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백남준과 KBS 기념사업,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이장춘 2011. 5. 7. 20:50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KBS 기념사업
 
대한민국이 낳은 비디오 아트 창시자!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1980년대

 조지 오웰의 소설로 빅 부라더라는 말이 판을 칠 때

1984 년 1월 1일 KBS가 있는 서울을 기지로 해서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을 향해 위성생방송 되었던 백남준의 예술은 백남준이 20세기

위대한 예술가임을 확인시켰고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혔습니다. 2006. 1. 29일 

님은 세상을 떠나셨어도 그 발자취는 빛나고 그의 예술은 살아 움직입니다.

KBS는 그 정신을 길이 이어 가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서울시 교육청과

함께 ‘백남준 기념관 건립과 세계적인 학술대회를 추진키로

 해서 2011년 4월 26일 협약식을 가졌습니다. 

 

 

 

KBS를 비롯해서 협약식에 참여한 3개 기관은

문화예술과 정보통신분야 세계적인 명사 등이 참여하는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세계 각처에 있는 선생님의

활동무대를 보존하고 예술과 철학, 정보통신의 미래를

조명하는 명소로 기리는 방안도 추진합니다.

 

 

백남준 선생님은 1963년 첫 전시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를 시작으로

미디어를 통한 새로운 예술 장르를 개척해 오늘날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로 불리며 당시부터 정보화 사회의

참여와 소통을 처음으로 제기하며 정보화시대를 예견했습니다.

인터넷도 존재하지 않던 1974년, 백남준 선생은 록펠러 재단에 기고한

“후기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플래닝-26년 남았다”라는 논문에서

정보화 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가 산업의 중심이

될 것이며, 광대역 통신망 (Broadband Communication

Network)를 통한 IT인프라가 국가경쟁력과 번영의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1984년에는 앞에서 마씀드린 서울을 기지로

세계 최대의 비디오 작품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위성을 통해 전세계 2,500만명에게 선보이며 미래사회가 통제되고

장악당하는 사회가 아닌,과학기술이 전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예언했습니다. 이같은 위대한 예술가의 추모도 이어져

1997년, 독일 정부는 백남준을 기리는 우표를 발행했고 2010년,

구글은 메인화면의 두들(베너장식)을 백남준의 작품으로

 장식하며 선각자의 탄생 78주년을 기념했습니다.

 

김인규 KBS사장은 새로 벌리는 기념사업을

통해서 백남준 선생을 정보화시대, 세계적인 아이콘이자

대한민국의 문화 창조력의 상징으로 되살려 자라나는 세대들이

 이 분야의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긍지와 토대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음 글은 1980년대 초, 중반  KBS사장과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낸 이원홍 선생님이 그 시절

 KBS가 백남준 선생님의 비디오 아트 예술을 KBS가  주축이 되어

세계에 알리던 그때의 애기를 2006년2006년 3월호 회보에

기고 하셨기에 그 글의 일부를 옯깁니다.  

 

 

이원홍선생님

 

 

1980년 12월 컬러 방송을 시작하는 것으로
색채를 차단하는 흑백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백남준씨에 대한 접촉을 시도했다.그를 자주 접촉하고 있던

 해외공보관의 뉴욕 문화원장 유태완씨가 그 일을 맡아주었다.

그러던 사이 서울 올림픽유치로 매체의 위상이 급상하고 백남준씨의

마음도 동하기 시 작했다. 예술과 애국심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술이 애국을 잘 못하면 트로츠키의 혁명예술의 함정에 빠진다.   

이데올로기 예술은 뱀이 아담과이브에게 먹였던

죄악의 열매를 무차별로 먹인다.

 

 

백남준씨는 순수한 예술가로 예술의 도원경을
찾아다니는 구도자였다.  그가 심취했던 플럭서스와 헤프닝,

다 다이즘, 아방가르드는도원경으로 다가 가는 예술운동이었다. 

백남준씨가 마음을 열어준 것이‘굿 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조지·오웰의

미래소설 ‘1984년’을 비디오·아트로 한 것이다. 작업을 위해 서울을

 왕래하 는 길이 트였다. 서울사람으로 복귀한 것이다. 세계를

매혹하는 비디오·아트 창시자가 조국으로 돌아 온

것이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오웰은 1984 년 1월 1일 서울을 기지로 하여
미국, 프랑스, 독일로 위성생방송 되었다.  서울에선

저녁 뉴스 뒤를 이어 방송되었다. 황홀지경의 영상은 움직이는

추상화였다.생전 처음 영상의 곡예였다. 엄청난 컬처쇼크였다.

한국인 백남준의 세계 최첨단 예술이 서울에서 발신되어

정월 초하룻날 안방을 찾아갔다.

 

 

 

비디오·아트의 의미는 TV 파괴에 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국민을 감시하는‘빅 브러더(TV)’를

파괴한 백남준씨의 다다이즘이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오웰이 지정한

 그날 지배자의 도구로 타락한 TV를 산산조각 부셔버린 것이다. 비디오·아트는

 비디오가 아니다. 파괴된 TV의 시체에  불과하다. 브라운관의 사실적

화면을 자석이라는 몽둥이로 찢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파괴

색채형성을 주로 하여 새로운 시각을 형성한 것이다.

 

 

 백남준씨는 ‘반 미디어 주의자’다.
그의 설치예술과 퍼포먼스도 TV를 폐품으로
만들어 용도 자체를 바꾸어버렸다. 오웰의 성공파도를

 타고후속작업을 86년 아시아 경기대회에 맞추었다. 백 남준씨는  

반 키플링을 선언했다. ‘동은 동, 서는 서’라는 키플링의 시어에‘

 동 서는 하나다’라고 대항하면서 키플링은이제 가라고 했다.

그래서‘바이 바이 키플링’이라 불렀다.

 
 1986년 10월 9 일 뉴욕을 위성으로

연결하여 아시아 사람의 제전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린 날 ‘아시아적 세계’를 선언했다. 세번째 작업은

서울 올림픽으로 연결되었 다. 당연한 코스였다.    

85년 2월 내가 KBS를 떠나 지척이기는 하나

거리가 생겼다.

 

 

일들이 순탄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올림픽 비디오·아트도 무사히 끝났다.
비디오·아트 창시자의 조국에 그 공적에 알맞는
백남준씨 상징물을 세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준공 을 앞둔 국립현대미술관의 나선형 계단에 공간이

생겼다. 장소에 만족한 백남 준씨는 작품제작에 들어갔다.

한국에 ‘비디오·피라미드‘를 세우기로 했다.
 
 자금문제는 삼성이 풀어주었다.
 그래서 ’비디오·피라미드‘가 완성되었다.
백 남준씨는 ’다다익선‘이라 명명했다.
미술관이 86년 9월에 문을 열었다.
 
 올림픽이 끝나자 백남준씨의 예술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를 격려하고 도와주신분이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과 현대화랑의 박명자 사장이었다. 

 밖에 많은 분들이 짐을 함께 져 주어 한국이 ‘백남준

 비디오 ·아트’의 발신 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감사를 겸해 이 글을 쓴다.
 
 

아래 그림은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골랐습니다.

 
김유신 / 1992 / 149x114x90

 
갈릴레오 갈릴레이 / 1991


정약용 / 1993

 


데리비를 보며 등산하는 거북이 / 1993 / 30x40.5


 

 

호랑이는 살아있다 / 1999


 

 
예술과 인공위성 / 1984 

 

 
세종대왕 / 1988 / 250x124x50

 

 
완전피아노 / 1958_63 / 136x140x45


 

 
벤자민 플랭클린 / 1989 / 196x234x55

 
안테나가 있는 손기정 / 1988

 
 
손기정의 골인 / 1988
 

 
24개속의 하나 / 1988

 

 
백팔번뇌 / 1998 / TV모니터와레이저 디스크

 

 
고인돌 / 1995

 

 
굿모닝 미스터 오웰 / 1984

 
참여텔레비젼(detail) / 1971

 
TV 부처 / 1974

 

 
물고기 하늘을 날다 / 1976

 

 

방송 80년을 맞아
KBS는 비디오 아티스트

  故 백남준선생님의 업적을 기리는  - 백남준 비디오  광시곡- 

이라는 이름으로 백남준 특별전시회를 연적이 있습니다. 2007년 

7월 26일 백남준 예술과 지춘희의  패션이  만나는 개막 전야제를

시작으로 그해  연말까지 장기간에 걸쳐 KBS 신관 특설 전시관에서 

있었습니다.  KBS신관 야외 광장에서 열린 개막 전야제에는

 고인이 된 백남준 선생님의 미망인을 비롯해서 

많은 인사가 참여 했습니다.

 

전시장에는 백남준의 황금시대에 해당되는

1984~2001년 작품이 집중 조명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의
조각, 설치 작품들은 모두 탈장르 복합성과 스펙터클한 장관을

이루었으며 영상의 카오스를 창출, 가장 백남준다운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래 그림은 선생님의 1993년 작인 모니터

 166개, 10미터 길이의  ‘전자 거북’.입니다.

 

 

 

 

그때 촬영한 사진 몇점 골랐습니다.

 

 

 
특별전에 참여하신 백남준 선생님 미망인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

여사입니다. 비디오 아티스트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 여사느 백남준과 연인으로,

아내로, 예술적 동반자로 40여 년을 함께 지내왔습니다.  시케코 여사는 백남준의 삶과 예술 세계

그리고 둘 사이의  내밀한 이야기를 섬세한 필치로 그린 회고록 '나의 사랑, 백남준'(이순 펴냄)을

 자서전으로 엮어 2010년 7월 20일 조선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습니다.

 

 

 

 

 

 

 

백남준 선생님 약력

 

 

1932.6.20 출생
1945.경기중학입학
1956.일본동경대학입학,미술 음악 전공졸업후뮌헨대학입학
1974.뉴욕 에버슨미술관에서 videa 'n' videology 작품전 개최

1977.비디오 아티스트 시게코 구보타와 결혼

1978,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교수로 초빙

1984.우주오페라 3부작중 첫편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 중계
1986.두번째작품 "바이바이 카플링" 중계
1988.세번째작품 "손에 손잡고" 중계

1989,중앙일보 밀레니엄위원회 자문위원

1993.베니스 비엔나레 황금사자상 수상

1996,독일 '포쿠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

1997-98.괴테상,교토상 수상
1995.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5번째 호암상 수상

1997,독일 '캐피탈' 선정 '세계의 작가 100인' 중 8위

1999,이화여대 미술대학원 석좌교수

대통령자문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
2003.록펠러센타에서 멀티미디어 송신탑(트랜스미션) 발표
2004.베르린 구겐하임본관에서 글로벌 그루브2004발표
2006.1.29일 마이애미 자택에서 별세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황성옛터 색스폰.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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