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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 5.18 최초 보도와 그 주인공 장두원기자의 그때 그 얘기

이장춘 2011. 4. 27. 06:33

 

 

1980년 광주 5.18 최초 보도와 그 주인공 장두원기자의 그때 그 얘기

 

 

  1980년의 5.18을 지금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고  

불리면서 해마다 기념행사도 하지만 그때를 돌아보면  

세상은 암흑세계였고 광주의 항거는 폭도들의 소행으로

매도되어 무참히 짓 밟히던 그때의 얘기입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1980년의 봄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80년의 봄은 1979년

12. 12사태로 실질적인 정권을 손아귀에 쥔 신군부가 장악하자

이에 항거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습니다. 이를 무력으로 짓 밟은

것이 5.17비상계엄 선포이고 이를 계기로 국회는 해산되고 정치인들은

감옥에 끌려가거나 손발이 묶였습니다. 광주를 중심으로 이에 항거하는

 시위가 있자 탱크와 총칼로 시위대를 짓밟으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시민들은 무기를 탈취해서 진압군에 맞서면서 시위대는 물론이고

 무고한 시민들까지 수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모든 언론들은

말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어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은 소문으로만 떠 돌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수많은 시민들은 총칼 앞에 무참히 쓰러졌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언론인들은 가슴알이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1980년 5월 21일 오후 7시 KBS뉴스에서 광주

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전파를 타고 세상에 알려지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방송이 그 사실을 알렸고

신문은 호외를 발행했습니다.

 

 

철통같은 비상계엄령 하에서 보도가

통제되고 있던 그때 군부가 절대로 보도해서는

 안 된다는 그 내옹이 어떻게 KBS전파를 탔으며 누가

그런 일을 했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그동안 얘기들이 많았

습니다. 그때의 보도국장은 김도진님이고 편집을 맡은 기자는

편집부차장 장두원이었습니다. 장두원은 자기 자신이 한일이고

이 일로 갖은 고문을 받았으며 80년 해직을 당해서 8년간

어려움을 겼었다고 했지만 그것을 그리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기간 국방부를 비롯한 각 진상위원회에서

 이를 조사한 결과 장두원기자의 주장이 옳다는 결론을

얻어 2010년 12월 13일을 기해서 국가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때의의 장두원 기자가 현재 본인이 부회장으로 재직 중인

인터넷 신문 아시아 투데이에서 밝힌 내용이라면서

4월 25일(2011년) 저에게 다음 글을 보내

오셨기에 여기 전문을 올립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30년만에 광주민주화 운동 인정,

장두원  전 KBS 보도본부 주간

"죽고 싶으면 보도하랬다. 내 목숨

하나면 수천이 살 것 같았다"

 

 

아시아투데이=홍경환 기자

 

“내가 죽으면 광주시민들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장두원 전 KBS 보도본부 주간은 1980년 5월 광주의 진상을

 TV뉴스로 보도하던 당시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광주의 참혹한 진실을 방송을 통해 보도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 전 주간은 이 사건으로 KBS에서 쫓겨나는 아픔까지 겪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사회적 인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명목은 진실을 밝혔다는

 ‘증거’ 부재였다. 그리고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지 30년이 넘게 지난

 12월 13일 국무총리 직속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 운동 경력을 인정받았다.

 

2007년 보안사령부가 5.18 당시 작성했던

내부 문건이 국방부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공개되면서 그가 진실을 폭로한 대가로 해직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는 목숨을 건 민주화 운동 이외에도 ‘촌지

받지 않기 운동’ 등 언론 정화활동에도 큰 기여를 했다.

 

 

 

-신군부의 언론 통제가 심하던 때였는데 어떻게 보도할 수 있었나.

 

“당시 계엄사령부는 5.18관련 뉴스를

한 줄만 보도해도 처형 하겠다며 기자들을 협박했다.

당시 언론사는 보도를 하지 못했지만 광주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지면과 방송을 통해 나가지는 못했지만 현장

사실을 취재한 기사들이 데스크로 올라 왔기 때문이다. 단지

계엄사의 발표문만 세상에 알려질 뿐이었다.

 

이 참상을 보도하지 못하면서 3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광주를 이대로 내버려두면

신군부가 광주를 무참히 진압할 것 같았다. 수천 명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 목숨 하나 버려서

 수천 명의 목숨을 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결심을 한 뒤 KBS를

담당하던 보안사 요원에게 광주 보도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죽고 싶으면 보도하라’고 협박했다. 난 ‘죽고

싶으면’이라는 전제는 무시하고 ‘보도하라’에 방점을 두고

보도국장에게 보안사 요원이 보도를 허락했다고 하고

 광주의 진실을 폭로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두려운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 받을 일을 생각하니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광주의 진실이 보도되기

시작하자 당시 신군부가 발칵 뒤집혔다. 문제의 보도가 브라운관을

통해 나가자 계엄사령부 검열단 단장은 저녁식사를 하다가

자장면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검열 단장이 식사를 중단하고 바로 나에게

 전화를 해 ‘누구 마음대로 방송을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보안사 요원이 허락했다’고 딱 잡아뗐다. 보도국장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결국 문제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계엄사는 KBS 담당 보안사 요원을 해고했다.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것은 면했는데 해직 당하는 것은 피하지

못했다. 그해 7월 130여명의 KBS직원들과 함께 해직 당했다”

 

고건 전 국무총리와 악수하는 장두원

 

 

-이후 보도본부 주간까지 역임했는데 어떻게 복직됐나.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언론인들과

공직자들의 복직 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80년 해직자복직보상법’이 국회에 제출됐다.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 모두 이 법안에 대해 찬성했다.

 하지만 김대중 총재(DJ)의 평민당이 반대를 해

법안 통과가 되지 않았다.

 

해직자들 중에 정치 사찰 형사도 있고,

야당파괴 공작을 한 안기부 직원도 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DJ와의 면담을 통해 담판을 짓기로 했다. 정치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DJ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를 만나자니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떤 논리로 그를 설득해야 할지 밤새 고민했다.  

DJ를 만나 꺼냈던 첫 마디는 ‘바다 같은 정치를 하라’는

 것이었다. 바다는 장마철의 흙탕물도, 똥물도 모두 받아들인다.

 극소수의 잘못된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사찰 형사든 안기부 직원이든

포용하라는 것이 내 주장의 논지였다.

 

‘80년대 해직자는 신군부, 유신에 반대했거나,

올바른 기사 쓰기 위해 노력했고, 3김을 지지한 사람들 등이었다.

선생님과 관계 안 된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런데 선생님이 반대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이 말을 들은 DJ는 그 자리에서 법안 통과를

약속했다. 그리고 바로 기자들을 불러 당론으로

찬성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구방송국 보도실장시절 김수웅 방송과장과 본사 이재현, 류근찬 기자와 함께 한 사진입니다.


 

 장두원님 약력

 

1955년 전주 남중학교 졸업
1958년 전주 신흥고등학교 졸업
1959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원자력공학과 입학
1992년 고력대학교 자연자원대학 고위정책과정 수료 및 이사피선
1966~1973년 대한일부 기자(체육부, 정치부, 문화부)
1973~1976년 KBS 보도국(외신부, 편집부)
1976년 KBS 대구방송 보도실장
1979년 KBS 보도국 TV 편집 차장
1980년 강제 해직
1983년 한국 국제교류제단 기획부장
           한불, 한독 수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 한국 측 간사장
1986년 아시안 게임 국제 민속축전 상황실장
1987년 국제 인프리 사리오 회의 한국 측 대표단장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국제민속공연 상황실장
1989년~1992년 KBS 정치부장 대우, 문화부장, 해설위원, 보도본부 주간
1991년 한국 신문방송 편집인협회 보도자유 분과위원
1992년 KBS 전주방송 총국장
1994년 KBS 아트비전 감사
2000년
한국 문학 번역금고 상임이사
           세종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2001년 정부간행물 윤리위원회 심의위원
           영상물 등급위원회 수입영화 심사위원
2007년~현재 아시아투데이 부회장

 

아시아 투데이 창립 1주넌 기년행사에 참여한 채유석, 김선초, 이휘, 장경수, 한이수, 고수웅님등과 함께 한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