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단상

KBS 한국 방송공사창립 그때 그 얘기

이장춘 2010. 10. 29. 03:20

 

 

 

 

KBS 한국 방송공사창립 그때 그 얘기

 

 

KBS가 공사가 되어 공영방송으로  

발족한지 3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973년  

1월 공사발족을 위해 구성된 8명의 실무반원의  

한 사람으로, 또 공사 기획관리실이 발족던 1973년

8월 첫 차장으로 공사발족에 일조했던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공사발족 때의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1948년 10월 이 나라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영방송이 된 KBS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방송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국영방송으로서는 한계에 이르렀다.

정부조직법에 따른 직제에, 정부가 편성한 예산으로,

공무원신분을 갖는 방송인들이 방송을 해야 되는

 국영방송으로는 더 이상 급변하는 방송환경에

적응 할 수가 없었다.

 

방송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에게

방송수당이나 연구수당을 지급하고 일반직

공무원을 별정직으로 전환해서 융통성을 보이는 등

방편을 강구했지만 그것은 지엽말단적인 대책에 불과했다.

어떻게든 방송을 정부가 관장해야 된다는 일부 관리들은 방송기구만을

확대한 방송 청을 설립해야 된다는 논의도 있었지만 방송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당치 않는 일이고 당시 세계 공영방송의 표본이었던 일본 NHK나

 영국 BBC를 모델로 한 공영방송 제도를 도입해야 된다는 논의가

한창일 때 1971년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면서 윤주영 문화공보보장관이 취임했다.

 

 

님의 꿈은 이 땅에 공영방송을 실현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인사를 단행했다.

일반직 국가 공무원이던 중앙방송국장을 별정직 1급으로

바꾸어 동아 방송국장 재직 중이던 최창봉을 영입해서

일생동안 방송과 함께 한 노정팔을 방송관리국장과

함께 KBS의 공사화를 추진하도록 했다.  두 분은

이 나라 방송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후 1971년 9월 29일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은 국회 문공 위원회에서

KBS공영화를 검토 중이라고 했다. 그의 구상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로부터 1년여 세월이 흐르는 동안 논의를 거치면서

공영방송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고 1972년 10월 유신이라고 불리는

대 격변기에  국회는 해산되고 비상  국무회의에서 법률을

 제정하던 시대가 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만 있으면

법률이 국무회의를 거쳐 시행되던 때다

 

 

국무회의에 상정된 한국방송공사법은

 

 1972년 12월 30일자로 공포되었다.

 

 

그로부터 한국방송공사법시행령과

정관을 준비하면서 방송공사 설립을 위한

실무 작업에 들어갔다. KBS 유 일봉 기획 조사실장과

 민 두식 서무과장을 반장으로 8명의 실무반이 편성 된 것은

1973년 1월 10일경이었다. 시행령이나 정관은 윗선에서 마련하고

 있었고 실무 반은 공사 창립과 동시에 시행될 기본규정과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었다.

 

 

필자에게는 본사의 라디오 방송 예산과

 16개 전 지역 국의 예산을 새로 편성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복식회계에 따른 한국방송공사

첫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었다. 본연의 방송업무는 그대로 수행하고

 또 한국방송공사 창립 기념 논문 (심야방송의 효과적인 편성방안-

우수상-)을 쓰면서 실무 반에서 맡은 업무를

밤낮없이 수행해야 했다.

 

서투른 예산편성을 남상혁 회계사의

친절한 지도로 컴퓨터가 없던 시절 주판 알 튕기며

20여일 만에 끝내고 그 예산안에 책임을 진다는 사인을 하면서

실무 반 업무를 마무리 지었다. 이로서 필자는 한국방송공사

설립을 위한 첫 예산을 편성했다는 영광을 안았다.

 

 

 

2월 21일 홍경모 문화공보보 차관이

 초대 한국방송공사 사장으로 임명되고 최창봉

중앙방송국장이 부사장, 노정팔 방송관리국장이 감사로

임명되었다. 이밖에 조돈준, 이인관, 강찬선이 각각

이사로 임명되어 임원진이 갖추어 졌다.

 

실무반이 활동하고 있을때 공사법 시행령이

 공포되고 정관은 이사회를 거쳐 2월 24일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공사 창립 일을 3월 1일로 하자는 의견이

 많이 있었지만 3월 3일로 하기로  결정되어  역사적인

한국방송공사 창립행사가 있었다.  자본금 100억

인원 2,130명,  17개 방송국과  72개 라디오,

 TV 송, 중계소를 거느린 한국방송공사가

출범한 것이다.

 

 

공사창립 실무 반에서 마련한 규정이나

예산은 이사회를 거쳐 문화공보부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모든 것이 속전속결로 진행되어 공사 직제가

정부의 승인을 받은 것은 3월 9일의 일이고 그때부터

 공사 직원 인사 발령이 이루어졌다.

 

직제는 본사의 업무를 방송총국

기술총국, 경영총국으로 나누고 연수소를

따로 두었다. 다섯분의 이사중 홍경모 사장을

제외한 네 분에게 업무를 배정했다.

 

방송총국장 최창봉 부사장 겸직

 

기술총국장 이인관 이사

 

경영총국장 조돈준 이사

 

연수소장 강찬선 이사로 보직이 부여되었다.

  

이어서 차장급 간부발령이 끝난 것은

 3월 말까지였고 일반 직원들까지 모두 발령이

끝난 것은 4월 20일 경이었다. 처음에는 사무관급 이상

 간부들 중 공무원으로 남기를 희망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홍경모사장이 취임하면서 모두 함께 일 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피력하면서 방송국을

 떠나신 분들은 많지 않았다.

 

 

새로 부여된 개인별 공사 직급은

공무원 직급을 기준으로 해서 이루어 졌는데

본사의 경우 국장은 부이사관과 서기관 중에서 임명하되

부이사관 출신은 1급 갑 서기관 출신은 1급 을이 부여되었다.

부장은 서기관이나 사무관 중에서 임명되었고 서기관은 2급 갑,

사무관은 2급 갑과 대부분 2급을 직급이 부여되었다.

 

차장은 사무관 출신과 고참 주사 (4급갑 상당)

출신중에서 보직이 주어 졌는데 사무관출신은 2급을

주사 출신은 3급이 부여 되었다. 지역국은 부산만 부이사관

출신으로1급 갑이 주어졌고 나머지 7개 갑지국은

모두 서기관출신으로 2급 갑이 부여 됐다.

 

갑지국 부장은 고참 주사출신으로

3급이 주어졌고 을지 국장은 사무관 출신으로

2급 을의 직급이 부여 됐다. 이렇게 해서 3월 말까지

간부 발령이모두 끝났고 4월부터는 일반 사원 발령이 있었는데

부서가 존속 하는 곳은 현직 발령을 원칙으로 했고 직급은

 대부분 한 등급씩 올려서 부여 했으나 공사전의

직급을 그대로 이어 받으신 분도 있었다.

 

 

필자는 4월 1일자로 수원 징수사무소장

(차장급)으로 갔다가 4개월이 지난 1973년 8월

사장직속 기획관리실이 신설되면서 관리부 차장을

 맡아 법령, 사규, 정원, 지역방송국, 계열사,

그리고 이사회 업무를 담당했다.

 

공사체제 하에서 방송을 효율적으로

수행 할 수 있도록 제도의 틀을 짜 나가야 했다.

 직제, 정원, 인사, 회계, 취업규칙, 제작비 지급 관리,

도 단위 방송체제 구축 등 모든 것이 새롭게 접하는

분야들이고 각 분야의 의견들이 상충되는 경우가 많아

공사의 제도를 단 시일 내에 체계화 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지만 밤, 낮 없이 새로운

제도를 마련 해 나갔다.

 

전 지역 방송국이나 송 중계소까지

 현장조사가 이루어 져야 했고 각 부서의 의견이

수렴되어야 해서 여러 위원회가 구성되고 또 수시로 부서장

회의가 열렸다. 어느 부서장은 공사가 관리부 때문에 있는 것이냐?

불평도 있었지만 대체로 협조는 잘 이루어졌다.

 

 

부서별 정원을 책정하는 일이나

 제작비 지급규정을 새로 제정하던 일,

 도 단위 방송 체제 구축이나 중계소 방송을

현실화 하는 일, 취업규칙이나 여비규정을 새로

만드는 일등 어려웠던 일들이 많았다.

 

기억을 더듬어 하나의 실 얘를 들어본다.

 

 

 

국영방송 시절 제작비 지급은

 출연자를 급별로 분류하고 예산 범위 내에서

출연료를 책정 지급했지만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필자는 10년간 방송 현업을 하면서 제작비와

출장여비, 업무추진비 등 현실과 괴리된

 여러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국영방송 시절에는 그 어려움을

주로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서 해결 해 나갔다.

그러나 공사 체제에서는 달라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제작비 지급규정을 합리적인 방향으로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마련 해 나갔다.

 

행정을 담당 하던 분 가운데는

너무 파격적이라고 하는 분도 계셨지만

최창봉 부사장님께서 관리부 안에 기꺼이 동의 해

주셨고 현업 쪽에서는 관리부 안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남은

문제가 있었다, 특집 제작이나 틀별 인사를

초청 하는 등 특수한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 해결이 어려워 이사회에서

 설명 했더니 홍경모 사장님께서 그럴 때는

사장 별도결재를 맡아서 하도록 제안 하시어 그대로

 의결되었다. 그 뒤에 그 조항의 남발로 행정 쪽에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제도상 공사의 틀이 잡혀가던

1974년 2월 인사규정을 개정하면서 마지막

진통이 있었다. 58세로 되어있던 차장급 이상의

 간부정년을 55세로 하고 55세로 되어있던

일반직원들의 정년을 53세로

낮추는 것이었다.

 

실무선에서는 잘 모르는 일이었지만

이사들 가운데 이 내용이 논의되고 있었다.

소문이 퍼지면서 나이 든 직원들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었다. 공사발족 때 간부들이 공무원으로 남기를 원했던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혹시라도 이런 경우가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공사창립 1년도 안되어 이러한 결과가 왔다며

 한숨짓는 간부들도 있었다. (공무원시절 사무관급

 이상의 정년은 60세였음)

 

2월 10일경 이사회에서

인사규정을 최종 의결 하던 날 이 안이

비밀표결에 부쳐졌다. 결과는 4:1로 가결되었다.

이사회 안건이 비밀표결에 부쳐진 것은

공사창립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2월 20일경 지역방송국장과

 방송부장 본사 부장급 이상의 합동

연석회의가 본사 스카이라운지 회의실에서

열렸다. 새해도 되고 해서 열린 회의였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어둡기만 했다.

 

3월 1일자로 인사규정이 시행되면

옷을 벗어야 하는 사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지방방송국장은 회의 도중 발언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평생직장을 이렇게 끝내야 하느냐고”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공사 창립 1년을 맞아 3월

1일자 대폭적인 인사 발령이 있었다.

 

이 인사에서 3급이던 지역 방송부장이

 모두 2급 을의 직급을 받는 등 균형을 잃은

인사발령이라는 비평 속에 이때의 인사로

인해서 전 직원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차장급 이상 전 전 임직원이

 제 1 연주실에 모였고 이 자리에서

 홍경모 사장은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는 다는

 전제하에 격의 없는 얘기를 해 보자고 했지만 이 일이

있고난 뒤에도 불만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그때 직언을

간부는 눈총을 받으며 결국 뒷날 어려움을 당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공사의 틀이 잡혀 갈 무렵의

 마지막 진통이었다.

 

공사창립 1년이 지나면서

공사의 틀은 잡혀갔고 각종 사규도 대충

마무리되어 사규집 발간작업에 들어갔다.

3개월간에 걸쳐 인쇄를 마친 한국방송공사

첫 사규 집은 그해 6월 말까지

사내에 배포되었다.

 

공사 창립당시 어렵던 일을

 어렵다 하지 않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밤을 새우며 업무 처리에 열중했던 그때 관리부의

구성원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며 공사의 틀을 마련해서

 사규집이라는 문서 책자에 담아 공사 업무처리의

기본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 자랑스러움을

그때 고생했던 관리부원들과 함께

영원히 간직코자 한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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