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단상

방송민주화의 진통과 1990년 ( 1 )

이장춘 2010. 11. 25. 03:04

 

 

 

방송민주화의 진통과 1990년 ( 1 )

 

1990년 그때 그 일은 아직도

우리 머리 속에 생생 합니다. 그 일은 우리

방송사에서 지워 질 수 없는 일이지요. 1990년의

일은 그 일 자체도 중요 하지만 1987년부터 불어 닥친

민주화 열풍 속에서 방송이 민주화로 가는 과정의

 진통이었다고 저는 생각 해 왔습니다.

 

그 전후 사정과 밑바탕에 흐르는

 기류를 저 버리고 1990년의 방송인들의 항거를

 얘기하는 것은 1990년의 본질을 흐트러 뜨릴 수 있으므로

일련의 진행과정을 하나의 문제로 엮어 얘기 하고자 합니다.

이 문제를 얘기함에 있어서 그 입장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압니다.  사실에 입각해서 얘기 하려 하고

또 사진도 이해가 엇갈릴 수 있는 장면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저는 당시 KBS이사회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상황들을 노트에 100면 넘게

 기록 해 놓았습니다. 지금 보니 많은 양입니다. 간추려서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누군가는 이 기록을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때

제 기록을 바탕으로 써 보려 합니다.    저는 당시 공사의 간부로서

노동 조합원도 아니었고 또 이사회 일를 담당하고 있던 사람으로

 어느 한 쪽에 치우칠 입장도 아닌 한 사람의 사원 이었

습니다. 의견이 다양 할 수 있으므로 좋은 의견

 제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1973년 방송이 국영방송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방송적인 측면에서

 보면 법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정부의 뜻에 따라

운영되는 태두리에서 벗어나 질 못했습니다. 자율권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부의 뜻에 따라 임명된 경영진이 공사를 운영하는 것이고

예산과 결산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주요사업계획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정관이나 직제, 인사규정, 정원등 주요규정 역시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문화공보부 장관은

KBS에 대한 지휘감독권과 검사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회계는 정부 투자 기관 예산 회계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정부의 뜻에 따라 운영 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방송내용은 언론기본법에 의한

지침에 의해서 수행 되었습니다. 유신시절과 5공 6공을

거치면서 땡전 이라는 말이 상징적으로 말 해 주듯이 권력자와

 정부의 뜻에 맞추어 방송을 하다보니 극심한 저항에 부딪

쳤습니다. 이 나라 민주화는 언론민주화, 방송

민주화와 직결 되는 것이었습니다.

 

1987년 6월 29일 6.29선언은

그 신호탄이었습니다. 불어 닥치는 민주화 열망은

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론 기본법은 폐지되고

민주적인 방송법이 제정되고 한국방송공사법이

민주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방송위원회 위원을 대통령이

임명 하기는 하지만 국회와 대법원이 추천한

8명을 포함해서 12명을 임명하게 되었고 방송위원회가

 KBS이사 12명을 선임 대통령에게 제청하고 대통령이 임명 하지만

임명은 형식적인 요건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법률이 시행되던 초창기에

 이 나라 방송은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경영진이

선임되고 방송이나 경영 모두 정부 간섭에서 벗어나

 민주적으로 운영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1988년 7월 KBS 1기 민선 이사들과 함께

국민을 대표한 이사회의 상징으로 민선이사라고합니다.

KBS이사회가 처음 구성된 것은 1988년 10월 26일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구성된 이사회는 민선이사회라고 하면서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출범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분들이

 “민선 이사회”라고 하시기에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차츰 그 뜻을 알았습니다.

첫 이사회에서 노정팔님을 이사장으로 선출 했습니다.

12분 다 덕망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초대 이사장 노정팔 님,

 11월 1일 이사회에서 처음으로 사장을 선발했습니다.

 

모든 이사님들이 두 분 이내의

사장 후보를 쓰시고 이것을 모아 투표를 통해서

두 분의 후보를 선정한 다음 결선 투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선발 되신 분이 바로 서영훈님 이었습니다.  대통령에게

제청되자 이의 없이 바로 결재가 나서 11월 4일

사장 취임을 하게 되셨습니다.

 

 이사회와 서영훈 사장님은

국민의 의사에 따른 민주적인 방송을

해 보시려고 했습니다. 민주화의 열풍에 휩쓸려

 새로운 제도가 시행 될 수 밖에 없어 관리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 하게 되었지만

그대로 가만히 있을 관리들이

아니었습니다.

 

방송지배에 길 들여온 관리들이

공사 운영의 모든 것이 못 마땅해 했을 것입니다.

이러는 중에 1989년 1년 동안에 많은 일 들이 있었습니다.

정부의 승인을 받던 예산,결산, 직제, 회계규정, 인사규정, 정원 등

 경영관련 사안들이 이사회의 의결로 종결 되었습니다. 방송은

자체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 졌습니다. 금기 사항이던

여러 가지 사안들이 전파를 탔습니다.

 

그 때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떠 올랐던

 “광주는 말 한다” 가 진통 끝에 다소의 수정을 거쳐

방송 되었습니다. 방송을 할 수 없다고 하시던 서영훈 사장님이

해외출장을 가 계시던 사이에 이 프로그램이 방송 되었습니다.

이를 기회로 삼으려는 세력이 있을 법 한 일 이었습니다.

 

저는 방송공사의 이런 일련사안에

제동을 걸려는 초기의 시도가 PD 뇌물 사건이라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벌어진 법정수당 사건

이었습니다. 이때  KBS사원들에게는 시간외 수당이나 공휴일수당

 위험수당 등 법률로 정해진 수당이 지급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법정수당을 제대로 지급하자면 250억원이 되는 것이었지만 이것을

부장급 이상 사원의 경우는 유보하고  일반사원들의 경우 해당액의

 60%에서  80%범위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계산해서 1989년

 예산에 일단 116억원을 예비비로 책정한 것이었습니다.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이 문제에 관한

매듭을 지어야 했고 노. 사간의 협상을 벌려

합의를 보았습니다. 합의 내용인즉 귀성비 15만원을

전 사원에게 일률적으로 지급하고 1인당 60시간 범위 내에서

 전 사원을 대상으로 법정 수당을 지급 하기로 해서 1989년

12월말과 1990년 1월 5일 2차에 걸쳐 지급되었습니다.

 

이때 노동조합에서는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조합원들로부터는 일정비율의 조합비를 받았습니다.

문화공보부가 이 조합비를 주로 문제 삼은 것이었습니다.

이 법정수당에서 쟁의기금이 공제 되었다는 것과 쓰고 남은

돈을 마구잡이로 사원들이 나누어 썼다면서 문화공보부에

마지막 남은 법률적 권한 검사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문화공보부의 검사관으로 파견된

관리들과 노조간에 실랑이가 벌어져 문화공보부는

 결국 검사권을 행사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1990년 2월 5일부터 감사원이 본격적인 감사에 나섰습니다.

감사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는 법정수당의 지급 절차에

있어서 정상적인 결재가 나기 전에 지급 되었다는 등

절차상의 하자고 있었고 쟁의기금 중 일부가

잘못 공제 되었다는 것 이었습니다.

 

한편에서는 문제가 될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KBS에 이토록 자율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세력이 존재 하는 한 그대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일 이었습니다. 사안을 보는 시각에 따라 행정절차의

잘못으로 실무적인 책임을 묻는 선에서 종결 될 수 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예측할 수 없는 회오리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내에서는 종전의 감사 관례상

前者에 무게를 두는 견해가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상시의 일 이었습니다. 정부와 방송의 위상정립의

문제가 걸려 있는 가장 미묘한 시점에서 평상시의 관례대로

 일 처리를 할 이도 없고 또 감사원의 감사에 임하는

제반 상황으로 보아서 문제의 심각성이

예견 되는 것이었습니다.

 

 2월 27일 KBS는 아직 감사 통보도 받지 않았는데

 감사원 감사결과가 엄청난 사건으로 신문지면을 뒤 덥기 시작

했습니다. 보도 내용인즉 연차수당, 월차수당, 상여금등이 포함되어

지급된12월 봉급이 마치 KBS사원들에게 평소에 주어지는 봉급인 것처럼

 부풀려 지는가 하면 공사가 노동조합의 쟁의기금을 주었다느니 KBS가

 쓰고 남은 남는 돈을 직원들이 나누어 가졌다느니 KBS를 음해하려는

 좋지 않은 용어를 모두 동원한 것 같은 보도내용과 함께 사장,

부사장, 인사관리실장, 노무국장 등에게 해임 통보를 했다는

 내용을 곁들여 아연실색할 내용들로 신문

지면을 뒤 덮어 버렸습니다.

 

41억의 KBS예산이 불법 지출 된 것처럼

 어마어마한 숫자를 늘어놓으면서 KBS를 매도하는

내용으로 가득 매웠습니다. 봐라! 정부가 KBS를 통제할수

없게 되니 요지경속이 되어 버렸다. 이러고도 KBS를 정부

울타리 밖에 놓아두고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가장

우려했던 시각에서 본 그것 이상이었습니다.

 

신문들에 접한 KBS사원들은

아연실색 했습니다. 이어 28일에도 주먹만한

글자로 제목을 뽑아 집행간부와 감사가 사표를 제출 했다고

 KBS안에서는 영문을 모르는 내용들이 신문지상에 터져 나왔습니다.

신문을 앞세워 KBS를 몰지각한 집단으로 몰아 갔습니다.  KBS자율권을

일거에 박탈해야 된다는 분위기로 몰리고 시청자들로부터는

 시청료를 납부하지 않겠다는 말들을 곁 들인

 비난의 화살이 빗발 쳤습니다. 

 

 KBS인들은 오랜기간 법률에

법정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이 있는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또 알았다 해도 그런것을 요구 하지도 않고

오직 일만 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토요일도 공휴일도 없이 일만 하면서

오직 좋은 방송 내 보내서 시청자 욕구를 충족 시켜 드리면 그 긍지로

살아 왔습니다. 휴가라는 단어는 생소하기만 했습니다.

 

 이 법정수당 문제가 불거지기 전 까지

법정 수당 같은것 생각치도 않고 살았습니다. 

오랜기간  사원들의 희생적 바탕위에서 회사가 이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법률에 정해진  대로 다 받을 수는 없어도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는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유난히도 시간외 근무를  많이 하는 KBS인으로서는 법정수당을

제대로 계산하면 기본급의 50%가 다 되는 금액이지만

 이 때는 20%를  받자고 해서 공감대가 이루어져

회사와 노동조합이 합의를 했던 것입니다.

 

 KBS에는 법정수당 사건이 일어나기전에

PD 뇌물사건이라고 하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또 한가지의 자랑스럽지도 못한 PD뇌물사건을

여기서 다시 얘기 하고 싶지도 않고 또 PD 뇌물 사건과

같은 일이  방송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당사자에 관해서 형사사건으로

처리 되어야 할 일이고 또 종전에도 그리 해

왔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방송인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고가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영문을

몰랐지만 법정수당사건과 맞물리면서 방송민주화로  가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이 사건을 이용하려는 흔적이

있었음을 지울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이 사건으로 처음에는 한 두 사람의 PD가

구속 되었습니다.  종전에도 방송인이 연예인들에게

 향응 등의 사례를 받는 일은 종종 있었던 일로 관련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 왔고 책임을 젔습니다.  이번의 일도 그런일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사정이 달랐습니다. 의도적이 아니고서는

사건 전개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 했습니다.

 

 사건은 장기간 끌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언론에 보도되고 그러면 그것이 검찰에서 사건화 되어

확대 되고 그것을 받아 언론이 확대 보도하고 서로 주고 받으면서

만지고 만져 키워 2개월 이상 끌면서 방송인들을 범죄 집단으로

몰아가는 그야말로 교묘한 현상이 벌어 졌습니다.

 

모든 신문들이 여기에 가담 했습니다.

수사 중인 피의 사실을 외부에 공표 할 수 없다는

법률 규정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방송인들을 법률적으로는

 물론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집단으로 몰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관련자는 물론 방송인 전체를 그렇게

 매도하면서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기에 충분 했습니다.

방송과 신문이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지만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것이었습니다.  2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날마다 사건은

확대 재생산 되면서 민영방송의 1명을 포함해서 6명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시청료 거부 운동 이래 신문에 마음 아파진

 저는 이 때 모든 신문을 끊었습니다. 지금 까지도 요.

 

그래도 요즈음은 마음이 많이 풀려서

인터넷 신문과 인물 DB에는 자주 들어갑니다.

그러는 동안 방송인들의 위상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는 이 사건이 1990년의 서곡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PD사건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법정수당 사건이

이어졌습니다.  법정수당이란 법률에 정해진 수당을

받는 것이고 더 쉽게 얘기하면 시간외

수당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관련 글 더 보기 

 

방송민주화의 진통과 1990년 (1)

http://blog.daum.net/jc21th/17780624

 

방송민주화의 진통과 1990년 (2)

http://blog.daum.net/jc21th/17780626

 

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 3 )

http://blog.daum.net/jc21th/17780640

 

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4)

http://blog.daum.net/jc21th/17780644

 

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5)

http://blog.daum.net/jc21th/17780669

 

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6)

http://blog.daum.net/jc21th/17780670

 

1990년 방송민주화운동 그때 그 얘기 (7) 마지막회

http://blog.daum.net/jc21th/17780671

 

동영상으로 본 1990년의 KBS 방송 민주화운동 현장 

http://blog.daum.net/jc21th/17780782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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