 관리하에 들어갔고.
군 관리를 담당한 부서는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였다.
정훈국장 이선근대령,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이고 방송국 파견관은 홍천중위와 최학수 중사 등
몇 명이었다. 홍천중위와 최학수 중사얘기는
글 뒷부문 보충한다.
방송국이 군 관리하에 들어가던
6월 26일 아침 8시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방송국에 직접 나와서 국민들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짤막한 담화를 방송 했는데 이때는 이미 군 파견관의
지시에 의하여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임시편성으로
진행하는 때였다. 방송은 아침, 낮, 저녁의
구분없이 종일방송을 하게 된다.
국방부장관에 이어
주한 미대사인무초도 생방송으로
그의 담화를 발표했다.
무쵸 주한 미국대사
초대 미국 대사였던
무쵸는 6.25 다음날인 6월 26일
거의 독단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는
자의적인 의사로 KBS마이크 앞에 섰다.
외국에 주재하는 대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고 적침을 물리치려는 한국민의
의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어서 정치적인
행동에서보면 매우 중요한 행동이었다.
미군의 참전이 결정되기 전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기도 한 방송이었다.
“우리들은 흥분속에서 24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들은 기나긴 하룻밤을 견디어 왔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 대한민국 국군이 그들의 자유와
위대한 독립을 방위함에 있어 그 임무를
다 하고 있다는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생각 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무초대사의 강연은
북괴의 불법남침을 규탄하고 국군의 선전을
찬양 하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미군의 참여를 은근히 비치는 고무적인 내용의 고무적인
연설 이었다. 그리고 곧 이어 유앤은 긴급 안보리를 소집했고
서울 중앙방송이 막을 내리면서 도오꾜오에서 유앤군
총사령부방송을 개설 방송을 했다.
점차 얘기 하기로 한다.
주목을 끄는것은 문인들의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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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일어나자 고희동, 박종화, 모윤숙 등
문화인들은 즉시문총비상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행동을 개시하여 6월 26일 아침부터 국민들에게 전의를
고취하는 홍보전을 폈으며 KBS마이크를 잡고 애국시를 스스로 지어
낭송하는등 활동을 전개했다. 모윤숙은 찦차를 타고 아군의 주 저항선인
미아리고개 밑에까지 가서 적과 분전하는 국군장병들을격려 했으며
그 목매인 외침은 자즈러 들어가는국군의 사기를 높혔다.
모윤숙의 애국시를 끝으로
6월 27일 서울 연주소의 중앙방송은 끝났지만 피난을 하지 못한 모윤숙은 유앤군이
올 때까지 산속에 숨어 살았다고 했다.
문인들은 피난길에 오르면서도 계속
대적방송의 마이크를 잡고 적의 전의를 깎아내리고
아군의 사기를 드 높이는 방송을 했으며 부산에서 전쟁을
잊은듯한 부화와 소란만이 판을 치는 상황 속에서도 구국의
정열을 버릴 수 없어 계속 KBS부산방송국을 통해 대적 방송을
계속 하면서 문화 예술인들의 최초의 집단체로서 구국운동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고
한국방송 70년사는 기술하고 있다.
28일 새 벽 3시경 정동방송국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선발대로 무장한 북괴
특무공작원(국군복장) 몇 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먼저 사람들이 있는 지하 방공호에 들어갔다.
방공호는 일제가 전쟁을 수행하면서
비상방송을 하려고 설치한 시설이다,
그곳에는 5,6명의 직원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경찰관복을 입은 경찰관도 한 사람
있었다. 북괴군은 그 자리에서 경찰관을 사살하고
이들을 앞세워 유유히 현관으로 올라왔다.
얼마후 권총을 든 국방군 장교 한명이
현관으로 올라왔다.
김현수 대령이었다.
김대령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에게 방송국을
처리(파괴) 하겠다고 보고하고 그 길로 헌병 한명과
찦차 운전병을 대동하고 방송국에 들어오는 길이었다.
그는 서울시민에게 곧 후퇴 피난하라고 방송하고
그 직후 방송국을 파괴하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1950년 11월 10일자 조선일보에서
국군 복장을 한 군인들이 누구인지를
묻자 김대령이라고 말하는 순간 다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김현수대령은 대령으로는 두번째
정훈장교로는 최초의 6.25 순직자가 된것이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인 김현수 대령은
사후 준장에 추서되었다..
이 때 김대령이 현관에 떨어 뜨린
권총 때문에 대한방송협회 직원 한 사람이 또
사망했다. 북괴군은 김대령 시체를 덕수초등학교 언덕에
유기하고 그가 떨어뜨린 권총은 그대로 놔두고 있었다.
방송국 사정이 궁금한 대한방송협회 숙직원 한 사람이
방송국 현관에 들어서다가 권총이 있길래 이것을
집어드는 순간 북괴군은 그대로
그를 사살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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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간중 방송인과 생활을 함께한
홍천중위외 최학수 중사는 6.25전쟁 발발부터
오랜기간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앞으로
얘기 전개에 필요 할 것으로 생각되어
이해를 돕기위해 설명을 붙인다.
중앙방송국은 6월 26일부터
국방방부의 지휘를 받았고 홍천 중위와
최학수 중사를 비롯해서 몇 명의 사병들이 방송국에
와 있었다. 이들은 6.25전쟁기간 방송국직원들과 함께했고
전쟁 중 홍천중위는 곧 대위가 되었고 최학수는 상사가 되었다.
홍천은 공보부에서 공보국장을 지내는 등 요직을 거쳤고 최학수는
KBS에서 무대계장, 춘천방송과장, 공사직전 보도부 차장등을
지내다가 문화공보부에서 정년퇴임했다.
오늘 글은 한국방송 70년사와
방우회 자료를 근간으로 썼습니다.
북한군이 앞세우고 서울에 들어온T34 重탱크
중량32t, 최대시속 50km, 승무원 4명으로 인민군 전력의 핵심이었다.
중 탱크를 뒤따라 들어온 북한군
개전초기 한국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인민군 전차
탱크를 앞세우고 남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는 인민군.
중앙청을 거쳐 남대문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인민군 탱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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