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방송

이승만 대통령 6.25전쟁 중 6월 27특별방송

이장춘 2009. 6. 9. 07:25

 

 

   

이승만 대통령 6.25전쟁 중 6월 27특별방송

 

 
6월 27일 혼란은 극도에 달했다.
멀리서 대포소리가 들려오고 북한비행기가
서울 항공을 날아다니고 정부가 수원으로 갔다느니
아니라느니 방송은 종잡을 수 없고   한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이러는동안 정부는 수원으로 피난가고
이승만대통령은 수원을 거쳐 대전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대전에 있음을 알면 안되는 때였고 때마침 이날

유앤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전 참전결의안이 통과되어

여기에 힘을 얻은 이승만대통령은 국민을 안심시켜 혼란을

막아보려는 생각으로 대전에서 중앙방송국을

퉁해 특별방송을 실시하게 된다.

 

"모든것이 잘 되어가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라"내용이었다. 방송은 녹음되어 9시이후

수차례 반복되었지만 그 특별방송을 대전에서 보낸 방송

이라는것을 아는사람은 없었고 결국 국민들에게 피난을

지연시켜 더 많은 희생자와 서울시민들이 공산 치하

에서 고통받게 된 원이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이승만대통령의

6.27특별방송이다.

 

 

그때  갖 부임한 대전방송국장은 
 6.25전날 토요일이어서 서울 집에 가고

없는지라 방송과장 유병은이 사실상 방송국장

직무대리를 하게되고 그 방송을 내보내는 책임자였다,

유병은은 그때 얘기를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그 얘기를 여기에 옮긴다.

 

 

 

 
 1950년 6월 27일 오후 7시 30분경

이었다. 갑자기 초대형 고급승용차가 대전방송국

정문으로 들어왔다. 나가보니 키와 몸집이 큰사람이

나는 이승만 대통령 각하의 지시를 받고 온

김장흥이요 하고 악수를 청했다.

 

 

 

그 분은 몹시 급한 눈치로 나더러
이 차에 타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차에 올랐다. 무슨 일로 어디까지 가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아무 대답이 없다.  차는 얼마 후 충청남도 지사
관사 앞에 멈추었다.  김장흥을 따라 하차하니
이영진 충남지사가 현관에 서 있었다.
 
 나는 곧바로 응접실로 안내 되었는데
방에 들어가니 이 대통령과 부인이 선채로  귀속 말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크고 두툼한 손으로 나에게 악수를
해 주었다. 잠시 후 대통령은 김장흥에게  출입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 문을 잠근 김장흥은 권총을 손에 꺼내 쥐고 나를
좌시하고 있었다.아마도 나의 얼굴은 창백
했었으리라고 지금 상상 해 본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신이 방송국 책임자인가
 라고 물었다. 방송과장이었던 나는 네 하고 대답 했다.
(당시 6.25전날 대전방송국장이 서울에 출장가서
대전에 없었다.)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직접 나에게 내렸다.
 
1. 이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 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저녁 9시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여 전 국민이 듣도록 하라.  
4. 내가 방송하는 것을 서울에서 녹음 했다가  
밤에 여러 번 재방송을 하라.  
5. 누가 묻던지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6. 이 대통령이 방송 한다고 미리 누설해서도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우선 전화를
대전방송국에 걸어중계방송에 필요한
방송기기를 보내도록 지시했다. 또 대전 우체국
 60번에 전화를 걸어 내 신분을 밝히고 충남지사 숙소와
 대전방송국과서울 중앙방송국에 각각 방송선로를
즉시 개설 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다시 시외 전화를 서울 중앙방송국
조정실에 걸었다.  왕종현씨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뱄듯이  오늘저녁 9시
대전에서 방송을 올려 보낼 테니 아무소리 말고
무조건 전국에 중계방송 하라고 지시했다.  
 
서울방송국 측에서는 영문을 모르고
꼬치꼬치 묻는 것이었다. 나는 “내용은 묻지 마시오.
 무조건 내가 말 한대로 하시오.”  라고 다그쳤더니 그쪽
전화 응답은 거칠어 졌다. 나는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다. 잠시 후 대전방송국에서
방송기기를 지개에 실어 보내왔다.
 



 나는 중계방송기기를 조심스럽게
설치해 놓고 마이크로폰을 이대통령 탁상에
 설치하고 마이크 시험을 끝냈다.  8시40분에는
서울 중앙방송국 조정실까지 중계선로가 개통되었다.
 회선시험을 해보니 선로상태가 그리 좋은 편이 못 되었다.
  8시 45분에는 서울방송국 조정실까지 중계회선이 통했다. 
 왕종현씨에게 먼저 한 말을  다시 한 번 되풀이 했다.
방송시간, 방송자, 방송내용을 말 하라는 것이다.
왕씨 말에 의하면 서울방송국 간부들은
내용을파악치 못하면 중계방송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이유는
묻지 말라고 애원했다, 암만 물어도 대답은
못할 처지이니 무조건 중계하시오. 말한 다음
전화를 끊고 정좌해서 시간을 기다렸다. 방안에는
적막이 흘렀다. 모두 침울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9시 정각이 되어
이 대통령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방송원고 조차 없는 생방송으로 첫마디가  
 
“동포여러분‘ 으로 시작되어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다는 이야기로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요지였다.  
 
방송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방송이
끝난 다음에 지게꾼을 불러 중계기기를 가지고
대전방송국으로 돌아왔다.  방송이 끝난 뒤에 서울방송국
 친구들이 내가 그 방에 갇혀 자유로이 말 할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튿날 6월 28일 새벽에는 이미
서울이 괴뢰군의 손아귀에 넘어간 형편

이었는데그 방송을 수차 재방송 했으니

대전에서 이 대통령이 행한 특별방송은

성과를 거두기는커녕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그날 밤 대전에서의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서울에서 방송인처럼
 전국에 수차례에 걸쳐 방송 되면서  많은 문제 들이
 야기 되었고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방송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 되었다. 오늘

얘기를 쓰신 유병은님은 2009년 8월 24일

세상을 뜨셨습니다.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대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