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

남산 방송촌 완성의 주역 한기선님

이장춘 2010. 12. 2. 01:56

 
 

 

남산 방송촌 완성의 주역 한기선님
  

 

 1939년부터 1974년 5월까지
35년간 방송과 함께 하신 한기선님은
6.25 부산 피난방송국 시절 기술과장으로 계시면서
전쟁속의 어려움속에서 방송을 이어가면서 비상방송시설,
전후복구 등에 앞정섰고 공보실 시절과장시절 6개월건의
미국연수를 다녀와 1957년 남산에 라디오 방송국을
건립했고 1961년에는  TV방송국을 세워  남산의 
방송촌을 완성한 주역이 되셨습니다.    
 

 

 

 

 

1939년 도꾜 무선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5월  경성방송국에 입사해서 잠시 근무
하시다가 평양방송국으로 가셔서 신의주방송국 건립에
참여하셨습니다. 1943년 단파방송의 한파가 몰아칠때도
평양 방송국에 근무하셨습니다.  한기선님도 단파방송을
 들었지만 평양의 기술과장이던 한덕봉님이 사전에
 단파수신기를 분해 제거토록해서 어려운
고비를 넘기셨다고  하셨습니다.
 

 

 

 

 1944년 청주방송국을 건립에 참여해서 
이규일님과 함께 청주방송국의 개국요원이 되셨
습니다.1948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방송협회가  
공보실 방송국으로 편입되면서 서울중앙방송국
 중계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6.25를 밎으면서 전시방송국 기술과장이 되어
그 어렵던 시절 방송기술의 책임자로서 방송실시는 물론
제주, 남원방송국의 건설, 해상 이동방송의 실시 파괴된 시설복구,
대구, 대전등의 송신시설 확장, 방송국간의 새로운 링크구성 등
밤, 낮없이 어려운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 시절에 촬영된
 한기선님의 모습들이 여기, 저기서 보입니다.
 

 

 

서울로 돌아오셔서도 서울 중앙방송국의
기술과장을 하시던 님은 1956년 노창성님이 세상을
 뜨심에 시설과장 이규일님이 방송관리국장으로 승진,
 한기선님이 시설과장을 물려받았습니다.
 
중앙방송국 방송과장이던 윤길구님,
방송작가 조남사님과 함께 미국 보스턴 대학에
6개월간의 연수유학을 가신것은 바로 이무렵이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미국에서 돌아오시던중 일본에 있던 VUNC에
들려  위진록 아나운서, 연극인 김복자님, 작가
 조남사님과 함께 하신 사진입니다.
 

 

 

 

 

미국에서 6개월간  연수를 받으면서
라디오, TV방송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하고
방송스튜디오와 음악당 같은 곳을 자주 찾으면서
선진방송을 익혔고 특히  시카고에서 세계적인  음향학자
누센 씨를 만나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
음향학을 연구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셨습니다,  뒷날 
누센씨의 책을 번역 출간하기도 하셨습니다.
 
연수길에서 돌아와  방송국설치의 임무를
부여받은 님은 연수에서 얻은 모든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인 음향을 갖춘 방송국을
남산 언저리에 새워 방송실시에 도움을 줌은 물론  남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명소 관광거리를 제공했습니다.
그 시대를 사신분들은 남산방송국을 기억
하시는분들이 많습니다.
 

 

 

 1961년 7월 7일에 두번째로 공보실장에
취임한 오재경장관이 시설과 케비넽의 TV방송국
시설계획을 다시 펴들고 정부의 최우선사업으로 TV방송의
 실시를 서두르면서 이때까징도 시설과장자리를 맞고있던
 한기선님은  그 중책을 어깨에 매고 그 추운날에도,
밤, 낮 없이 일을 추진해서  그 해가 다가기전에
 TV방송을 실현시켰습니다.
 
방송국청사 시설도 중요했지만
안테나를 외국에서 들여오고 조립하고 또
남산위에 삼각철탑을 세우는 일은 어려운 일중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남산 높이는 260m밖에 안되지만
 한 겨울의 바람은 세차기만 했습니다.  75m의 철탑을 세울때
 이 세찬 강풍을 받아가며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말 못할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기선님의 지략으로 안테나는
 세워지고  방송은 계획대로 내 보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상 할 수 없는일을 해 내셨습니다. 
 
워낙 하신 일들을 알리시지 않으려는
방송 기술인들의 겸손함으로 그때의 애기들이
수면에 잘 떠 오르지 않음을 저는 항상
안타갑게 생각합니다.
 
능력있고 모든힘을 기울여 일해도
승진 할  자리가 없어 항상 과장자리에 머물던
 한기선님에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1968년 남산에
있던 중앙,  TV, 국제방송국의 KBS 세개 방송국이
 중앙방송국으로 통합되면서 부이사관 자리
5개가 새로 생겼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공보부의 기감으로 계시던
 이인관님이 중앙방송국의 기술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한기선님이 기감를 맡게 되셨습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간 우리나라 방송기술의 총책임자로서  KBS의
  전국방송망 확장,  지역민영방송사의 신설 등 급변하는
 방송환경에 효과적으로 적응하면서 방송기술
발전에 기여 하셨습니다.
 

 

 

 1970년 10월 이인관님과 자리를 바꿔
중앙방송국 기술부장으로 계시던중 1973년 KBS 공사로
새출발 하면서 라디오 제 1방송을 내 보내는 소래 송신소장을
밑으셨다가  1974년  55세의 정년을 맞으시면서 35년여의 길고 긴 세월,
  어렵고 힘든, 그리고 변화무쌍하던 시대에 오직 방송기술 하나만을 위해서
일하다가 방송국을 떠나셨습니다.  님은 그 후로도 음향관련 저서를
내시는 등 활동을 하시다가  2001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님의 재직시에 남긴 글 두편을  
올리면서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6. 25때 북한에서의 방송 

 
 1950년 10월 10일 평양을
수복하자 한국정부는 우선 방송을 하기위해
평양방송국 복구에 착수했다.  서울방송국 기술과 직원
김주용, 김영진 양씨를  UN군과 동행케 해서 평양으로
파견했다. 평양에 도착한 김주용, 김영진 양씨는
서울에서 가져온 610W 송신기를 설치하고 
300W송신전파를 발사했다.
 
송신전파를 발사한 후에는 북괴들이  파괴한
방송장비들을 재정비 하던 중 우연히  땅속에 묻은
10Kw소련제 송신기를 발견했다.  이를 수리해서
송신기능을 회복시켜 이후 40일간
평양에서 송신 했다.
 
한편 정부는 원산 함흥방송국도  복구하기
위해 정종갑, 박능상, 조동식, 그리고  스리쿼터 운전수
  허윤구씨등을 완전 무장시켜  파견했다.  원산 함흥방송국에서
 임무를 마치고 그 해 11월 19일경 신포에서 미군 LST선편으로
부산에 귀환했다.   이 동안에 선발대로 평양에  파견됐던
김주용, 김영진 양씨와 교채하기 위해 강기년씨가
홍천대위와 최학수 중사의 호위로 출발
했지만 전세가 불리하여 되돌아 왔다.
 
또한 김주용, 김영진 양씨도 송신을
중단하고 철수 했는데 그곳에서 애써준 기술자
안용금, 이관구 양씨와 같이 철수 하고  소련제
 송신기도 가져다가 미군에게 인도했다.

 

 

남산방송국 신축 

 

필자(한기선)의 설계에 있어서

제일 먼저 부닥친 어려운 고비는 좋은음의 정의

문제였습니다. 잔향시간을 주관으로 하여 음악가들의

 역사상 변천을 볼때 중세기에는 이테리 "롬"의 건축과 같은

잔향시간 3초라는 상당히 잔향시간이 긴 방안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마이크로폰"이 생긴 뒤에는 6.25때 파괴된 옛날 정동 연주실 모양으로

 잔향시간 0.4초라는 시간이 좁은 방안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이제

다시 0.8초 또는 1.2초라는 잔향시간을 가진 방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고보니 어떤것이 좋은 음인가를 정한다는

것이 또한 난문제였습니다.

 

Seashore씨의 문헌을 보면 유명한 가수를

0.1초라는 무향실에서 노래를 부르게 한 결과 보통때 음과는

아주 딴판이었고 비 예술적이었다고 합니다. 양악을 연주 할 때에는

인후가 공명상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우리나라 소리는 비 인후의 공명을

주로 응용하여 발성단다는 점이라던가 또는 서양과 같이 모음을 명료하게

 발성하는 나라의 연주실과 우리의 연주실과 동일하여서 될 것이냐

하는 점등도 문제가 되어 고전악기의 주파수 특성이라든가

우리나라 건축 생활환경등도 조사하여 보았습니다.

 

남산 기슭으로 장소가 정하여지자

먼저 소음의 조사를 하여 보았습니다. 현존하는 소음과

장래에 생길 가능성을 생각하여 준공후 연주소내 소음래밸 30-40db

이하가 되도록 차음방법을 결정하였습니다. 실내에서 음이 연속하여 발사되면

어떻게 될것입니까? 음은 물론 벽에 부딪힐 것이고 여기서 일부는 흡수 될 것이고

일부는 반사되어 실내에 남게 될 것입니다. 음은 연속하여 발사 됩으로 음의 세력은

점점 커져서 음의 성장이란 현상을 나타낼 것입니다. 음의 성장 즉 음악을 연주하는 방이

폭발하지 않는것은 음의 성장이 포화상태 또는 정상상태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소음이 실내에 침입되면 벽때문에 세력은 감소 될 것이지만

일단 실내에 침입된 소음은 실내에 잔향으로서 남아

음의 성장이란 현상을 나타내어 소음은

포화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그런고로 벽을 흡음상태로 하지 않으면

내부에서는 그리 크지 않은 소음도 실내에서는

도리어 크게 들릴런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소음의 주파수

특성을 조사한 결과 200사이클 까지의 저음이 대부분이고 주파수가

증가함에 따라 점차 김소하여 2,000-4,000 사이클에서는 200-400 사이클

음의 7할정도임을 알았습니다. 이리하여 공중 전송용의 차음을 산출하였고

고정 전송음에는 방진고무를 사용하여 방진, 방향, 완충 효과를 얻도록

계획하였습니다. 딴 얘기지만 소음에 관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회화는 아마 어떤 외국에도 지지 않으리만치

크다는 것을 느끼었습니다.

 

건물구조상 옥내에서나 옥외에서나

같은 기분과 양으로 말하는 습관 즉 방 크기에 따라

음량을 조절하는 훈련이 부족한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또한

확성기를 내걸고 레코드를 트는 습관 이런 등등의 습성을 고치지 않는한

소음때문에 노이로제가 될 것이고 이로 인하여 수면부족과 알콜중독이 되는것도

많으리라고 생가하여 보았습니다. 소음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을 생리학적인 입장에서

분석한 결과를 보면 소음을 항상 듣고있는 도회인과 노동자의 혈압상승은 끊입없이

촉진됨으로 역시 노리로제가 되고 자면, 타액 분비량이 감소되어

위장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관련글 보기

 

http://blog.daum.net/jc21th/17781681

최초의 남산 TV방송국과 송신소, 육성과 영상으로 보는 시설현장

 

 

 

 

방우회 이사 이장춘


 
 

강홍식 압록강의 뱃사공.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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