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아나운서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이를
꼽으라면 홍양보 아나운서일 것이다. 4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오직 마이크 앞을 떠나지 않았다. 홍양보 아나운서 이상으로
예외적인 인물로는 금년 75세인 강찬선 아나운서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KBS의 사회교육방송에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역은 아니다.
정년이란 올가미를 씌우지 않는 능력본위의 미국사회가
부럽기는 하지만 어떻든 V0A(Voice of America)
현역 아나운서임에는 틀림이 없다.
1916년 5월 22일생인 그는 평양이 고향이다.
홍양보씨가 방송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평양방송 아나운서로 활동하면서부터였다. 그 이후 KBS에
발을 들인 것은 1946년. 공채 아닌 특채로 아나운서가 되었다.
아나운서는 공채가 아니면 될 수가 없는데 유독 그만이
특채되었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며,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홍양보 아나운서가 특채된 것은
평양방송국의 전력이 인정되었다기보다 엄격한
심사 결과에 의한 결정이었다. 중앙방송국장 이혜구박사와
이계원, 민제호 그리고 윤길구, 이덕근등 당시 기라성 같은
대 아나운서가 현역으로 뛰고 있었으니 이분들의
엄격한 심사는 기본 절차였으며
그런 다음 내려진 특채였다.
사실 아나운서가 세속적인 말로
배경 운운 또는 금력으로 될 수 있는 전문직이
아니기에 강조하는 것이다. 홍양보 아나운서는 공채 출신이
아니라는 점과 매사에 열심이고 부지런한 게 지나쳐 동료들의
미움까지도 산적이 있다는 험담 아닌 험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오로지 일을 대하는 정열이 남달리
강해서였던 때문이고 그러기에 71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VOA현역 아나운서 자리를
지키게 한 바탕이라 하겠다.
1949년 가을의 일이었다.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축구 중계방송이 있었다.
중계 팀은 담당PD와 엔지니어 그리고 아나운서로 구성되는데
아나운서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중계방송 시간은 다가오는데
담당 아나운서는 보이지 않고 그런데 마침 담당 아닌
홍양보 아나운서가 중계석에 나타났다.
담당 PD였던 필자는 초조했다.
방송시간 1분전에 관중석 스탠드위에
그 프로그램 담당이었던 서모 아나운서의 모습이 보였으나
이미 시간은 늦었다. 온에어의 큐사인은 홍양보 아나운서에게
갈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서모 아나운서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중계석에 앉아 방송태세를 취하고 있는 홍양보 아나운서를
봐서 되돌아갔다. 그날 멋들어진 축구 중계방송은
홍양보 아나운서 덕분에 무사히 끝났다.
담당 PD였던 필자의 그때 기분은 홀가분하였다.
그러나 인기관리를 스스로 해야 하는 아나운서 세계는
달랐다. 축구 중계방송을 하는 아나운서의 인기도를 생각할 때.
끝내 해프닝이 벌어졌다. 방송을 마친 우리 중계 팀은 중계방송용
기자재를 싣고 돌아오던 길에 급기야는 고성이 오가고 육탄전이
벌어질 정도로 매우 험악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부지런한 홍양보 아나운서 덕에 사고 없이
중계방송을 마쳤으니 담당 PD였던 필자는 감사해야
마땅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뒷맛은 좋지
않았다. '스무고개'도 같이 방송했던 20대,
원기 왕성했던 42년 전의 일이다.
미주 한국일보(1991년 4월 20일 발행) 5면에는
올드타이머로 홍양보 아나운서의 부지런함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새벽 6시에 나와 하오 2시까지
방송국에서 극동쪽을 향해 소식을 전한다.
지난 60년대에 워싱턴에 온 뒤 줄곧 계속하는
그의 일과이다. 이래서 지금 워싱턴의 '올드타이머'들 가운데는
'아직도 새벽에 나가십니까?'하고 인사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하지만
새벽 출근을 위해 전날 밤 8시에 자고 새벽1시에 일어나 집에서 한국과
일본에서 보내오는 단파방송을 골고루 듣는게 아예 버릇이 되어 버렸고
그는 '그게 없으면 생명이 끝나는 것 같다'고 실토할 정도이다.
" 참으로 부진런한 방송인으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그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열심이고 부지런한 또 하나의 실증은
KBS에 아나운서라는 직책을 갖고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사실이다. 남달리 학구적이었던
그는 1970년대 일시 귀국길에도 방송관계 세미나가
있으면 자청해서 참가하기도 했었다.
김구선생님 국민장 행열
그는 학구적이고 노력 형이나 반면에 정에는
지극히 약한 일면도 갖고 있다. 호곡방송- 아나운서 계에서
호곡 아나운서로 일컬어지는 화제의 인물이기도 하다. 1949년 6월
있었던 일이다. 고 김구선생의 국민장이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거행되던 날을
을 지로에 있는 경전 2층에 진을 치고 있는 즉 중계방송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어디를 가나 또는 이동하거나 말거나 중계방송이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어느 지점에, 고정된 곳에 자리 잡아야만 중계방송이 가능했다.
국민장에 의한 고 김구선생의 운구행렬실황
중계방송을 담당한 홍양보 아나운서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말하자면 호곡방송을 한 것이다.
냉정한 가운데 침착성을 잃지 말아야할 아나운서가 호곡을 한다?
아마 우리나라 방송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 호곡방송에 대한 논란이 가시지 않았다. 아나운서도 사람인데
비통함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그 방송을 두고 감정을
살린 중계방송이었다는 호평도 없지 않았다.
김구선생님 국민장을 중계방송 했던 아나운서들
6.25전까지 평양에 있었던 강찬선 아나운서는
그 중계방송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호곡방송에 대한
시비가 있기는 하나 평양에 사는 우리 동포까지도 특히 공산치하에 있는
우리 동포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는 것은 기록에 남는
중계방송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1950년 6월 27일 낮 의정부를 국군이 탈환했다는,
전선으로부터 날아온 승전보를 받은 그는 이를 현지취재
방송하겠다며 이성수 아나운서와 함께 여의도 비행장으로
달려갔었다. 비행장에 도착해 보니 이륙할 수 있는 군용기는
한대도 없었다. 승전보에 용기 백배, 비행장까지 달려간
홍양보 아나운서와 이성수 아나운서는 맥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한강 인도교에 다다르니 헌병이 길을 막는다.
누구를 막론하고 서울 시내로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성수 아나운서는 헌병과 다투기까지 하면서 억지로 시내에
들어갔으나 마음이 여린 홍양보 아나운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퇴하는 장교의
권유에 따라 남하하였다.
남하하는 길목 대전에 이르렀을 때
정부도 대전으로 이동했고 500W에 지나지 않던
대전방송국에서 방송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유언비어에 속아 정부요인과 공무원 심지어 방송국
직원일부도 남쪽으로 도망친 일이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 대전방송국 옆에 있던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수천명이
형무소 벽을 깨고 나오려한다는 형무소 직원 식모의
제보를 받았다. 그는 참으로 암담했었다. 급보를 접하자
급히 헌병대에 연락해 헌병대가 출동하기에 이르러
그야말로 위기일발 직전에 수습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방송국 간부들은 흩어지고 책임자라곤
일개 평 아나운서인 홍양보 아나운서와 일부
기술직 직원뿐이었다 한다.
이 같은 실정을 알게 된 당시 국방부장관
(국무총리서리겸)은 메모용지에 홍양보 아나운서를
중앙방송국장에 임명한다는 발령을 내렸었다. 전시이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로 인해 유언비어에
속아 달아났다가 돌아온 계엄관(군인)과 방송국장등
간부에 의해 오히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951년 1.4후퇴 당시 홍양보 아나운서는
부산으로 피난을 간 게 아니라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아나운서로, 말하자면 징발되어 동경으로 갔다.
이때부터 KBS와 인연을 끊고 동경에서 오키나와로
옮겨 장장 18년간을 심리전 방송에 전력했다.
1951년 가을 비좁은 동경 VUNC스튜디오에서
앞으로의 전세를 백선엽장군과 공군의 김정렬장군과의
대담방송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라고 40년 전을 회고하면서
사진자료를 보내왔다. 그는 사랑하는 처와 늙은 홀어머니를 두고
혈혈단신 동경안전지대에 가 있었으나 편안치는 않았을 것이다.
"도쿄NHK 제8스튜디오에서 저녁방송을 10시 반에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기 위해 신바시 지하철 정거장에 들어서면
일본어 방송이 끝나고 우리 애국가에 이어서 유엔군
총사령부방송(재방송)이 울려 퍼지는 것이다.
전황이 유리할 때, 역전 포장마차에서
내목소리로 녹음된 뉴스를 들으며 맥주 컵을 기울일 때,
그 기분은 나만이 누리는 호사였다." VUNC 동경시절을 회상하는
글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VUNC아나운서이지만 휴직상태에 있었던
홍양보 KBS아나운서는 일본 도쿄등지에서 개최한 한.일간의 스포츠
축구올림픽예선전, 한. 일 여자 농구전, 세계 탁구선수권대회, 특히 한.일
국교정상화회담의 중계는 서울에서 파견된 중게반의 뒷바라지를
도맡다시피 했으며, 미군용 전화선을 통해 보도하도록 주선하고
때에 따라서는 직접 중계 방송까지 한 일은 부지런한 홍양보
아나운서만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68년 오키나와에서 VUNC가 해체됨에 따라
도미한 그는 1969년 VOA아나운서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VOA아나운서 생활만 22년을 해오고 있다. 비록 멀리 미국 땅에서
보내는 방송이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미국의 소리'전파를 타고
북한과 중국의 우리 교포들에게도 전해지는 것이 크나큰
보람이라 고하는 홍양보 아나운서의 근황을 미주
한국일보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7년전에 VOA미국인 과장이 홍양보 아나운서의
평가 기록에 '너무 뛰어 다녀 남들이 불안해한다.'고
적은 일이 있었는데 70대가 된 지금도 스튜디오에 갈때는 여전히
발걸음이 빠르다. 일하는 동료 10명은 모두가 '기자'라고 불리워도
자기만은 '아나운서'라는 칭호가 여전히 따라 다니고 지금도
단파라디오를 가방 속에 넣고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정통파 아나운서 홍 씨다.
1951년부터 1991년 현재가지 해외에서
우리말 방송 아나운서로 일관해 왔다는 것은 그 누가
원한다고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오직 방송을 천직으로
정진해 온 아나운서이기에 성사된 일이기도 하다.
천직을 지켜 온 그이기에 남이 누릴 수 없는
행운이 뒤따르기도 했다. 1987년 7월에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정상에 우뚝 섰으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중국 만리장성에 버티고 섰던 그는
이런 편지를 한 적이 있다.
"40여 년간 아나운서라는 한가지일,
주로 뉴스보도를 했습니다. 약반세기에 걸친 뉴스를
전하면서 언제나 아쉽고 미흡한 것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처지여서 역사가 된 그 뉴스의 현장을 가보고 싶은 욕망이 쌓여서
1975년 4월엔 소련과 동부유럽 그밖에 여러 지역을 가보았습니다.
특히 유네스코가 전 세계에 각국 어린학생들의 성금으로 이집트
나일강변에 아부실벨 신전을 나일강땜 수중에 잠기지 않게
높은 언덕위에 이전시킨 뉴스에 감동해 찾아가본 일은
행운이었습니다. 1990년 7월 30일엔 무너져 내린
베를린장벽을 찾아가 정으로 콘크리트장벽을
깨기도 했습니다."
기념사진 몇 장을 동봉해 홍양보 아나운서가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이다.
"지난 4월 일본 지바에서 남북한 단일선수단이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에 참가했을 때 VOA의 주간 스포츠뉴스에서
방송하기 위하여 남북의 감독진과 유명한 남북선수와의 인터뷰는 3.8선을
넘어온 피난민으로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한 달 반에 걸쳐 방송하는 중에
남북단일팀의 선수와 임원 그리고 재일교포들은 이미 마음의 3.8선이 무너져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형진 단장과는 두 차례에
걸쳐 약 15분간 방송했는데 대화가 끝난 직후에 있은 인터뷰에서는
남북선수 임원들 모두가 헤어지는데 대한 서운한 감정이 어조에
역력히 드러나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습니다."
비록 몸은 머나먼 미국 땅에 있지만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한결같은 소원이 담겨져 있다.
1951년부터 시작한 홍양보씨의 객지생활을 알고 있는
노 방송인 이인관씨는 항상 그의 인품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영원히 남을 아나운서인 그이의 만수무강과
행복이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문시형님
고 문시형 선생님이 방우회장 시절
1991년에 쓰신글을 당시의 방우회 사무총장
정항구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방우회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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