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한국의 마르코니 한 덕 봉 / 전 방우회장 문시형님 유고

이장춘 2011. 4. 1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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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르코니 경성방송국 한덕봉 / 전 방우회장 문시형님 유고 
 
  

無線電信一級技士

 

日本國際汽船의
韓德奉氏入京,

옛날 長薰學校츌신,

大西洋上의 生活//
 
「三一運動 消息도 大西洋上에서 들엇소」

또 배를타야겠다는 한덕봉씨의 말

1924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 2면
 
한덕봉님에 관한 기사 머리글입니다.
 

 

글 쓰신 문시형님입니다. 

 

방우회(한국방송인 동우회) 회장이시던

 문시형 선생님은 한국방송사를 쓰신다는 생각으로

한국인물사를 쓰셨고 한덕봉님의 글은 첫번째 쓰신

글입니다.  당시 방우회 사무총장이던 

정항구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고민 끝에 붓을 든다 방송인물사라고 하면
방송사를 말하는 것이다. 역사란 시공을 지배한사람들에
의하여 꾸며지고 사관이 글로서 후세에 남겨줌으로서 기록이 되는

 것이다. 해서 더욱 방송 인물사를 집필키로 가볍게 승낙하고 마감 날이

가까워짐에 따라 붓을들려하니 천근만근 무게로 느껴진다. 첫 방송 터에

소나무 여섯 그루를 심게 되는 부처님 오신 날을 핑계 삼아

방송 인물사에 대하여 나름대로 의견이 있을 수 있는

 선배와 동료 그리고 후배들을 모았다.

 
때는 1989년 5월12일 오전11시
덕수국민학교 교정이었다. 이인관. 이현. 문제안.
유병은. 김창구. 이덕근. 정진석. 조부성 나를 포함해 모두
9명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자리를 옮겨 방송위원회
회의실에서 의제의 물꼬를 텄다.
 
말하자면 언로를 튼 것이다.
'1927년 경성방송국이 처음으로 전파를
발사한 것이냐' '아니다' '조선일보의 소공동 공회당과
 종로의 우미관을 이어준 시험방송이다' '그렇다'  '아니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의 시험방송이  처음이다'등등 방송인물을
거론하기 위한  자리에서 역사를 규명하는 것처럼
말들은  진지했다. 아직도 생존한 증인이
있어 더욱 신중해야했다.
 
이 땅에 전파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27년이 아니라 1890년대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910년대에 '쓰쓰똔똔'통신을 보내던 무선통신기사로서
 영국 상선에 승선하여 동서양을 누빈 한덕봉(韓德鳳)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파나마 운하를 지나 끝없는 수평선이
동서남북 할 것 없이 아득히 그어져 있는 태평양 해상에서
 한덕봉은 놀라운 뉴스를 듣게 된다. 머지않아 조선의 경성에
방송국의 세워진다는 일본방송이 한덕봉의 고막을 울렸던 것이다.
우리 서울에 방송국이 생긴다고! 그렇다면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부지중에 무선통신기사인 한덕봉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난후 그는 시속 12노토의
마치  굼벵이같이 느껴지는 배를
타고 조국으로 향했다.
 
열흘이 가고 보름이 지나 나가사키에 다다랐다.
 안절부절 그날로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그리운

고향 서울로 돌아왔다. 정동 1번지에 안테나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 안테나 옆에 세워진 연주소에는 전신이 거미줄같이
얽히고 설켜 어지럽게 널려있지 않은가?
 
일인 기술책임자라는 체신국 관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설계도는 없느냐고 질문한 사람이
오늘의 방송인물사의 첫 타자이며 주인공인 한덕봉이었다.
일본사람인 책임자는 오히려 무선 공부를 한 적이 있냐고
 물어 한덕봉은 자신이 메구로(目黑)무선을 나와 무선통신사로

 영국 상선을 탄지가 10년이 넘었다고 밝히고 도움을 주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경성방송국과 인연을 맺은 한덕봉은 1926년 가을부터

경성방송국 개국기술요원으로  방송계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방송은 누가 뭐라 해도  소프트웨어보다는 하드웨어가

먼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방우회 원로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렇게 보면 다시 소프트웨어 하드웨어를
구사한 사람으로서 한덕봉을 끌어내야만 한다. 나는
한덕봉이란 사람에 대하여 간간이 듣기만 했을 뿐이어서
사관의 무거운 책임을 진 사람으로서 한덕봉이란 인물을
평하고 과연 업적이 무엇인가를 규명해야 할 처지에
놓여 참으로 암담하기만 했다.
 
그래서 1989년 6월 8일 칠순이 넘은
이인관, 한덕봉이란 사람과 같이 일을 했던 한기선,
전명수등을 방우회 사무실로 초대하였다. 1948년 방송국에
겨우 발을 들여놓은 이 까마득한 후배의 초청에
세 사람은  기꺼이 응해주었다.
 
한덕봉은 감색양복을 즐겨 입었다.
30년이 넘은 양복을 자랑이나 하듯 입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시대 학생들이 신단 목이 높은 단화를 주로신었다.
이한덕봉의 양복과 구두는 당시 그와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근검절약의 상징으로 강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마도로스이기에 앞깃이 겹쳐 여며지는
감색양복에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벗어지지 않는 신발을
 신었던 한덕봉. 그는 언제나 빈틈없는 사람이었으며 또한 단정한
사람이었다. 당시 한덕봉의 밑에는 그 시대 유명했던  단파방송
해외연락운동의 핵심인물이었던 이이덕이 있었다.
 
그는 미국의 이리노이주 주립대학 전기공학과를
나왔기 때문에 영어에 능통했다. 그는 그 당시 정동 2층
방송지휘소 주임인 한덕봉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면서
단파수신기의 다이얼을 샌프란시스코 미국방송 주파수에
맞추거나 VOA방송에 그런가하면 중경에서 나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파수에 맞추고 들었다.
 
주임 석에 앉은 한덕봉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눈을 지그시 감고 모른척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단파수신기를 만든 성기석이란 사람과 이이덕이
 단파방송 해외연락운동의 아지트인 방송지휘소를 돈암동으로
 옮겨갔고 비로소 맘을 놓게 된 한덕봉은  서울을 떠나 1942년
 봄에 평양방송 기술과장으로 전보발령을 받아가게 된다.
 
그는 줄곧 그들이 아지트를 옮겨가기 전에
 자신이 다른 데로 전보될까봐 걱정을 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일본은 언론말살에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여,
 민족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되고 외국인  선교사들은
 추방되며, 단파방송수신기 몰수 령이 내려지는  등 민족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민족지도자. 민족변호사 그리고 모든 조선 사람들을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만다. 해외정보가 두절된 것이다.
 
민족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정보 수집 책 이었던
송남헌과 동아일보기자 홍익범은 경성방송국 어린이 시간담당
 편성원인 양제현에게 접근하게 되고, 양제현은 이이덕과 성기석에서
 세계대전 전황과 세계정세의 흐름을 알려달라고 부탁 하게 된다.
 
 그 후 개성방송소 소장으로 부임한 이이덕은
광주방송국 설치공사에 동원된 성기석을 개성으로

불러들인다. 자연스럽게 개성에는 양제현과 송진근 아나운서,

송남헌의 발길이 잦게된다. 마침내 일본경찰의 검거가

시작되어 이이덕 성기석 송남현 양제현

홍익범등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한덕봉은 단파방송 해외연락운동이
마침내 일본고등계 형사들에게 발각되어 일대 소탕작전이
 전개되고 있는 것을 알고 고심했다. 방송국에도 거의 모든 조선
사람들이 미국의 VOA와 중경의 호랑이 방송(대한민국 임시정부방송)을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을밀대를 지나오다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본 한덕봉은 그 즉시 방송국을 향해
달려가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한기선을 불렀다.
 
이유는 묻지 말고 무조건 방송국 안에 있는
비품용 단파수신기를 제외한 개개인의 단파수신기를
감쪽같이 없애라고 지시했다. 상기된 한덕봉의 얼굴을 본
한기선은 동료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려주고 사택의 자기 방으로
 뛰어가서 단파수신기를 망치로 산산 조각내어 말 그대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평소 냉철하고 빈틈없는 한덕봉이었기에
한기선은 당시 흥분된 한덕봉의 얼굴에서 심각한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방송국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온했다.
 
한기선은 괜히 단파수신기만 때려 부순 건
아닐까하는 회의에 젖어 방송국에 출근하였다. 방송국에
 들어서는 순간, 뭔가 다른 분위기가 닿아왔다. 기술과에  올라가보니
 일본경찰이 눈을 부라리고 기다리고 있는 거시 아닌가! 책상서랍을 열어라,

호주머니를 털어놓아라,일본경찰은 그를 보기가 무섭게 다그쳤다.  공포에

떨며 한기선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공포의 분위기는 차차 누그러졌다. 

'시스레이 시마시다 (실례했습니다)' 일본경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리를 숙이며 기술과를 나갔다. 형사들이 나간 다음에도

 어리둥절해서한기선은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때 어깨를 지긋이 잡는 손이 있었다.

 
 한덕봉 과장이었다. 단파수신기를 흔적도 없이
부숴 버리라던 그의 상기된 표정을 아직도 못 잊는
원로방송기술인  한기선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인자하고
 소리 없이 자기와 같이 있던 사람이라고 회고한다.
 
그 한덕봉 과장의 덕으로 그때 평양방송국 사람들은
한사람도 일본경찰에 잡혀가지 않았다. '마르코니'하면
방송인이라면 상식에 속하는 사람이다.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그 유명한 이탈리아의 마르코니가 일본 동경을 거쳐 서울에
온 것이다. 대략 1928년이 아니면 9년의 일이다.
 
태평양을 앞마당에 있는 연못처럼 여기고
세계를 누비던 한덕봉은 마침내 마르코니의 길잡이가

된 것이다. 우연히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한국의 마르코니가곧 한덕봉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당시

그는 방송기술쪽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였다.

신의주방송국을 세울때의 일이다.

 
방송국 본부에서 신의주방송국에 보낸 기기를
직송하지 않고 평양방송국으로 보내 온다. 그 이유는
경성방송국 건설 당시 방송국의 기기는 마르코니 제품이어서
 한덕봉이 설치한 경험이 있어서이다. 한기선에 따르면 그때 고물이
 다 된 마르코니 제품을 쓰다듬으면서 깨끗이 손질해서 신의주에
가서  설치하자던 한덕봉의 감격어린 말에 방송기술인으로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였다고.  세월은 흐르고 흘러
일본은 전쟁에서 패하고 조국은 해방이 되어

어디를 가나 웃음 꽃피고 있었다.

 
한국방송기술의 선구자인 한덕봉은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국제무선회의에 대한민국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정부수립후인 1948년 11월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만 해도 해외나들이가 흔치않던 때라 한번 나갔다오는
 사람은 윗사람 아랫사람에게 선물을 사가지고
오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제네바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귀국길에 한덕봉은 그답게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선물은 일체 없었다. 그렇다고 선물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말하자만 사발시계라 고할까, 탁상시계라 라고할까, 그다지 크지 않은
 접시만한 시계를 여러 개 방송국에 선물해서 근무자들의 잠을
깨워주고 정확한 시간도 알려주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계는 6.25사변이 나자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들이 모두 그야말로 깡그리 집어가 버렸지만

방송만을 생각한 한덕봉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6.25사변이 나자 미처 남으로 피하지 못한

최고기술책임자 한덕봉기감은 방송국에
끌려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눈치를 살핀답시고 방송국에 나온 후배에게
지친 목소리로 나오지 말라, 피신해 있으라.'고 귀띔하던
 한덕봉 선배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는 한기선, 전명수 두 원로들
동료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송인 한덕봉같은 사람이 아니었던들
 어지 자신들의 오늘이 있었겠느냐고 감회에 젖는다.
 
덕수국민학교 교정에 우뚝서있는
 '첫 방송 터'기념비를 머리에 떠올려 본다.
'앞으로 한가람 푸른 물과 높은 바위가 마르고 닳도록
겨레의 마음을 실어 하늘 높이 그리고 멀리 쏘아 올려야한다....
.' 방송사 62년이라는 오늘의 시점에서 방송인 한덕봉을
 흠모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그는 서울토박이로 1890년대 후반에 태어나
 20세기와 더불어 무선통신을 천직으로 삼고 1920년대

초에는 마도로스로 세계를 누비다가 방송을 자신의

할일로 믿었기에 끝내는 이북으로 납치되어 

이제는 유명을 달리하고 계실 것이다.

 
자녀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오늘에 와서는
소식이 끊긴지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글을 쓰며
새삼 허무함을 느끼며 이미 돌아가셨다면 오직
 두 손 모아 명복을 빌 뿐이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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