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1940년대 중반 최고의 자랑하던방송편성의 귀재 배준호

이장춘 2011. 4. 18. 05:17

  

 

 

1940년대 중반 최고의 자랑하던방송편성의 귀재 배준호

 

전 방우회장 문시형님 유고

 

 

 

 

편성의 1인자. 민간 상업방송의 기틀을 잡은 방송인.
 학교방송을 처음으로 기획. 편성한 교육방송의 개척자.
방송외길을 40년 동안이나 걸어온 옥천은 이 땅의 방송사에

한몫을 톡톡히 해낸 문자 그대로 방송인물이다. 1923년생으로

1946년 정월에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편성원이 된 그는

40년간 방송외길을 천직으로 삼아 한편 생을 마쳤으니

 우리나라 방송사에 남을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유난히 체구가 작은 편이어서 남달리 겪어야만할
 학병이란 모진 길을 모면하고자 그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한때 출생지인 강원도 회양군의 서기직도 맡았다. 그러나 이일은
극성스러운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옥천은 1946년 1월 7일 발령을 받고
방송 초년생으로서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백지 같은 방송 초년병은 이계원.김진섭.김억씨등 여러 선배님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 오늘날의 오리엔테이션 같은 것도
 없었으니  하는 일 없이 여러 날을 무료하게 보냈다.
 
더구나 선배님들은 무엇을 해보라고 하시는 것도 없고,
 이런 것은 이렇게 저런 것은 저렇게 하는 것이라고 지도해 주시는
분도 없으니 그저 책상만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런 생활이
두주일 이상이나 계속되었으니 앞으로도 별다른 변화가
 있을 것 같은 움직임은 없었다.
 
그렇다고 감히 무엇을 하겠다고 나설 수도 없었다.
그러나 마냥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루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그는 나름대로 무엇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매일 하루의 일과처럼 뒤적거리던, 이미 방송된 보존용
프로그램을 가지고 통계를 내보기로 하였다.
 
 어떤 본보기가 있는것도 아니어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분류하고 월별통계를 내서 그래프 등을
 그린 도표를 만들어 보았다. 몇 개월 것을 몇 분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만들자니 상당한 시일이 걸렷다.
 
정성껏 만든 완성품을 김진섭 과장께 보여드렸더니
 꼼꼼하게 잘 만들어서 참고가 되겠다고 찬사를 주셨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손을 댄 방송통계-참으로
호랑이 담배 피울 때 이야기 같다.
 
그러나 옥천의 이 작업이야말로 방송인
특히 편성에 뜻이 있는 방송인이라면 겪지 않으면 안 될
필수적인 과정이 되었다. 옥천의 꼼꼼하고 세밀한 작업은
 결과적으로 서울중앙방송국 편성원은 싫든 좋든 입사와 동시에
수행해야 할 과제로 전통이 되었다. 필자도 1948년 입사와 동시에
 몸서리쳐지는 이 통계 작업을 3개월여에 걸쳐 하였다.
 
방송의 흐름과 전체적인 구성을 표시한 숫자는
자연히 편성원의 머릿속에 박히게 되니 확고한 편성원칙을
 몸으로써 터득하게 되는 일이다. 편성의 1인자로 옥천을
거론할 수 있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이 서울중앙방송국에 진주하고
 고문관 제도에 의한 미군의 협조로 방송 프로그램이 개혁되기
 시작하였다. 프로그램에 쿼터제가 시행되는 혼란기라 할 수 있는
1946년 초에 편성원이 된 옥천에게 그에 비례한 무거운 짐이 지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편성과장으로 승진한 어린이 시간 PD 송영호씨의 뒤를 이어
 어린이 시간 PD의 책임을 도맡고, 여전히 그날그날의 편성과  더욱이
 모든 방송이 생방송이므로 프로그램별로 많지도 않은 스튜디오를
배정하는 일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이 시간 PD로서의 옥천의 공적은
1947년 어린이날 서울중앙방송국에 어린이 노래회를
 창설한일이다. 1947년 3월 1일 3.1절 특집방송으로 어린이 시간을
편성한 옥천의 기획은 오늘까지도 '민족의 노래'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남겨 남과 북을 가릴 것 없이 남녀노소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다.
 
둘째로 꼽을 수 있는 그의 공적은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노력해야만 될 노래의 선물이다.
안석영 작사 안병원 작곡 '우리의 소원은 독립 ( 독립이 통일로 변한다. )'이란
주제곡은 마련되었으나 합창단과 실내악단 거기에다 출연 성우와 연출자,
 실존PD로서 1인3역이 아닌 5역을 마다하지 않은 그의 노력은 얼마나
 벅찬 일이었을까는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1947년 최초로 KBS어린이 합창단을 구성하고 찍은 사진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7천만 가슴에 오늘날까지도
메아리치고 있으니 3.1절 특집은 대성공이고 대히트였다.
천신만고 끝에 3.1절 특집 어린이 시간을 마친 옥천은
 새삼 어린이 합창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마침내
 어린이 합창단을  서울에만 탄생시킨 게 아니라
 KBS각 지방방송국에도 창단하게 하였다.
 
우리 동요 찾기와 좋은 동요 만들기,
그리고 동요보급에 큰 몫을 하게 된 것이다.
1949년 3월부터 만6개월 동안 컬럼비아대학에서
특별 강의를 받은 그는 미국 각지를 돌며 미국의

방송 실태와 상업방송을 두루 살피고 특히

FM방송을 이용한 교육방송에  

접하게 된다.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미국기행은
6.25사변으로 인해 크게 활용되지는 않았으나 부산 피난시절
 교육방송의 효시 가된 학교방송 '교사의 시간'을 처음 담당하기에 이른다.
 옥천은 그의 유고에서 학교방송이 시작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산으로 피난하고서도 어린이 시간과 편성 전체일을 겸하고 있었다.
(중략) 문교부에서 공문이 왔다. 건전지식 라디오 수신기가
 USIS를 통해 5백대가 입수되었으니 방송국과 협의해서
 유용하게 사용하자는 내용이었다.
 
방송국을 대표해서 본인이 나갔고
문교부를 대표해서는 과학기술국의 백(白)사무관이

나와  상의한 끝에 학교방송용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우선

15분짜리  '교사의 시간'을 신설하기로 합의했다." 5백대라는

건전지식 라디오가  각 국민학교 교무실에 배치됨을 계기로

해서 1951년 6월부터 학교방송이  시작된 것이다.

 
1954년 옥천은 해외로 방송연수를 위한
어려운 길을 다시 떠났다. 유네스코 후원으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교육방송 실태를 돌아보고 미국 뉴욕 주에 있는
시리큐스대학 대학원에서 교육방송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종합편성인 어린이 PD 1호인 그는 일찍이
 영국의 교육방송 영향을 크게 받아 발전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교육방송 실태를 두루 살피고
미국에 가서  방송의 견문을 넓혔다.
 
이런 옥천을 정부가 활용치 않을리 없어
관리직으로 승진하게 되어 1953년 8월 15일에 발족된
방송관리국 지도과 지도계장으로 자리를 옮겨 방송현업에서
 손을 떼고 방송을 높은 차원에서 관리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1957년 광주방송국장,
1958년 제2방송과장, 1960년 제1방송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또 5.16군사혁명으로 1961년 한때

부산방송국장으로 부임했으나 1962년 서울문화방송이

개국함에 따라 방송부장으로서 민간상업방송의 새로운

 터전을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옥천은 문화방송

개국초기의 어려움을 그의 유고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문화방송국 방송부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개국 첫 드라마인 주말연속극 대본을 개국에 임박해서
 청탁한일이 있다." 청탁을 받은 이는 원로 방송드라마 작가
 김희창씨였다.     여담을  하나 곁들이자면  당시  마흔살의
 노총각 김희창씨가 장가를 간다고 해서 26세의 총각인
 옥천이 들러리를 선일은 당시 방송계의 화제였다.
 
옥천과 이정도로 친숙한 김희창씨의 말이다.
 "방송드라마가 곶감 빼먹듯이 어디 그리 쑥쑥 나올 수 있는 거냐."
친숙한 사이인지라 결국 청탁에 응했는데 제목은 '웃기지 마라'였다.
 '웃기지 마라'라는 제목그대로 '웃기지 마라'는 촌극이 벌여졌다.
 
이일은 문화방송 개국 당시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나타낸 일이었다. 24회로 정해 집필키로 한
'웃기지 마라' 원고를 20회로 마무리 짓고 원고료를 제대로
 지불하라는 김희창씨의 요구가 문제의 발단이다.
 
"원고료를 제대로 지불 못하는 것을 보니
당신 월급도 제대로 제때 못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요.
나도 그만 쓸 것이니 당신도 이런 자리 그만두고 월급 제대로
 주는 대로 가시오." 김희창씨의 이민은 기가 막힌
힐책을 겸한  선언이었다.
 
24회 연속극을 20회만에 도중하차하니
난처한 것은 방송부장 옥천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하나의
 일화에 지나지 않는 에피소드이지만 당시 문화방송의
어려운 처지를 단적으로 나타낸 일이다.
 
방송을 일반 상거래처럼 보고 있는 경영주가
 "방송원고료는 외상으로 안 되나?"하던 시절 옥천의
방송에 대한 집념과 애착은 바로 오늘의 문화방송 편성의
 기틀을 잡았다고 하겠다. 분명히 '오발탄'은 아니었다.
 
 옥천 배준호. 그는 MBC취체역 방송부장을 거쳐
 1964년 라디오서울 기획위원, 1967년 TBC FM부장, 1973년
 CBS기획심의실장, 1975년 KBS심의위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1981년부터 3년간 한국광보문화연구원 회장직을  맡았으며
 1985년 한국특수음향 주식회사를 창설하여 회장직을
맡았다. 머리가 흰 것은 당연하나 눈썹까지 흰
옥천-- 1990년 6월 28일 타계하였다.
 

 

그도 필자와 같이 방우회 회원 십여 명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던 날 아침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 슬픔 그를 애도하는 방송인의 마음들은 1991년 5월호로
 발행된 한국방송공사 사우회 사우회보를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총 36페이지의 사보에 자그마치 22페이지가 온통 옥천을
추모하는  글과 그의 유고로 채워졌다.
 
KBS이사회 이사장으로 있는 노정팔씨는
추모 글에서 "옥천 배준호씨하면 작달만한 체구에
머리 회전이 빠르고 부지런한 사람이란 생각이  먼저

든다."고  하면서 옥천의 방송외길을 높이 평가했다.

 
여기서 필자도 "교육방송은 교무실에서
 메아리친다."라고 우리나라 한용희씨는 "KBS가 발행한
 <한국방송 60년사>와 <한국동요음악사>를 다시 꺼내 읽어보면서
 방송인 배준호씨의 업적을 재확인하고 있다.
 
" 방송드라마 원로작가 유호씨는 "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홍안의 그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애절한 글을 남겼다.   '선배님 가시다니'라는 제목으로
 최계환아나운서는 MBC의 금자탑을 높이 쌓은 업적을 기렸고,
KBS사우회 사무국장 김호영씨는 "이봐 학교방송을 우리
나라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 사람은 나야."라고  했다는
교육방송에 얽힌 그의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 KBS PD출신인 강신철씨는
'고 배준호 선배님을 생각하면서'라는 추모의 글에서
생전에 효성이 지극했던 옥천의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4-5년 전 안양으로 이사를 가시기전에 종로2가 뒷골목에 위치한
 종로목욕탕에서 있었던 일, 그때 환갑이 지난 배선배님은 이미
작고하셨지만 당시 팔순이 넘은 선친을 모시고 목욕을
자주 시켜드렸습니다. 그 지극한 효성스런 모습은
지금도 많은 욕객들 사이에서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신 선친을 목욕탕에 모시고 오셔서 직접
때를 밀어드리고 옷을 입혀 드리고 온갖 수발을 들고 있었습니다.
"효자로서의 옥천을 칭송한 글인데 팔순이 넘은 노모를 두고 먼저  타계
하였으니 효자라는 소리는 듣기 어렵다. 그러나 노모의 뒷바라지를  위해
 안양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서울로, 3년을 채 넘기지도 않고 다시 안양으로
 이사를 한일을 생각하니  효자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노릇이다.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국립극장표를
나누어 주면서 종합예술의 경지를 방송이 맡아야 된다는
 몸소 시범을 보여준 옥천을 인자했던 선배님으로
 추앙하는 후배들이 많다.
 
김홍태(KBS PD)씨를 비롯한
 KBS라디오국의 PD 정창명 여사의 애틋한 글을 보면
 후배들이 선배 사랑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내 처음으로 하는 말인데
 난 정말 외로운 사람입니다."어느 날 옥천과 필자가 주석에서 단둘이 앉아
 주고받은 이야기다. "세살 적에 생모와 이별하여 아버지 품에 안겨 동냥젖도
 먹은 일이 있지, 할머니 품에 안겨 서울 명륜동에서 성장했어."불우했던
 유년기를 회상하던 '외로운 사람'옥천은 그러나 법도 있는
인품으로 계모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모셔왔다.
 

 

 

 그가 남긴 웃지 못 할 이야기로 이글을 줄일 가한다.
1944년 보전을 나와 징용을 피해 한때 회양군 서기직을 맡아
징용가는 사람들을 인솔하여 상부기관에 인계하는 일을 담당했다고

한다.  머리수만 맞춰 상부기관에 인계만하면 그이 임무는 끝이었다.

강제 징용을 피해 군서기가 되었는데 하는 일이 징용 가는
 사람을 상부기관에 인계하는 일을 맡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상부기관원에게 인계됨을 확인하고
얼른 그 자리를 뜨지만 얼떨결에 머리수를 맞췄어도
 한 두 사람이 비게 마련이었다. 고한다. 그가 인계를 정확히
 확인받고 재빨리 자리를 뜨면 징용자 가운데서 도망친
한 두 사람이  의례 귀가길 주막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먹지도 못한 막걸리가 당시로서는
큰 곤욕이었지만 도망친 그들과의 재회는 참으로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동포 사랑하는 마음의
 일단이 아니었을까?   6월 28일이면 옥천 배준호씨의 

1주기가 된다. 방송'91 7월호가 7월초에 발간되니 

이글을 고인의 영전에 바친다.

 

 

문시형님

 
이글은 고 문시형 선생님이 방우회장
시절에 1991년에 쓰신글을 당시의 방우회 사무총장
정항구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