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형명이 일어난 직접적인 동기는
고부군수를 비롯한 탐관오리들의 탄압에 못 이겨
일어난 것이지만 오랫동안 쌓인 민중의 분노가 분출된
것이었고 외세에 항거하는 민중운동이었다.
탐관오리 고부군수의 탄압을 견디다 못한
전봉준은 시정을 요구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은 약 1,000명의 동학도와 농민을
이끌고 고부 군아 (군청)를 습격해서 먼저 무기고를 부수어 총을 빼앗고,
옥을 열어 억울한 죄수들을 석방했으며, 불법으로 약탈한 쌀을 농민에게
반환하는 등 일을 벌이자 조병갑은 전라감영으로 달아났다가 조정에
체포되고, 박원명이라는 새로운 군수가 내려와 사태를
잘 수습하고 농민들도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농민이 나라를
전복하려는 난동을 부렸다면서 농민들을
처형하는 등 탄압을 가했는가 하면 봉기와
관련이 없는 지역 무고한 농민들까지
잡아들여 못살게 굴었다.
견디다 못한 전라도 충청도 등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불길처럼 번졌고 마침내 손병희 휘하
농민군까지 가담해서 20여만의 세력이 조정을 위협했지만
신식무기를 갖춘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전선 앞에 전봉준은
채포되어 사형에 처해지면서 농민전쟁은 1년 만에 끝났다. 이때가
1895년 음력 3월이었다. 비록 혁명은 실패했지만 새로운 세상을
이룩하겠다는 그 정신은 길이 빛나고 그때를 기념하는
상징물을 세우거나 여러 행사를 하고 있다.
자금 들려오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동학농민운동과 관계가 깊다. 녹두꽃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청포장수는 민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금지곡으로 되어있던 이 노래가 해방되면서 방송국
어린이 프로그램 시그널로 활용하는 등 날마다 방송국에서
전파를 타고 나가면서 이 노래는 국민의 노래 민족적인
노래가 되어 우리국민 모두가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