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단상

언론인 曉巖 이정석 선생님 삶의 발자취 더듬어

이장춘 2010. 3. 20. 21:17

 

 

 

 

 

 

 

언론인 曉巖 이정석 선생님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이글은 고 이정석 선생님의 미망인 박소현 여사로부터

추모문집을 발간을 위한 원고청탁을 받고 작성한 글로

출판사와의 약정상 전문을 올리지는 못했다기에 여기에

그 전문을 올립니다.  

 

 

 

목 차

 

 

1.이 선배와 인연

2.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다.

3.KBS 사장 직무대행시절

4.정도를 지킨 언론인

5.“그분들이 방송 영웅들이요”

6.마지막까지 글을 쓰다.

7.이 선배의 마지막 가시던 길에서 

 

 

 

1.이 선배와 인연

 

 

이정석선배는 KBS가 가장 어려움을 겪던 1990년의 소용돌이 속에서 KBS사장 직무대리를 하시던 시절에

가장 가까이 모실 수 있었기에 이 글을 쓰는데 기꺼이 수락했다.

라디오방송에서 TV방송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바뀌어가고, 방송기자가 방송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던 그때,

그리고 KBS가 국영에서 공영으로 전환을 시도하던 1971년 8월, 동아 방송의 방송뉴스부장을 하던 이정석선배가

국가공무원 부이사관 KBS보도부장으로 옮기면서 관심을 같기 시작한 이래 2008년 1월 16일 세상을 뜨시기 직전까지

깊고 넓은 인연을 맺어왔다. 선배가 떠나실 때 필자가 평소에 모은 선배의 여러 사진과 함께 추모의 글을

인터넷에 올린 것을 미망인 박소현 여사를 비롯해서 주위 분들이 보시고 그 글과 중복이 되어도 좋으니 글을

써 달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선배가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정자로 선정된 바로 그 다음날 2009년 3월 3일이다.

 

 

 

 

2.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다.

 

 

3월 3일 이 선배 “명예의 전당 헌정자” 선정소식을 전해들은 이 선배의 미망인 박소현 여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박 여사로서는 듣기에 생소한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관한 자세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비록 전화상으로의 느낌이기는

 했지만 박 여사의 그 음성과 얘기로 짐작컨대 지난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감정의 눈물을 쏟아내는 듯했다.

방송에 열정을 바치던 선배의 지난날의 모습을 생각하며 “살아 계셔서 이 영광의 명예의 전당 자리에 스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헌정식 날 울음이 쏟아 질 것 같아 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자제분들과 일가친척,

주위 분들 같이 오셔요. 3월 20일 오후 3시 방송회관에서 헌정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꼭 부탁이 있어요.

이 선배에 관한 글을 써 주세요.”전화로 주고 받은 얘기의 내용이다.

 

방송인 명예의 전당은 2001년부터 마련된 제도로 2005년까지 31분이 헌정되었고 올해 4년 만에 10분이

선정되어 무두 41분이 이 영광된 자리에 올랐다.

이 명예의 전당을 마련한 방송영상 산업진흥원이 1927년 방송 시작 이후 우리나라 방송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방송인을 선정, 그 업적과 명예를 기림으로써 방송인의 자긍심을 높이고, 인물을 통해 한국 방송사를 재조명한다는

취지에서 '방송인 사이버 명예의 전당'을 마련하고 방송계에 기여한 업적과 인품 면에서 방송인의

 사표 되실 분을 명예의 전당에 헌정함과 아울러 활동 당시의 각종 방송 자료 및 사료를 모아 온라인 공간에

전시함으로써 선배 방송인들의 업적과 노력을 길이 전하고자 해서 마련한 제도입니다. 이 명예의 전당에는 1945년

 해방정국의 중앙방송국장을 지낸 이혜구(2009년 3월 현재 생존 101세)선생님을 비롯해서 대한민국의 방송사를 빛낸

 각 분야의 인물이 올라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이고 이선배가 이 자리에 오름으로 해서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방송사를 빛낸 방송인 반열에 오른 것이다.

 

KBS사우회는(회장 김은구) 제6회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정자를 선정한다는 소식에 접하고 사우회 회원으로

계시다가 이미 고인이 된 다른 몇 분의 선배와 함께 이정석 선배를 추천했다. 방송 영상 산업 진흥원에서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쳐 2009년 3월 2일 최종적으로 헌정자로 선정되어 3월 20일 봉정식을 가졌다.

 

 

 

3.KBS 사장 직무대행시절

 

 

이 선배는 KBS사상 가장 어렵던 시절이라고 일컬어지던 때에 약 2개월간의 사장 직무대행을 했다.

1990년 KBS는 방송민주화세력과 방송을 장악하려는 세력 간의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방송사상 가장

어려운 고비를 맞게 되었다.

이 선배는 사장직무대행자로서 KBS를 바로 이끌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이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거나 안다 해도 희미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선배 생전에 필자와 그때 그 얘기 나누면서 “사람들은 그때 그 일들을 잘 몰라요.,

내가 KBS 사장 직무대행을 한 것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거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 때 그 일이 워낙 큰일이고 모두 정신이 없을 때니 그 일 자체에만 관심을 쓰고

그때 KBS사장이 없는 것은 알았어도 누가 사장으로서 KBS를 이끌고 있는지를 알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거든. 그런 일에는 아예 관심들이 없었어요. 그런데 불로그 ”춘하추동 방송얘기“에

 들어가니 그 얘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더군요!”

 

춘하추동 방송얘기란 필자의 불로그를 일컿는다.

당시의 KBS선임본부장으로 사장 직무를 대행하던 이 선배를 가장 가까이 모시던 필자는 KBS사장 면직과

선임권이 있는 KBS이사회 일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일들을 노트 120면에 걸쳐 기록 해 놓았고 그 글을 요약해서 뒷날 불로그 춘하추동 방송얘기에

 올려놓은 것을 이 선배가 본 것이다.

1980년대의 민주화 투쟁은 민주화 헌법으로 노태우정권이 탄생하고, 한꺼번에 터진 민주화 물결은

 걷잡을 수 없이 거세기만 했다.

 

민주화된 방송관련법이 제정되어 KBS이사회가 결성되고 민주인사 대열에 있던 서영훈씨가

 1989년 초 KBS사장으로 선임되었다. 나라의 질서가 민주화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서로간의 갈등이

 빚어지고 각 분야에 걸쳐 영향력이 큰 KBS는 그 갈등의 중심에 있었다.

이른바 PD사건이다, 법정수당 사건 등 이상한 일들이 때로는 부풀려서 심지어는 없는 일까지 있는 것처럼

세상에 알려지면서 KBS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커지고 갖가지 갈등이 야기 되었으며 KBS집행부 책임론이

대두되기에 이른 것은 1990년 벽두이다.

갖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해 3월 2일 KBS이사회가 열렸다.

사장과 부사장 감사 등 집행부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이사회였다.

안건은 감사, 부사장, 사장 순으로 처리되었다.

 

감사는 본인의 책임이 없다고 했지만 이사회에서는 이미 감사면직이 기정사실화 된 분위기였다.

그러나 만약 사장이 면직되면 부사장은 당연히 직무를 수행해야 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안건순서부터 부사장 면직 안이 먼저 상정되었다. 사장 면직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전제가 있어서

 부사장 면직 안이 쉽사리 처리되었다. 어떻게 보면 부사장 안건이 먼저 상정되는 것 자체가 부사장 면직이

 예고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어서 사장 면직 안이 숨을 죽이는듯 조용한 가운데 상정되었다.

사장 면직 안 역시 가결되었다.

이사들은 회의장을 빠져 나갔지만 노정팔 이사장은 사원들에게 둘러싸여 어려움을 겪었고

공사는 사장과 부사장, 감사가 모두 공백상태에서 이때부터 선임본부장이었던 이정석선배가

KBS의 어려운 국면을 해쳐나가야 했다.

모든 국민들의 시선이 KBS에 쏠리고 정부는 물론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시민단체나,

언론단체 등 모든 시선이 KBS에 집중되었다.

사원들은 방송민주화를 지킨다면서 시도 때도 없이

 사내 모임을 갖는 것은 물론 때로는 길거리로 나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전투경찰이 KBS를 점령하고, 많은 사원들이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으며,

감옥살이를 하고 면직을 당했다.

이사회는 새로운 사장을 선임하지 못하면서 막중한 일은 이정석선배가 처리해야만 했다.

그만 두려고 해도 그만 둘 수 없는 막다른 길이었다. 새로운 사장으로 서기원씨가 선임된 것은 4월 3일의 일이지만

출근길을 막아 사내에 들어오기 어려웠던 서기원 사장은 공사 밖에서 열린 이사회에 참석해서 이사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서영훈사장이 물러나고 서기원사장이 취임할 때까지 이정석사장 직무대행체제의 KBS창설이래 가장 어려운 시기였지만

한치 앞을 내다 볼 수없는 가시밭길에서 묵묵히 일을 처리해 나갔다. 이선배의 밖으로 나타나는 표현은 적지만

 마음의 중심은 확실해서 가야 할 방향으로 진행시키는 힘이 있어 KBS가 그 어렵던 시절을 슬기롭게 넘겼다.

 

 

 

4.정도를 지킨 언론인

 

 

“1960년대 내가 방송행정을 맡고 있을 때 나를 가장 괴롭힌 이가 이정석이었지요.

이정석 때문에 내가 당시의 장관에게 여러 번 혼이 났었어요.”

 

이 선배가 1960년대 중, 후반 동아 방송에서 정치부, 사회부, 방송뉴스부장으로 한참 활동하고 있을 때

 방송관리국에서 지도계장을 지냈던 또 다른 선배로부터 여러 번 들은 말이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바른 보도 태도로

정부를 그만큼 어렵게 했음을 말 해 주는 것이다. 동아 방송이 보도방송에 중점을 두었던 그 시절의 날카로웠던

동아 방송의 보도는 그 중심에 이 선배가 있었다. 앵무새사건이나 자유언론 실천운동등도 그 무렵에 일어났고 또

그 무렵부터 싹튼 일이다. 바른 보도에 영향을 미치려는 외부의 말과 행동에는 아예 귀를 막아 버리는 그의 성품 때문에

정도가 아니고서는 말이 통하지 안했다. 그런 성품으로 동아방송국 최창봉국장으로 부터 신임을 받았고 1971년

최창봉국장이 KBS중앙방송국장으로 옮기면서 중앙방송국으로 옮겨 보도방송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KBS안에서 더 큰

승진도 할 수 있었던 이선배가 도미 유학을 택한 대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5.“그분들이 방송 영웅들이요”

 

 

위 말은 목숨 바쳐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들을 가르쳐 이선배가 한 말이다.

일제 강점기말 국내 민족 신문들이 폐간되고 외부 방송도 들을 수 없어 암흑세계가 되었을 때 방송인들이 미국,

중국등지의 해외로부터 단파방송을 듣고 그 내용을 국내 독립지사 등에게 전함으로서 국내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일은 1942년 12월 24일 경찰에 발각되어 1943년 한 해 동안 방송계는 말이나 글로 표현 할 수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300여명이 경찰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 조사를 받고 그런 과정에서 6명이 옥사했으며 75명이

형을 언도받은 일제 말기의 최대 지하 항일운동을 일컬어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이라고 한다.

원래는 단파방송사건이라고 하던 것을 1980년대 말 학자들이 이 운동은 일본인들 입장에서 단파방송이라고

부르던 것이지 우리입장에서는 당연히 독립운동이라는 점을 되새겨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이라고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정석 선배는 이 말 앞에 다시 항일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방송사에 길이 빛나는 일이고 일제 강점기에 목숨을 바치면서 행한 독립운동에 당연히 항일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단법인 한국방송동우회(방우회)에 전해졌고 방우회에서는

이 운동을 이선배가 제안한대로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선배는 방송사와 아울러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에 관심이 많았지만 이 일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이 일을 세상 사람들에게 더 알려야 합니다.”

1년에 한 번식 열리는 항일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 기념행사가 있지요.

이번 행사내용을 방송기자협회에도 연락하시오. 거기에 얘기 해 놓았으니 협호보 지면을 할애 해줄 겁니다.“

곧 이어 기자협회보 편집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메일로 그 내용을 보내달라는 것이고 그 내용은 기자협회보에 실렸다.

“그런 애국지사들이 있었기에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고 일제강점기의 방송이 우리방송으로

인정되어 80년 방송사가 이어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 밖이었던 이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에 유난히도 관심을 기울이던 이 선배였다.

그리고 제6회 명예의 전당 헌정식에는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을 체계화한 유병은 선생님과 함께 헌정자로 선정되었다.

  

 

6.마지막까지 글을 쓰다.

 

 

“이장춘씨 오라뉴스에 가 봐요.”

어느 날 아침 7시나 됐을까? 전화벨이 울리고 이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뉴스에 가면 내 글이 있어요.

참고가 될 런지 모르겠어요.“

전화통을 놓으면서 오라뉴스를 찾았다.

-0-0-0-0-0-0-

연로하신 이 선배가 컴퓨터를 사용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필자에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메일을 보내면서 왜 나에게는 안 보내느냐고 하셨다.

그때야 알았다. 이 선배가 컴퓨터에 접하고 있는 것을....

이메일 주소를 알고 메일을 보내 드렸다. 이 선배에게서 자주 전화가 걸려오고 메일에 접한 소감을 얘기 해 주었다.

그러면서 오라뉴스 얘기를 한 것이다.

오라 뉴스의 대표 고문이던 이 선배는 인터넷을 이용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사이트에 접속하면서 저널리스트로서

폭 넓은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토대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때 감명 깊었던 글 오라뉴스 글 한편을 인용한다.

 

 

오라칼럼

 

 

영국 런던의 교통의 요충지 패딩톤(Paddington) 지하철역 근처 3층 목재 건물에 이색적인 클럽이 있다.

이름은 ‘일선 기자 클럽(frontline club)’. 세게 분쟁지를 뛰어다닌 직업 저널리스트들의 모임이다. Home page (www.frontlineclub.com)에 들어가 보면 역사가 나온다. 루마니아 혁명 때 영국에

 ‘frontline TV’라는 뉴스 비디오 공급 회사가 있었다. 혁명의 현장 뉴스를 취재해 세계의 TV 회사에 공급했다.

생생한 현장 소식이어서 인기가 있었다. 그 후 재정적 이유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frontline TV의 카메라맨 생존자

 동지들이 club을 설립했다. 루마니아 혁명이 쵸세스크의 비참한 최후로 이르는 사건이며 공산권 붕괴와 시기를 같이 한다

. 클럽 역사는 20년도 채 안 된다. 클럽 사업은 정기적인 토론회(forum)의 개최. 토론회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현존 세계 분쟁지역에서 돌아온 특파원들, 전문가의 사태 분석과 정보 교환의 장(塲). 기본적으로 보도 (journalism)의

문제점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최근에 열린 forum의 주제는: “외신 보도의 진실(the truth about Foreign News)”

영국 신문 외신 부장들의 원탁 회의. Webcast로 생방송 되었다. 고급 식당도 운영하고 있다.

 

수익금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 목숨 건 저널리스트, 카메라맨, 사진 기자의 뒷바라지”.

한 마디로 club의 목적은 ‘먹고, 마시고, 생각하는 언론인의 집’이라고 돼 있다. Club 건물에는 상설

사진 전시장이 운영되고 있는데 지금은 전설적인 사진 작가 Robert Copa등의 ‘저항’을 테마로

한 명작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저널리스트 나 cameramen 지망생 상대 교육 사업도 활발하다.

최근 HP의 광고에는 ‘전선(前線)방송 비디오 교육’이 나와 있다. 수강료 받는 유료 직업 교육이다.

 

‘frontline club’ HP에 들어가면 생생한 여러 스타 기자들 분쟁지 취재의 비화를 읽을 수 있다.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취재한 이름난 기자에 관한 ‘추모의 글’도 있다. 그 중의 하나 The Times의 Danny McGrory (1952-2007)에 관한 ‘추모의 글’

에서는 고인의 대담하고 철저한 직업 언론인의 기자 정신이 소개 되었다. 이라크의 바스라 지역에서

영국군을 종군하던 중 그가 탄 차량이 적군의 집중 사격을 받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쿠웨이트의 안전 지대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본사 데스크의 소환이 싫었던지 ‘내가 겪은 위험 사항을 본사에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동료들에게 심신 당부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 정예 부대인 해병대의 기갑 부대와 함께

 장갑차를 타고 종군한 Anthony Loyd 기자(자유기고가)의 생생한 장갑차 안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 묘사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실감이 난다.

 

영국 여성 특파원의 중국 취재 체험 기사도 중국 취재를 이해하는데 유익한 정보였으며

특히 Patrick Cockburn(자유기고가)의 이라크 전쟁 취재 경험을 엮은 기사-- ‘지옥으로 가는 길’ (heading for abyss)은

지금 이라크 전쟁의 특수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교훈적 내용이다. 부분적이지만 그의 체험과 목격담은 다음과 같다.

 

“바그다드 시내에서의 이동 시 모든 것이 잠재적 위협이다. 나의 수니족 운전 기사는 가능한 대로 큰 길을 피해

사행(蛇行)하곤 했다. 왜냐하면 다음 검문소가 누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라크 군인인지, 경찰인지,

 외국 기자를 납치해 죽이려는 무장 세력인지, 늘 긴장 속에 이동해야 했다. 차 안에서 나는 외국인이 아닌 것처럼

 보이려고 아랍 문자 신문을 펴 들어 읽는 척 하곤 했다.” “나는 미행할지 모르는 테러 집단이 있을지도 몰라 또 한대의

 승용차를 대절, 뒤 딸아 오게 하곤 했다. 2호 차의 운전 기사도 수니족 이며 내가 타고 있는 앞차가 수상한 자에게

미행 당하고 있는지 무전으로 보고토록 했다. “바그다드를 흐르는 티그리스강에는 종파간의 싸움으로 아침마다

목 잘린 시체들이 내다 버려지고 있고 시내 쓰레기통과 밭에는 고문 받고 죽은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다는

 끔찍한 말을 들었다.” 티그리스강 유역 바그다드에 구약 전서에 나오는 ‘에덴 동산’이 있다고 하지만 바그다드는

지금 ‘지옥’으로 변하고 있는 슬픈 현실을 Cockburn기자는 개탄 한다. 그의 증언 중

 놀라운 사실은 지금 이라크 에서 한달 마다 3000명의 민간인이 종파 싸움으로 죽고 있다는 UN 발표를

근거 해서라도 이 사망자 수는 그가 취재했던 북 아일랜드 카톨릭 과 신교의 40년에 걸친 살상 결과 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지적 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문물에 폭넓게 접한 이 선배는 광범위한 지식의 소유자이고 저널리스트였다.

세상을 다 하기 직전까지 글을 써서 신문, 잡지, 인터넷 등에 투고했다.

 

 

 

 

7.이 선배의 마지막 가시던 길에서

 

 

이선배로부터 어느 날 깜짝 놀랄 건강에 관한 얘기를 직접 들었다.

“언제 부터인가 코피가 자주 나더니 며칠 전에는 그 코피가 그칠 줄 모르고 나면서 현기증 일어나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때 필자가 표현은 안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떤 경우에도 어려움을 표현한 적이 없던 이 선배가 오죽했으면 건강상의 어려움을 얘기 했을까? 그러나 그때도 표정은 담담하기 만했다. 그리고 며칠이지나 1춸 17일 새벽 한시 이 선배가 세상을 뜨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갑자기, 너무나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남모르는 고민과 괴로움이 수많이 싸였을지라도 표정으로 나타내지 않는 선배는 어떤 괴로움도 드러낸 적이 없었건만 내면으로는 여러 어려움이 있으셨으리라. 이 선배는 전날의 KBS 보도기자 출신 모임인 여맥회 총회에도 참석 하셨고 돌아가시던 날, 방송원로 최창봉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이 점심식사도 같이 하셨다는데 저녁 7시가 되어 이상한 느낌이 들어 구급차를 불렀지만 구급차가 오기도 전에 세상을 뜨셨다고 했다.

늘 정겹던 그 모습을 비롯한 지난날의 여러 추억이 한꺼번에 스쳐가면서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때 그 심정을 써서 인터넷에 올리면서 하룻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이틀 후 그 어둡고 서툴던 새벽길을 해매며 이 선배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내 인생살이 처음으로 화장터라는 곳을 들렸다. 수원 화장터! 그곳에서 가족들이 얼싸안고 울부짖는 가운데 전라북도 임실에 있는 호국원을 향해서 떠나시는 모습을 보았다.

날이 밝기도전 새벽 6시에 서울을 떠나 아침 9시 반에 우리와 마주 하실 수는 없지만 또 다른 행복한 세상을 향해서 떠나셨다.

참전 유공자이기도 하셨던 님은 임실에 새로 조성된 국립묘지 임실 호국원으로 가신 것이다.

 

1954년 조선일보사에 발을 들여 놓으신 이래 54년이란 길고 긴 세월! 글을 쓰시고 말씀을 하시면서 살아 오셨다. 신문사를 거쳐 방송국을 떠나신 뒤에도 하신일은 많다.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방송위원회 방송위원, 관훈클럽 신영 연구기금 감사, 한국방송개발원 이사장, KBS시청자 위원장, 모든 언론인의 모임인 대한 언론인회 회장, KBS사우회의 시청자 위원 추천 위원장, 오라뉴스 대표 고문 등 하신 일들이 많았다.

바쁘셔도 서둘지 않고, 어떤 역경에도 굽힘없이 스스로 갈 길을 가셨던 이 정석 선배! 구수한 목소리, 웃음 지으시면서 유머 섞어 말씀하시는 그 모습이 지금 이 순간에도 아른거린다. 자주, 자주 들려오던 전화 목소리가 지금도 들려 올 것만 같다. 길고 긴 특파원시절에 해외로부터 날이면 날마다 들려오던 이 선배의 리포트 음성이 아직도 들려오는 것 만 같다. 

.

 

 

 

다음은 이정석 회장님 빈소에서 최정기 국장으로 부터

 

회보등에 싫어 주엇으면 해서 전해 받은 글입니다.  

 

 

홀연히 떠난 님을 회고 하며

 

 

학처럼 선비처럼 고고하게 살다가신 님이시여

 

어떤 억울함과 분노에도 "허- 허-".

 

호탕한 웃음으로 넘겨가신 님이시여

 

많은사람이 추구하는 부와 명예, 권력에도

 

비껴 서 계셨던 님이시여

 

영락에서 행복을 누리소서

 

 

공정을 지키며 살았던 님이시여,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신 님이시여

 

불의와 타협을 마다하며 살아오신 님이시여

 

꼿꼿한 저녈리스트로 외길을 가신 님이시여

 

공과 사가 너무 분명하여 측근이 없이 사신 님이시여

 

배푼만큼 받지 못하고 떠나가신 님이시여.

 

청빈의 삶을 실천하신 님이시여

 

 

이제 보두 접으시고 편안히 영면 하소서

 

 

ㅡ2008.  1  17  오전에ㅡ

 

 

어제 밤 돌아가닌  이정석님을 회고하며

올림픽방송 본부장으로 모셨던 최정기 올림

 

 

 

다음은 필자가 밤 12시가 넘어

박재헌 기자로부터부음을 듣고 메일로

 KBS사우회 회원님들에게 전한 

내용입니다.  

 

 

 

 

이정석 원로 회원님이 세상을 떠나심에 얼마전까지도 호탕한 웃음을 지으시던 이정석원로 회원님이 세상을

떠나셨답니다. 1월 17일이 시작되면서 한시가 갓넘어 님의 부음소식이 날아 들었습니다. 건강에 종종 걱정스러운

 부문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70대 후반의 님이그처럼 갑자기 세상을 떠나실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몇일전까지 날이면 날마다 제 불로그에 들어오셔서 글을 읽으시고 강평을 해주시고 어느 회원님의

정성드린 시를 올리자 그 시에 감명 받으셨다면서 덕담삼아 노밸 문학상감이라고 하시던 일, 저보다 먼저

전화를 걸어 신년인사를 하시던 일이 엊그제인데 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니 밑기지 않지만

현실은 현실이어서 컴퓨터 앞에 앉아 몇자 두들겨 봅니다.

 

저는 1990년 KBS민주화의 길목에서 그 어렵던 시절에 공석이 된

KBS사장 직무를 수행하던 님을 보좌해서 일을 보시던 생각이며, 1972년 어느날 38세의 동아방송

뉴스라디오부장이시던 님이 별정직 부이사관급이던 KBS보도부장으로 오시면서 화재가 되던 생각,

공사가 될때 보도국장을 하시던 님이 또 런던특파원, 주미, 주일 특파원 등을 하시면서 들려주시던 뉴스음성,

대한 언론인회장을 하시던 얘기, KBS방송심의 위원장을 하시던일, KBS사우회에서 추천하는

시청자위원추천 위원장을 하던 일 등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님이 쓰신

그 많은 글중에서 몇편이라도 골라 제 불로그에 올려 보려고 사진도 모아 놓았는데 미쳐

그러기도 전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지난날 활동 하시던 그 모습들이 담긴

 그 사진들을 여기에  올려 봅니다.

 

이정석(李貞錫) 회원님은 조선일보 정치부기자 동아일보 방송뉴스부장을 하시다가

 1972년 KBS에 오셔서 보도 책임을 맡으셨고, 공사직후 KBS런던특파원, KBS 미주총국장 KBS워싱턴

특파원을 거쳐 KBS올림픽방송 본부장 KBS 기조실장(본부장) 을 하셨습니다. 기획조정실장 시절 KBS사장

공석상태가 장기화되어 사장직무대행을 하셨고 퇴직후에는 대한언론인회 회장을 거쳐

오라뉴스 대표고문으로 계십니다.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모잘트의 리퀘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