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송신소가 철거 되기전 그곳을 찾은 방송 기술인들과 함께 한 사진입니다. 영원한 엔지니어 출신 방송인 권오진.
그는 성실하면서도 추진력 있는 성품을 갖고
있었는가 하면 마음씨 까지 좋은 상관이었다고 옛 부하
직원들은 기억한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그는 향토성이
강한 기질이 있어 저돌적인 성품을 갖고 있었다.
전국 네트워크화 시대를 개척한 방송기술의 산 증인 권오진/문시형님 유고
그는 객지에서 사춘기 소년시절을 보내며
한국인이란 긍지를 마음에 새겼는데 바로 그러한 것들은
가정교육을 통해 몸에 밴 성품인 것 같다. 1925년 1월 9일생으로
열 살이 되던 1934년 그는 부모와 함께 일본 교토로 강제 이주했다가
1945년 10월에 귀국하였다. 보통학교 3학년 때 도일하여 교토의
소학교를 졸업하고 교또공업학교(京都工業學校 5년제)를 거쳐
교도센슈공업(京都專修工業)고등부 전기과를
마치기까지 일본 생활을 한 것이다.
교도의 학창시절은 그에게 있어서 자연히
일본말이 일상 용어가 되고 우리말은 멀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말은 어딘가 악센트가 다른,
그렇다고 경상도 사투리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도 없는 이색적인
말투이다. 우리말의 악센트에 경상도 사투리, 거기에다
일본말 악센트까지 믹싱된 어조라는 게 그의억양을 설명하는데 옳은 표현일 것이다. 방송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45년 12월 13일
대구방송국 기술과에 배치되고서 부터였다. 만20세가 되어
엔지니어로서 방송을 천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방송생활
35년간을 회상하면서 그는 먼저 대구에서 겪었던 쓰라린 경험을
가장 기억나는 일로 꼽았다. "이념의 벽이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 질서가
전개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감안할 때 참으로 웃기는 일이었소."
이렇게 서두를 껴낸 그는 하마터면 자신이 공산당으로
몰릴 뻔했던 일을 털어놓는다.
1948년이던가? 벌써 67세까지 세월을 살아 백발이
무성해진 그는 그 당시의 확실한 연도를 기억하지 못한다.
"대구시민을 위한 중학생 브라스 밴드경연대회를 개최한 일이 있었지.
한약 집산지로 유명했던 대구시가 온통 축제분위기에 쌓이고
그 열기는 대단했어요. 공정한 심사를 통해 입상학교가
발표되고 최우수 브라스밴드 팀에 대한
시상도 끝마쳤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40여 년 전으로
기억을 되돌리는 권 옹은 무사히 행사를 끝마친
것으로 생각하고 방송국으로 돌아와 보니 전혀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고 말문을 연다. 시상에 불만을 품은 일부
학생들이 방송국 스튜디오를 점령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
말하자면 심사가 공정하지 못했다는 항의였다는 얘기다.
기술과 동료인 이승균 엔지니어와 함께
학생들을 설득하기 시작하여 겨우 사태가 수습되려 할 때
난데없이 대구경찰서 형사대가 들이닥쳤다고 그는 기억한다.
농성학생을 해산시키려고 온 형사들이려니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들은 학생들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뺀 권오진.이승균
두 엔지니어를 연행한다는 것이었다.
방송국 스튜디오 안에서 불온 비라가
발견되어 학생들의 신고가 들어왔으므로 조사할
필요가 있어 연행한다는 것이었다.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떳떳했기에 순순히 경찰서로 끌려갔으나 형사들의 조사는
가혹했다고 그는 회고한다. "공산당에 언제 입당했느냐?"
불온 비리에 대한 조사가 아니라 일단
공산당으로 단정한 조사였다.
권오진 엔지니어는 귀국한지 얼마 안 돼
우리말이 서툴러서 더 혼이 났다.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는 권오진씨는 지금도 "대구에 살고 있는 이승균씨가그때 무서운 고문을 당했지." 하면서 심사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의 조작임이 밝혀져 무사했지만 그에 따른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숨을 내쉰다.
아울러서 그는 공산주의가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질서에 의한 세계정세가 이루어져 가고 있는
오늘의 시절이기에 털어놓는 옛 추억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자칫 잘못되었으면 공산당으로 몰릴 뻔했던 옛 추억이다.
재직 시에 그가 겪었던 일화는 그 외에도 많다.
10.1 대구 폭동 사건 때는 끝까지 방송국을
사수했는가 하면 서툰 우리말로 아나운서까지 대신한
방송인으로 유명하다. 6.25동란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9.28서울수복 직전 선발대로 편입돼서 방송국 직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울에 입성한 장본인기도 하다.
지금은 80대가 된 당시의 방송인 이종훈 씨를
대장으로 모시고 부산항을 떠난 것은 9.28 열흘전인
1950년 9월 18일이었다. 마산방송국의 50W짜리 예비 송신기를
LST에 싣고 인천송도 앞바다에 도착한 것은 9월 21일. 해병대를
비롯한 국군과 유엔군을 서울로 진격하고 있는데
그들은 만 이틀 동안을 배에서 머물다가 9월
23일이 되어서야 인천에 상륙했다.
국군 쓰리쿼에 몸을 싣고 노량진을 거쳐
한강을 도강한 지점은 서빙고였다. 서빙고에서
이들 일행은 다시 북상해 광장송신소에 이르렀다.추석전날의 일이었다. 군인들이 마련한 푸짐한 갈비와 각종 음식으로 성찬이 마련되었는데 진격 명령이 떨어져 먹지도 못해 참으로 아쉬웠던 기억이 새롭다면서 그는 겸연쩍게 웃는다. 이들 일행이 서울에 입성하여 정동방송국에
도착한 것은 9월 28일 오후3시경. 흔적도 남지 않은
정동연주소를 돌아보고 일제시대 비상방송국의 연주소
지하에 파놓은 방공호를 뒤지다 이들은
괴뢰군 4명을 발견했다.
당시 방송 대장이었던 홍천대위가 이들을
생포한일은 잊을 수 없는 크나큰 전과였던 것이다. 당시
KBS 정동연주소는 괴뢰군에 의해 흔적도 남지 않았으나 다행히
대한방송협회 건물은 무사해 선발대는 우선 신주 모시듯 부산에서
갖고 온 50W송신기 설치에 착수했다. 그리고 일부는 연희송신소가
별로 다치지 않았다는 이인관씨(당시 체신부직원)의 제보에 따라
하던 일을 중단한 채 연희 송신소로 가기로 했다.
6.25당시에 남하했던 북쪽기술진의 기술수준은
말이 아니었다. 6.25전까지 썼던 50KW송신기를 다시 가동해
방송을 송출했다. 그럼으로써 소련제 10KW송신기는 전리품이 되고 만다.
그 는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제일 먼저
6.25를 뼈저린 아픔으로 기억해내고 있었다.
남양송신소 건설현장을 지휘하돈 권오진님입니다. 1960년 방송출력 증가 계획에 따라
500KW 짜리의 남양송신소 건설책임자로 발탁된
권오진 엔지니어는 서해안 벌을 스치고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몸으로 막아가며 송신소 부지 정지작업과 진입로 개설 공사 등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5.16이 일어났다. 군사정권은
5.16 1주년을 기해 500KW대출력으로 송출하는 남양송신소를
준공하라고 엄명한다. 혁명을 일으킨 군사정권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저 성실한 성격으로 오직 방송만을 위해 살았던
권오진 엔지니어는 이것도 숙명이거니 하며 맡은 임무에 충실 한다.
'불도저'라는 애칭이 붙었던 것도 이즈음이었다. 그는 송신기 제작회사 부터
다그쳤다. 그렇게 해서 송시기가 도착한 것은 1962년 1월. 그리고 송신기
제작 회사 측에서 보낸 엔지니어가 도착한 것은 3월을 넘겨 4월 1일이었다.
정지작업과 진입로 공사, 그리고 청사 공사는 완료되었지만 정작
중요한 기술 공사를 마쳐야 되는 5.16 1주년기념일까지는
한 달반밖에 남지 않았다.
한 달반이라는 시간적 여유는 설치공사가
이미 끝나 시험전파를 발사하는데 에만 최선을 다하고
그러면서 주파수를 조정하는 시간적 여유에 지나지 않은, 극히
제한된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하물며 이 '불도저'의 최선에도
불구하고 설치공사는 5월말에야 완공되었으니…….
절체절명이란 군사정권의 명령도 이 같은
한계상황에서는 통할리가 없었다.
주야를 가리지 않는 이들의 작업 광경을
확인한 군사정권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명령을
백지화하고 최선을 다하길 바랐다. 안테나 건립 등의 설치공사가
완료된 것은 1962년 8월 31일. 10일간의 기기조정을 위한
시험방송 끝에 1962년 9월 10일 마침내 이송신소가
준공됐음을 만천하에 알리게 된다.
강력한 500KW전파가 우주공간을 메우기 시작하면서
제일먼저 나타난 반응은 일본의 NHK였다. KBS의 강력한 전파가
일본 도쿄지방에 있는 NHK방송의 수신 상태에 이상을 초래했다는
불만이었다. 남양송신소의 건설공사는 공기를 최대한으로 줄인
성공작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기록으로 평가된다.
권오진 엔지니어는 이로서 방송시설공사
적임자로 인정을 받게 되어 63년에는 방송관리국
시설과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그는 이 직책에 있으면서
전국 방송망의 시설책임을 맡아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시설확충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이 같은 마스터플랜을 이행하는데 있어
도심에 있는 연희송신소(지금 서교동 소재)를 외곽으로
이전하는 문제가 거론되었다. 당인리발전소 뒤에 있는 넓은 들이
택지화되고 이 나라 방송전파가 일제시대에는 이중방송으로
발사되기도 했던 연희송신소가 주택으로 쓰이게 됨에 따라
이 송신소를 부득이 이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제정세가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고 남북 간의 보이지 않는 전파전은 날이 갈수록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정부 관계부처에서는
출력 증강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이 같은 환경 속에서의 시설과장이란 위치는
바로 출력증강의 핵심이고 송신소 이전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리였다. 연희동 송신소를 외곽지역으로 이전하는 문제는
인천 근처의 소재로 확정되었고 이송신소의 출력 또한 500KW로
증강하도록 화정되었다. 권오진 엔지니어에게 다시 한 번
실력발휘를 해볼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일본 NEC의 송신기를 들여와 설치공사를
하는데 있어 그는 제작과정에서부터 직접 지휘감독을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으로써 '불도저'라는 애칭에 어울리게
이 공사를 단시일 내에 준공으로 이끌었음은 자타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1급 무선기술자 이기도 한 권오진 엔지니어는 그러한 과정에서
공보부 방송관리국 시설과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그리고 소래 송신소장과 김제 송신소장등 이른바 전파행정 관리로서의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967년부터 그는 KBS-1TV의 조정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우리나라의
텔레비전 방송에 크게 기여했다. 텔레비전 초창기였기에 예기치 못한 일이
다반사로 발생 했었으며, 당시로서는 불가사의 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사건들이 속출하기도 했었다. 어느 때던가 방송영화를 송출하는데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예기치 못한 흑점이 생겼다.
이에 대한 시청자의 항의는 빗발쳤고
상부기관의 힐책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방송기술진에
비상이 걸렸다. 먼지로 인한 것이 아닌가? 텔레비전 영화부는
영화부대로 비상이 걸렸고 그 많은 필름에서 먼지를 닦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엔지니어가 아닌 다른 부서사람들 까지도
흑점은 그야말로 크나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덕분에 모든 방송 기자재는 철저히 청소가 되었고
보관되어 있던 필름들은 모두 깨끗이 닦여졌다. 결국 권오진
엔지니어의 기술적인 노력으로 흑점은 며칠이 안가서 사라졌다.
덕분에 방송기자재는 깨끗이 손질되었고, 필름도 철저하게
손질되어 화면은 전보다도 훨씬 선명해졌다.
이는 권오진 엔지니어가 올린 개가이며 공로임에
틀림없다. 1960년대 일이니 벌서 오래된 이야기이다. 필자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일이기에 그 원인을 물어 보았다. "글쎄, 그때
그런 일이 있었나? 그놈의 흑점인가 뭔가를 없애려고 실을 이용해 보기도 한
기억이 있기는 한데 기억이 없어……." 기술에 관한한 문외한인 필자가
꼬치꼬치 물어볼 수는 없었다. 어떻든 기술적인 결함을 발견하여
개선한 것은 사실인데 아마 그 원인을 엔지니어 입장에선
밝힌다는 게 쑥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묻지는 않았다.
1945년부터 1980년까지 장장 35년간
방송엔지니어로서 방송을 천직으로 삼으며
오늘에 이르렀으니 권오진 선생은 해방 후 우리방송의
특히 기술 분야에 있어서의 산증인임에 틀림없다.
제7회 방송문화상을 수상한 바도 있는 그는
1960년 녹조소성훈장을, 그리고 1963년에는 홍조소성훈장을
수상했으며, 공보처장과 대통령의 표창장은 차라리 당연한 수상이라고
평가될 만큼 기수가 많았다. 3남 1녀를 두어 그들 모두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으니 인생으로서 할일은 다했다.
그저 건강하기만을 빈다는 말로 이글을
맺으려하였으나 권오진 엔지니어에게는 매우 큰 일이
남아 있음을 발견했다. 90세가 다된 엄친께서 아직도 일본
교토에 생존해 게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공직에 있을 때는 못 갔으나 정년 퇴직 후
최소한 1년에 한두 번씩 교토로 문안을 드리러
갔었는데 금년 11월경엔 아주 서울로 모셔올 예정이라고말한다. 이젠 권오진옹이라고 불러 마땅한 나이에 엄친이 살아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생치고 행복한 일생이 아닐 수 없다.
머지않아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다들 손자 4대가 같이 사는 집안이 될 것으로
생각하니 부럽기 한이 없다. 정원수 옆에서 사진 찍는 시아버지의
옷 매무새를 만져주는 며느리를 보고 '됐다'하면서 빙그레 웃는
권오진옹, 아니 권오진 엔지니어, 계속해서 노익장을 지키며
우리방송이 세계에서 자랑거리가 되는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장수하시기를 빈다.
남산시절 기술 간부들이 함께한 사진으로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분이 권오진님입니다. 왼쪽 부터 앞, 뒷줄 가리지 않고 차례로 윤은상,정유언 한사람건너 이종훈, 정관영, 유병은, 윤헌영, 이승균, 박능상,박수한,이인관, 김성배, 정경순, 김성열, 권오진,박경환, 이중집, 이병선님 입니다.
1991년 원로 기술인들이 소래 송신소를 방문해서 찍은 사진으로 앞줄 오른쪽 다섯번째 분이 권오진입입니다.
앞줄 오른쪽부터 장용섭님, 최당님, 박경환님, 김영진님, 권오진님,
이인관님, 임영용님, 정경순님, 왼쪽 맨 끝분 천영환님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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